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수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세월이었다. 목소리를 다시 직접 마주하기까지 그는 얼마나 ‘멀고 먼 길’을 돌아온 걸까. 32년 전, 한대수는 동시대 젊은이들의 마른 가슴을 축여주는 젊은 가객이었다. 막걸리처럼 걸쭉한 목소리로 외치는 <물 좀 주소>나 “장막을 걷어라”라고 이상향에의 동경을 읊조리는 <행복의 나라로>는 김민기의 수일한 노래들과 함께 70년대 청춘들의 성가 목록에 올랐다. “목적이 있어서 작곡한 건 아니었다”며, “내 삶을 노래하자니 자연히 둘러싼 현실도 담겨 오더라”는 말대로 그의 음악이 설사 사적인 몽상에 가까웠다 해도, 거기 스민 자유의 내음은 암울한 현실에 위안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은 노래할 자유를 잃고 미국으로 떠났고, 우리에게 한대수는 오랫동안 음반 몇장과 함께 목소리로만 남아 있었다. 그가 고국의 무대를 다시 찾은 것은, 대중음악과 한국 록음악사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한 뒤의 일이다. 97년부터 몇몇 대형공연에 초대받고 자서전을 펴내는 등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던 그가, 이번엔 다큐멘터리의 피사체로 돌아왔다. 올 11월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이 확정된 <다큐멘터리 한대수>는 한양대 연극영화과 출신 선후배인 이천우와 장지욱, 두 젊은 감독이 카메라로 따라잡은 그의 현재에 대한 기록. 새 음반 작업을 위해 국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던 지난해, 카메라는 그와 걸음을 함께하며 음악인으로서뿐 아니라 ‘사람’ 한대수의 삶을 되짚어갔다.
가편집이 끝난 다큐멘터리를 핑계 삼아, 논현동에 임시로 오피스텔을 얻어 사는 그를 만났다. 단발머리에, 웃옷을 입지 않고 치마처럼 펄럭이는 바지를 휘감은 모습, 마실 것을 권하고는 손수 커피물을 끓이며 그는 “기타, 맥주, 낮잠” 세 단어를 노래하듯 흥얼거렸다. 그에게는, 여전히 틀에 얽매이지 않는 분방한 활기가 있었다. 다큐멘터리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여정을 물어보려는데, 부인의 란제리 차림과 자신의 뒷모습을 담은 기발한 포스터를 가리키며 그가 먼저 물었다. “어때 양호하지?” 그 손끝을 눈으로 좇는데 눈에 띄는 ‘라스트 솔로 콘서트’란 글귀. 그렇지, 그는 무려 32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작정한 국내 단독 콘서트를 앞두고 있었다.
#1. 2001 한대수 오디세이의 시작
2000년 7월, 부산의 어느 편의점. 자신의 기사가 난 신문을 본 한대수가 “한 마리 살게” 하자 친구가 “내가 살게” 하고 나선다. 화면 밖의 목소리가 점원에게 “한대수씨 알아요?” “모르는데요.” (웃음)(<다큐멘터리 한대수> 중에서)
확실히 그는 요즘 사람들에게 낯선 얼굴이다. 70년대 중반 한국 땅을 떠난 이래 97년 유니텔 록콘서트 무대에 서기까지, 그는 몇장의 음반으로 남아 있었을 뿐이니까. 그나마 2집 <고무신>은 유신 독재의 서슬 아래 마스터테이프까지 압수당하고 판매금지됐으며, 데뷔음반인 <멀고 먼 길>이나 미국으로 간 뒤에 낸 <무한대> <기억상실> 역시 희귀음반에 가까워 실체를 접할 길은 묘연했다. 60년대 말 김민기, 양희은과 함께 모던포크를 이끌고, 직접 곡을 만들고 부르는 싱어송라이터의 문을 연 한대수. 방랑자 같은 자유에 대한 갈증을 품은 그의 음악은 본의든 아니든 유신 독재의 장막에 갇힌 사람들의 가슴을 적셔주는 단비였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힘 있는 포크기타 선율, 걸걸한 음색으로 삶의 속내와 이상을 담은 노래는 시대를 떠나 지금도 마음을 파고든다. 그 노래들이 태어난 시대에서 멀리 떨어진 스물여섯의 장지욱씨가 그를 다큐멘터리의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 것도 그런 매력 때문이다.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위로 물결같이 춤추는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하는 <바람과 나>의 가사처럼, 세파에 초연한 보헤미안의 자유로움을 꿈꾸는 바람.
#2. 클로즈업: 물 좀 주소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수백개의 눈동자가 나를 관통하는 것이 느껴졌다. (중략)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Set aside all my days….”(한대수 자서전 <물 좀 주소 목마르요> 중에서)
무교동의 음악공간 ‘세시봉’을 첫 무대로 세상에 등장한 68년, 그는 스무살이었다. 외로운 뉴욕 생활에 지쳐 서울의 어머니에게 돌아온 직후. 한창 만개한 히피문화를 누린 자유분방한 품새와 덥수룩한 긴 머리,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기타와 하모니카의 열띤 연주로 불러젖히는 그는 한없이 낯선 존재였다. “엄마가 처음에 잘해줬는데,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지.” 그가 어릴 적 미국으로 유학간 아버지의 돌연한 실종 뒤 재혼한 어머니에게 오랜만에 재회한 아들의 분방함은 생소했다. TV에 출연하면서 ‘신기한 동물’ 취급에 더욱 외로웠던 무렵, 자신을 이해해주는 여자친구와 밤을 보내다가 들킨 그는 어머니의 집에서 쫓겨났다. 명륜동 셋방으로 옮기긴 했지만 용돈도, 끼니를 때울 방법도 막연했다. 마침 기타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두 여성팬의 도움과 영어회화 교습, 세시봉과 TV 방송 출연으로 힘겹게나마 생활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여자친구는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을 남겼다. “너무 좋다는 거야, 내 음악이.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래. 으아, 당신 돌았소, 아무도 나를 모르는데, 말이 되느냐, 그랬지.” 며칠 뒤 두 사람은 사재를 털어 남산 드라마센터를 예약했고, 그는 지금이라면 예술의전당쯤 되는 그 무대에서 첫 단독 공연을 가졌다. 단독 공연은 그걸로 끝이었지만, 이 공연은 <멀고 먼 길>의 녹음으로 이어져 공식적인 데뷔에 기폭제가 됐다.
#3. 인서트: 코리아나 인 뉴욕
“뉴욕이 좋냐, 서울이 좋냐 많이 묻는데, 예전에는 뉴욕이 훨씬 낯익고 편했지. 몇번 오다보니까 이제는 서울에 와도 낯선 느낌이 덜 해. 아는 동네도 생겼고. 지금은 거의 반반이야. 서울은, 한국은 사람들 인정이 더 있잖아. 오목오목 여자 유방 같은 산의 선도 예쁘고. 뉴욕에서 좋은 건 프로페셔널리즘. 그리고 좀 디테일한 거.”
74년 <멀고 먼 길>로 데뷔한 기쁨도 잠시, <고무신>을 낸 지 2주 만에 판매금지의 철퇴를 맞은 그는 미국에 정착하기로 맘먹었다. 미국은 어려서부터 인연이 많은 나라였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유학간 공학도 아버지가 실종된 나라고, 연세대 학장을 지내다 선교사로 초청된 할아버지를 따라 나선 그가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곳도 뉴욕이었다. “놀림 무지 받았지. 내가 눈이 좀 째졌잖아. 화장실 가서 애들 패고, 나도 많이 맞고.” 편견과 관습에 매이지 않는 넉넉함은, 인종과 언어, 문화의 이질감을 일찌감치 체득한 덕분이기도 하다. 실종 십여년 만에 FBI가 찾아낸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다시 뉴욕으로 간 게 고등학교 때인 64년. 할아버지의 바람대로 뉴햄프셔대학에서 수의사가 될 뻔하다가 사진을 발견한 것도, 사진학교를 다니며 히피문화의 세례를 받은 곳도 뉴욕이었다. 하지만 음악을 잃고 돌아간 뉴욕에서, 이미 히피시대의 낭만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결혼도 했고, “처음 2∼3년은 방값을 벌기도 바쁜” 생활고에 음악은 뒷전이었다. 디자인 포장센터의 디자이너, <코리아 헤럴드>의 기자 겸 사진작가로 일한 한국에서의 경력을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카메라점의 선적부라는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칭기즈 칸’이란 밴드를 만들어 음악을 재개한 것은, 사진작가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였다. ▶ <다큐멘터리 한대수> 찍고 32년 만에 단독 콘서트 준비중인 한대수를 만나다 (1)
▶ <다큐멘터리 한대수> 찍고 32년 만에 단독 콘서트 준비중인 한대수를 만나다 (2)
▶ <다큐멘터리 한대수>를 만든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