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왜 안 일어나지? 엔딩 자막이 올라간 뒤 내가 나와 함께 영화를 본 옆사람에게 귀엣말로 속삭인 첫말이다. 우리는 그러고도 잠시 한동안 더 앉아 있어야 했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가만히 앉아 있는 관객 사이를 나는 볼일 다 봤어요, 하며 턱턱 걸어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사람들이 너무나 조용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이 올 것 같은 겨울날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볼 때의 그 정적이 영화가 끝난 스크린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흘러다니고 있었다.
그뒤 며칠, 혼자 있을 때, 계단을 오를 때, 현관문을 딸 때, 거실에서 내 작업실로 걸어올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고 혹은 꽃이 피면 함께 웃고 꽃이 지면 함께 울던- 이라고 습관처럼 허밍을 넣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정적과 입 안에서 맴도는 쓸쓸하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한 허밍.
허진호의 영화 속엔 제목에서부터 시간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가 그렇고 <봄날은 간다>, 가 그렇다. 앞의 작품에서는 겨울까지 기다릴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인해 분침의 째깍거리는 소리까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은 운명의 시간이 존재하고, 뒤의 작품에서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여일하게 흘러가고 있는 일상의 시간이 존재한다. 앞의 작품에서 시간은 사진관에 붙어 있는 사진처럼 붙박혀 고여 있고, 뒤의 작품에서 시간은 갈대밭을 쏴아 소리내며 지나가는 바람처럼 지금도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허진호처럼 주제와 주인공의 직업을 딱 맞아떨어지게 포착해내는 감독도 드물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운명에 맞서며 혹은 일상에 마모되며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장면이 곧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장면이 되는 것이다.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의 일은 소리를 채집하는 것이고 은수의 일은 소리를 흘려보내는 일이다. 이것이 사랑에 적용되었을 때 이들이 각자 어떤 입장에 서게 될지가 감지된다. 그렇다해도 산사에서의 깊은 밤 혹은 신새벽 눈이 오시는 소리와 풍경소리를 채집하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었으면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그렇게 아름다운 날이 우리 인생에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감독에게 정색을 하고 이 장면에서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 것은 완전히 불필요하다.
하긴 은수는 왜 그러합니까? 혹은 상우는요? 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로 불필요하다. 보고 느끼는 것. 감정이 철저하게 절제되어 있는데도 저 이야기를 타인의 이야기라고 돌리지 못하는 것은 영화 속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내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상우의 아버지도 고모도 할머니도 각기 우리 보편적인 인생들의 한 단면을 무게있게 재현하고 있다. 누구도 오버하지 않는다. 다 그러함직하기 때문에 누구도 미워할 수 없다. 거기 그렇게 무연하게 서 있는 상우와 은수를 누가 미워하겠는가. 자신의 이야기, 게다가 나도 언젠가 그렇게 느꼈는데 딱 한마디로는 설명이 안 되었던 그런 내밀한 이야기인 것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고 말하는 상우를 보며 나도 언젠가 나를 저버리려는 누군가를 향해 저 말을 내뱉었거나 뱉고 싶었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상우를 저버리려는 은수를 보며 저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저버렸거나 지금 저버리고 싶은 나를 보기도 하는 것이다. 화면에 보이지 않지만 그 사이엔 잔인한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모든 첫 마음을 변색시키는 속성의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력하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간다. 잊을 수 있기 때문에. 하물며 사랑 따위가 어찌 버틸 것인가. 가장 찬란할 때 죽지 않은 이상 그 순간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주고 난 다음엔 사랑은 무엇을 주는가. 상우의 마음이었으면 좋겠으나 대개는 은수의 마음을 준다. 균열을 일으키며 휘청거리다 헤어져, 라고 말하는 은수를 보며 관객은 그래, 나도 그랬어, 서울에서 강릉까지 택시를 타고 달려온 너를 이슬을 맞아가며 기다리기도 했으나, 네 앞에서 종아리 털을 뽑아도 될 만큼 네가 익숙해진 뒤엔 지겹기도 했지, 네가 나를 다른 삶으로 데려가 줄 사람 같지가 않아서 너를 저버리려 했지, 그런 내가 이기적이고 싫기도 했지, 라고 관용과 이해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이기가 앞서는 순간 은수처럼 힘들게 다시 자신을 찾아온 상우를 두고 나, 지금 어디 가야 돼, 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어디로 가버린 그녀 뒤에 남아 있는 상우의 시간이 <봄날은 간다>, 이다.
지나가 버린 시간 속에서 승자와 패자가 있겠는가만 결국 승자는 떠난 사람이 아니라 남아서 시간을 견딘 사람이다. 은수는 떠났기에 한번쯤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신이 저버린 사랑이었더라도 그토록 아름다웠으니 돌아와서 우리 함께 있을까?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 봄날은 가버렸다. 가버린 봄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그것을 우리는 매번 봄날이 다 가버린 뒤에나 알게 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신경숙/ 소설가·<풍금이 있던 자리> <깊은 슬픔> <바이올렛>▶ 노희경, 신경숙, 심영섭, 진가신이 <봄날…>에 띄우는 네통의 연서
▶ <거짓말>의 작가 노희경, 두 주인공에게서 그의 과거와 현재를 보다
▶ 소설가 신경숙, 시간을 사색하다
▶ 영화평론가 심영섭, 우리 시대의 오즈 야스지로를 보다
▶ 홍콩 감독 진가신이 <봄날…>을 좋아하는 영화 외적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