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내게 말했다. “우리 한달만 떨어져 있어 보자.” 헤어짐에 유효기간을 두고 소멸되어가는 사랑을 지켜볼 수 있는 쪽은 언제나 덜 사랑하는 사람쪽이다. “난 너랑 못 헤어져. 난 헤어지는 거 생각해본 적 없어.”
허진호는 사랑이 올 때는 대숲소리, 잔물소리, 인경소리를 택하더니 사랑이 몰려나갈 때는 파도소리를 택한다.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의 부서짐. <봄날은 간다>는 그렇게 공간으로 만남을 이야기하고 시간의 공기로 빈자리를 채우며, 계절로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건 자연의 섭리처럼 막을 수도 채울 수도 없다는 것. 그는 이번에는 사진 대신 소리를 잡으려 부질없는 손짓을 허공에 휘젓는다. 그때마다 허진호라는 지휘자의 손짓에 갈피갈피 묻어둔 빛바랜 기억의 음표들이 공기중을 떠돌다 사그라진다.
어쩌면 소리를 채집하는 남자와 소리를 흘려버리는 여자는 애초에 각기 다른 궤도에서 돌다 스치는 별의 운명 외에는, 허락된 사랑이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상우는 은수와 사랑을 시작하자 자꾸자꾸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리고 그때 강릉이란 공간은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확신하듯 영원한 어떤 것, 겨울의 눈 속에서도 되살아나는 대숲과 봄날의 햇살에서도 파릇한 무덤의 이미지이다. 사랑의 확신 속에 봄은 찾아들고 은수와 상우는 “우리도 묻히면 저렇게 같이 묻힐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미 여자는 남자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근데 좀 늦게 오신 것 같네요’라고.
사실 할머니와 은수는 한번도 같은 공간 속에 만난 적이 없다. 때도 그랬다. 다림이와 정원의 아버지는 만난 적이 없는 타인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남자 안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허진호는 그 보이지 않는 고리에 기다림과 그리움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며 안타까워하던 상우에게, 할머니는 사랑하는 이와의 불운했던 기억을 비워냄으로써 기다림과 그리움에 몸을 의탁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준다. 상우는 심장보다 손을 높게 두어 상처를 아물게 하는 법도 할머니에게서 배웠노라고 말했다.
그것은 라면과 일회용 커피라는 인스턴트화되고 뿌리내리지 못하는 은수의 사랑에 대비되는 아주 오래 묵혀 미움조차도 삭혀낸 사랑. 정선 아라리를 부르는 노부부의 뒤에도 보리밭에서 소리를 채집하는 상우의 등뒤에도 서 있는 건 바로 그런 큰 나무였다. 묵묵한 세월의 나무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나이테를 속 깊이 감춘다. 그때 소리는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바람이 되고, 화분을 내밀던 은수도 실은 그런 큰 나무를 가꾸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깊은 슬픔의 꽃을 피우기 위해 허진호의 영화는 얼마나 많은 양지들을 펼쳐 놓았던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강릉에서 오는 상우의 우는 모습은, 집에 와서도 커튼을 치고 흐느끼며 누워 있는 상우는 그렇게 음지였다. 깊은 슬픔의 웅덩이였다. 김영랑의 시구처럼 찬란한 슬픔의 봄 같은 허진호의 영화들에서 다시 한번 우리 시대의 오즈 야스지로를 느낀다. 다다미 미장센에 버금가게 허전하면서도 맑은 윤기가 나는 마룻장 미장센이 있는 영화세상을.
아마도 오즈의 다다미가 밖에서 안을 보는 자리라면 허진호의 마루는 안에서 밖을 보는 자리일 것이다. 그 자리는 올 것 같아서 기다려지는 자리, 내가 떠나서 남겨지는 삶의 무게가 조금은 많아졌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자리. 그리하여 그 마루는 허진호가 아무리 내밀한 개인적인 관계에 천착해도 여전히 가족이 있는 그 허전한 여백으로 되돌아오리라는 약속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쉼없이 세월을 흘려버려도 허진호의 그 닫힌 우주에서는 아무도 타인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실의 바다에서 묵묵히 깊은 슬픔을 길어 올리며, 정작 감독이 가장 많이 마음을 준 사람은 혹시 할머니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왜냐하면 허진호의 영화에서 카메라를 움직인다는 것은 일종의 자그마한 사건이고 소중한 고백 같은 것인데, 카메라는 은수보다 오히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할머니의 육신이 빠져나간 흰 고무신을 쓰다듬듯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문득 삼년 전 겨울 생각이 난다. 우리 아이를 헤어진 남편에게 보내고 구정날, 를 보러 동네의 변두리 극장을 찾았었다. 그날 따라 극장은 보기 드물게 붐볐고, 사람들은 가족끼리 손을 잡고 와서는 ‘심은하가 이뻤고, 한석규가 잘했다’고 소곤대며 극장문을 나섰다. 천호동에서 암사동까지 걸어서 집에 돌아갔는데, 도중에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천원짜리 비디오도 샀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난 영화평론가가 아니었다. 그뒤론 잠이 잘 안 오는 밤엔 를 켜놓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정원이가 아버지에게 비디오 트는 법을 가르쳐 주는 장면이 지나면 언제나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추석이 되고 다시 가을이 돌아왔다. 이제는 ‘내 생애 단 하루뿐인 특별한 날’ 대신 ‘예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그렇게 천천히 나의 심장박동과 그의 호흡을 일치시킬 수 있다면. 먼 훗날 <봄날은 간다>는 내게 사랑보다는 사랑의 자세에 관한 영화로 남게 될 것만 같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노희경, 신경숙, 심영섭, 진가신이 <봄날…>에 띄우는 네통의 연서
▶ <거짓말>의 작가 노희경, 두 주인공에게서 그의 과거와 현재를 보다
▶ 소설가 신경숙, 시간을 사색하다
▶ 영화평론가 심영섭, 우리 시대의 오즈 야스지로를 보다
▶ 홍콩 감독 진가신이 <봄날…>을 좋아하는 영화 외적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