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옥엽> <첨밀밀> <아이니아이워> 등을 통해 감성적인 사랑이야기를 그려온 홍콩의 진가신 감독은 허진호 감독과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가 허 감독을 알게 된 것은 1999년 비행기 안에서 를 보면서였다.
몇 개월 뒤 그는 한국을 찾아 허진호 감독을 만나 차기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영화사 어플로즈 픽처스를 통해 이 영화에 투자를 결정했고 홍콩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배급을 약속받았다. 투자자인 그가 <봄날은 간다>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편파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비슷한 감성의 감독이자 아시아영화계의 동료로서 이 영화에 대한 ‘가슴으로부터 쓰는’ 감상문을 보내왔기에 여기에 싣게 됐다. 편집자
나는 영화평론가가 아니며, 영화평론가가 될 만큼 분석적이지도 않다. <봄날은 간다>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느꼈던 부담은 시나리오를 쓸 때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결국 떠오르는 대로 혹은 가슴에서 나오는 대로 쓰기로 결심했다. 허진호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 그랬던 것처럼.
사실 나는 이 영화에 완전히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순 없다. 내 영화사가 이 프로젝트에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나리오를 이미 읽었고, 초반 편집본도 봤으며, 2년 전에는 서울에서 허진호 감독을 만나 차기작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듣기도 했다. 물론 그 작품은 바로 <봄날은 간다>였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그리고 들었던 어떤 것도 어제 아침 큰 스크린을 통해 본 작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영화는 쉽게 찾아왔다가 예기치 않게 사라지는 사랑 속에서 인물들의 감정의 출렁임을 정말 충실하게 따라간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까지 이러한 주제의 영화, 노래, 시 등에 이끌려왔다. 재밌는 점은 제작 초기 시나리오를 보거나 이야기를 듣기만 했을 때는, 이 작품이 무엇에 관한 영화인지 도무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 감독의 시선을 시나리오나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큰 스크린에서 실제로 봐야 하는 또다른 이유다.
에서처럼 허진호 감독은 ‘천천히’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영화 전반부를 할애한다. 이는 후반부에서 상우와 은수가 겪는 고통과 슬픔을 관객이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다. 은수가 아파트 앞에서 헤어지자고 할 때, 상우가 “내가 잘할게”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몇줄 뒤에 앉아 있는 홍보 책임자가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나보다 더 크게 훌쩍였다는 게 다행이었지만. 나중에 상우가 슬픔에 빠져 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이처럼 ‘사나이’가 사랑 때문에 슬퍼하는 모습이 나온 영화를 본 기억이, 최소한 아시아권 영화에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상처를 입기 쉬운 순간의 사람들에 대한 진솔하고 성실한 초상, 이것이야말로 허진호 감독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지점이다.
나는 그의 영화에서 롱테이크 사용에 매료돼왔다. 그의 롱테이크에는 다른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실성과 연출된 바의 묘한 조화가 있다. 이 완전무결한 균형은 천재의 솜씨이거나 뛰어난 장인의 평생에 걸친 노력에서 기인한 것일 터. 허우샤오시엔 같은 다른 롱테이크 거장과는 달리 허진호 감독의 롱테이크와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와이드숏은, 실제로는 캐릭터들을 가까이서 찍지 않는데도 마치 클로즈업으로 찍는 것처럼 그들의 표정을 느끼게 한다. <봄날은 간다>의 마지막 부분에서 상우와 은수가 결국 헤어지는 장면은 이 경우의 완벽한 예라 할 수 있다. 3∼4분은 족히 될 이 테이크의 대부분에 걸쳐 은수는 초점 밖으로 빠져 있고, 절반 정도의 시간 동안 상우는 카메라를 등지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의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봤다. 마치 마술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최근 2년 사이에 허진호 감독은 나의 좋은 친구가 됐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이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진정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훌륭한 감독치고 인간성까지 좋은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 영화를 그토록 좋아하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유지태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 속 자아임에 틀림없는 상우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는 허진호 감독의 모습, 말투, 걸음걸이, 웃음, 심지어 술 취한 모습까지 너무 잘 잡아냈다. 내게는 옛 친구를 두 시간 동안 스크린을 통해 만나는 것 같았다. 상우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허진호 감독도 분명 좋아하게 될 것이다.
방금 전의 이야기는 물론 이 영화와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영화평론가도 아니고, 이 글도 영화평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내 가슴으로부터 쓰고 있는 것이다. 진가신/ 어플로즈 픽처스 공동대표·영화감독·<첨밀밀>▶ 노희경, 신경숙, 심영섭, 진가신이 <봄날…>에 띄우는 네통의 연서
▶ <거짓말>의 작가 노희경, 두 주인공에게서 그의 과거와 현재를 보다
▶ 소설가 신경숙, 시간을 사색하다
▶ 영화평론가 심영섭, 우리 시대의 오즈 야스지로를 보다
▶ 홍콩 감독 진가신이 <봄날…>을 좋아하는 영화 외적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