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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의 다리 건너 행복의 나라로
2001-10-12

기괴한 이미지 벗겨내고, 로맨틱 코미디 <아멜리에>로 돌아온 장 피에르 주네의 작품세계 (2)

파리, 그러나 현실에 없는

전혀 다른 뭔가를 시도해야 하는, 절박하다면 절박한 계기도 있었다. 55년 로안에서 태어난 주네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전화가설공으로 일할 당시 슈퍼8mm 카메라를 장만해 독학으로 영화를 익혔고, 광고와 뮤직비디오와 단편영화를 찍으며 장편 영화로 옮아 왔다. 그에겐 무명시절부터 동고동락해 온 파트너 마르크 카로가 있었고, 카투니스트와 애니메이터로 활약한 전문 디자이너였던 카로는 주네의 영화세계, 특히 시각적인 측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 카로와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이후 결별했고, 조력자인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쥐와도 <에이리언4>이후 함께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주네는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파트너인 카로가 혐오해 마지않던 향수, 복고 등의 센티멘털리즘으로 내달림으로써, 비로소 ‘사적인’ 영화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아멜리에>에서 그의 노스탤지어는 제2의 고향 파리였고, 따라서 시대성과 공간성을 완벽하게 표백한 그의 전작들과는 다른 지점에서 출발해야 했다. 아멜리에의 출생에서 성장까지를 설명하는 프롤로그, ‘48시간 이내에 그녀의 인생은 달라진다’며 본격적인 스토리를 예고하는 내레이션, 48시간 뒤 파리 풍경을 크로키해 보이는 에필로그까지, 영화는 쉬임없이 ‘시각’을 알려댄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노트르담 사원과 지하철역과 계단과 카페 등 ‘파리적인’ 공간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그건 열려 있는 실제 공간들이다. 정교하게 짜여진 세트에 익숙한 주네에겐 낯선 시도였다.

그러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몽마르트르는 현실이 아니다. 리안이 <와호장룡>에서 구현한 ‘클래식 차이나’의 이미지처럼, 주네 자신의 추억과 상상으로 가공한 하나의 이미지다. 아멜리에가 40년 묵은 한 소년의 보물상자를 발견하고 임자를 찾아주면서부터 남의 행복을 찾아주리라 다짐하는 것처럼, 주네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과 향수는 남루한 일상에서의 유일한 탈출구가 된다. 파리라는 너른 도시도 “인공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변형하길 좋아하는” 감독의 손길에서 결코 자유롭진 못했다. 주네는 파리의 시가지에 더러는 세월을 입히고 더러는 비현실성을 입히는 ‘환경 미화’를 단행해, 21세기 파리를 시대 불명의 동화적인 공간으로 재창조했다. 그 속에서 ‘남몰래 착한 일하기’나 짝사랑에게서 다가섰다 도망치기를 반복하며 ‘술래잡기’하는 아멜리에의 모습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빨간 망토> 같은 동화 속 캐릭터가 겹쳐 보이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델리카트슨 사람들>과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를 통해 주네와 카로의 트레이드 마르크가 돼버린, 광각 렌즈과 느슨한 패닝의 몽환적 영상은 ‘덜 기괴한’ 영화인 <아멜리에>에 이르러 자제된 반면, 감정의 추이를 충실히 따라가는 고속촬영과 저속촬영, 극단적 클로즈업의 사용은 더 빈번해졌다. 영화는 카툰의 구도와 이미지, CF의 활기찬 리듬을 따른다. 아멜리에가 니노를 처음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찰나에는 <마스크>의 짐 캐리 것을 닮은 하트 모양의 붉은 심장이 아멜리에의 가슴 밖으로 뛰쳐나오고, 니노를 외면한 뒤에 후회와 슬픔이 차오르겠다 싶으면, 아멜리에의 전신은 그대로 물기둥이 돼 허물어내린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는 ‘기적’이 펼쳐지는 것이다. <사이트 앤 사운드>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하이테크적 미장센, 만화와 CF적인 영상에 녹여낸 감독의 연출력”이 <아멜리에>의 성공 요인이라고 진단한다. 배우로 참여한 카소비츠도 “주네의 카메라는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들을 손에 잡힐 듯한 이미지로 펼쳐 보이고 있다”고 맞장구친다. 이렇게 게임을 풀듯 퍼즐을 맞히듯, 기억의 몽타주에 휘말리고 있을 때, 한 소년이 튀어나와 길을 막고 말한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걸 보세요.” 주네가 구현하는 이미지는 분명 허상이지만, 그 너머에 뭔가 있음을, 소년의 모습을 한 주네가 슬그머니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꿈을 꾸라, 꿈을 꾸라

주네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어딘가 결핍된 인간군상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주네 자신이 ‘몬스터’라고 지칭하는 그 캐릭터들은, 인간 본성의 마디마디를 과장하거나 왜곡한 것이다. 부랑자들과 복제인간은 특히 주네가 사랑하는 캐릭터들. 비교적 정상적인 캐릭터들로 꾸려진 <아멜리에>에도 스토커 기질이 있는 카페 손님부터 외부 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몸이 약한 유리 인간까지 집착과 연약함을 상징하는 주변 캐릭터들이 포진해 있다. 조금씩 뒤틀려 있는 다수로부터 살아남거나 거꾸로 그들을 구원하는 건 아멜리에처럼 백지상태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 같은 어른이다. 동화가 사랑하는 건 아이들이니까. 동심이 어른의 세상을 구하고(<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인조인간이 인간을 구하는 아이러니(<에이리언4>)는 <아멜리에>에도 흐르고 있다. 세상과 사람을 등진 외로운 이웃을 구원하는 이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자폐적인 소녀 아멜리에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의 천재 발명가는 두뇌를 얻은 대신 꿈을 품을 가슴을 잃었다. 꿈을 꾸지 못하는 그는 일찍 늙어버렸고, 그래서 아이들을 유괴해 꿈을 훔쳐서라도 생을 이어가고 싶어한다. 살아 있으나 죽어 있는 삶. 그건 소름끼치는 악몽이다. 기지개를 켜고 보니, 저 건너 몽마르트르 언덕에 한 아가씨가 서 있다. 애정 결핍, 자신감 결핍, 사회성 결핍…. 그녀는 결핍투성이다. 꿈꾸는 것이 유일한 낙인 그녀의 풀죽은 삶은, 슬프고 외로운 이웃들의 사소한 일상을 조작해 그들과 꿈을 나누면서부터 숨가쁘게 고동친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일상에서 추억으로 도피하는 것일 테지만, 그들은 그럼으로써 비로소 행복해진다. 주네에게 있어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가르는 기준은 ‘꿈’이다. 더이상 꿈꾸지 못하는 이의 암울한 초상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와 꿈을 통해 생의 환희를 호흡하기 시작하는 다정한 이웃들의 이야기 <아멜리에>는 빛과 그림자처럼 동전의 양면처럼 다르고도 같은 노래를 들려준다. 꿈을 꾸라, 꿈을 꾸라고.1991년 <델리카트슨 사람들>(마르크 카로와 공동 연출), 1995년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마르크 카로와 공동 연출), 1997년 <에어리언4>, 2001 <아멜리에>박은영 [email protected]. 사진 오게옥 [email protected]▶ 장 피에르 주네의 작품세계 (1)

▶ 장 피에르 주네의 작품세계 (2)

▶ 주네의 조력자들

▶ 장 피에르 주네 인터뷰 (1)

▶ 장 피에르 주네 인터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