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갈까, 나도 궁금
허: <소름>은 어떻게 만들게 됐어요?
윤: <소름>은 내가 만든 중편 <메멘토>를 장편으로 하고 싶었다가 그게 돈이 없어서 못했어요, 미국에서. 한국에 와서 준비하다가 한번 고쳐가지고 해보려고 했는데, <메멘토> 찍을 때 불만이, 너무 현실하고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었거든요. 너무 인텔리적이고, 현학적인 느낌도 강했고. 그래서 서민의 이야기로 하려 했는데…. 그게 의도대로 됐으면 어머니도 즐거워하셨을 텐데. (일동 웃음)
허: <메멘토>를 봤거든요. 의외였어요. 봤을 때의 느낌이나 기억들이. 히스토리에 대한 것을 먼저 듣고 봐서 그런지, 굉장히 감성적인 느낌이 많았던 것 같아요.
윤: 개인적으로 영화를 찍으면서 늘 갖는 불만이, 시나리오를 할 때나 사랑을 다룰 때도 평이하게 간다고 찍는데 결국은 뒤틀려서 난해해지고…. 뭐 그런 것들이 불만이에요. 외부에서 보면 그게 강점인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내가 현실로부터 멀어져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현실을 잊기 위해 내가 영화를 할지 모른다는 느낌을 가질 때 공포스러워요. 그런데 이나 <봄날…>을 보면 영화가 현실 속으로 들어가잖아요.
허: 박철수 감독님 <학생부군신위>를 볼 때, 참 인상깊었던 장면이 감독님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초혼이라고 하나 그것을 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잡는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영화의 표현을 생활에서 많이 찾으니까 내가 무슨 일을 당했을 때도 이거 영화로 만들면 재밌을까, 이런 장면을 영화로 집어넣으면 어떨까, 이러거든요.
윤: <소름> DVD를 녹음하는데 정성일씨가 인터뷰를 했거든요. 그런데 그러더라고. 세상에 나쁜 놈들이 영화감독이라는 얘기가 있다. 왜냐하면, 친구들이 와서 고민을 얘기하면 언젠가 영화 보면 그게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허: 그게 참 어떨 때 보면 되게 불편해요. 그런 상황들이 약간 뒤틀려 있거나 영화적으로 그런 느낌이 왔을 때 바로 이걸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촉각이 서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러다보니 좀 피곤하기도 해요. 저 같으면 영화 만드는 방식이 주변에서 조금씩 들은 에피소드들을 쌓아놓았다가 재구성하는 것인데, 그게 참 피곤하더라고.
윤: 저같은 경우엔 좀 추상적이잖아요, 허 감독의 경우엔 구체적이고. 감독의 성장배경이라든가 그런 부분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시종일관 웃기고 때려부수는 영화 같은 거야 그런 성향과 상관없이 가겠지만, 어떤 세계를 탐구하고 깊이를 찾는다는 관점에서 볼 때는 그런 것 같아요. 허 감독의 영화는 굉장히 따뜻해요.
허: (웃음) 차갑다는 사람도 있는데.
윤: 영화기법적으로 보면 차갑죠. 감정의 절제라는 차원에선 차갑지만, 기본적으로 흐르고 있는 메시지라든가 이런 것을 보면, 세상을 보는 시각도 따뜻한 것 같아요. 사랑을 바라보는 눈도 굉장히 긍정적인 것 같아요. 제가 이별 과정을 그린다면 냄비 집어던지는 있었을 거예요. (일동 웃음)
허: 아니, 나도 하려고 했어요.
윤: 싸울 때 사실 삿대질도 하고 그렇잖아요. 상대방 자존심 팍팍 깎아내리고 그러다가 또 화해하고, 이렇게 균열가기 시작해서 헤어지고야 말죠. 이명세 감독님의 <지독한 사랑> 보면 그야말로 애증이잖아요. 닭죽 먹다가도 뽀뽀하던 사람들이 눈탱이 밤탱이 될 때까지 또 때리고. 그리고도 또 좋다고 화해하고. 허 감독 영화를 보면 그런 면이 많이 절제되는 것 같아요. 안 좋은 것에 대해서 그렇게 포인트를 주지 않는 것 같아요. 뒤집어 말하면 세상에는 따뜻하고 좋은 점을 부각시키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굳이 나쁜 것까지 다뤄야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식 같아요.
허: 저도 만들고 나서, 내가 왜 이렇게 만들었나 해요. 같은 경우에는 친구와 좀 안 좋은 일도 다 있는데, 왜 그렇게 좋은 기억들만 가지고 갈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그런 게 좀 가식인 것 같기도 하고. 영화라는 게 어떤 시선이 있는 거지만 그 시선이 너무 편중돼 있는 것 아닌가, 그런 고민을 했어요. 좀더 부딪치면서 상처받는 부분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제 성향은 좋은 부분이 재밌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쪽인 것 같긴 해요.
윤: 아니, 뭐 영화를 만들기 위해 굳이 일부러 상처받을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허: 아니 일부러라기보다는. 상처받은 경험도 있는데 그 경험 중에서, 혹은 내가 바라보는 것 중에서 좋은 부분을 많이 선택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적이 있었어요. 회사 그만두고 여러 가지 개인적으로도 안 좋은 일이 있었을 땐데, 차를 몰고 가다가 담배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재떨이에 있는 담배꽁초를 피우고 있는데, 옆에 있는 택시가 빵빵거려요. 쳐다보니까 창문을 내리라고 해요. 그래서 내렸더니 담배 두댄가를 탁 던져주고 부르릉 가더라고요. 뭐 이런 느낌도 있지 않을까, 살면서. 그런 느낌들이 영화로도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쪽을 표현하는 데 내가 관심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 그런 면인 것 같아요. 좋은 것을 봤을 때 기억으로 간직하고 가져가고. 그런데 저같은 경우엔 성향 자체가 좋은 사람이 있는데, 이 나쁜 놈들이 못살게 군다 이런 식이죠. (일동 웃음) 그러니까 이 사람들만 아니면 저 사람들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데. 하는 생각. 시각 자체가 어두우니, 세상이 항상 이 모양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거죠. 이런 게 에너지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감독이 애정을 가지면 전쟁장면도 예쁘게 찍어
허: 아까 <지독한 사랑> 말씀을 하셨는데 저도 좀더 심하게 하고 싶었어요. 상우가 은수한테 너 그 남자랑 잤니, 이런 대사도 있었어요. 현실에선 그런 말을 많이 하니까.
윤: 하여튼 은수가 상우를 두고 백종학과 놀아나는 것을 불륜으로 묘사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허: 그런 것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할까도 생각했어요. 상우가 은수 집에 갔는데, 백종학 차가 있고, 백종학, 백종학 하니까 좀 이상하다 . (웃음) 극중 이름이 초대손님. 아, 음악평론가 이지운씨다. 김지운 감독한테 좀 미안한데…. 차가 있고 하면 아파트 안에 있을 수도 있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도 했는데 상우라는 인물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내가 피해간 부분도 있는 것 같은데, 이게 정확히 묘사가 안 되다 보니까…. 물론 관객은 은수가 “달려요“ 하는 것을 보니까 바람 피우는 것을 알지만, 상우의 시선에서야 그 정도 차를 타고 가는 것을 가지고 법석을 떨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윤: 근데 만약 내가 상우였다면 굉장히 끔찍했을 것 같아요. 콘도로 같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 성격이라면 차를 긁는 게 아니라,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알아보려고 하죠. 하긴 성격에 따라 영화를 찍는 것이니, 차라리 안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었을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 생각하면 상우에게 너무 잔인하죠.
허: 근데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그래서 백종학씨 한번 더 내려와야 할 것 같다, 그랬죠. (일동 웃음) 콘도의 상황도 원래 백종학씨가 나오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얘가 왜 차를 긁지? 그러려면 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윤: 그것도 화면을 보면 줌 비슷하게 쳐가지고 팬으로 가볍게 했데요. 그런데 이 영화 전체 어디를 봐도 그런 숏은 없었어요. 그렇게 가볍고 무성의한 숏은 없었다고. (웃음) 그러니까 감독이 그런 상황에 대해 굉장히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에. (일동 웃음)
허: 아무 생각도 없이 콘도에 가서 찍으려는데 이거 골치 아프다, 아 잘 생각이 안 나는데, 내가 농담으로 프로듀서에게 비나 왔으면 좋겠네요, 그랬더니 비가 오는 거예요. 좋다고 철수하지, 그랬다가 잠시 기다리는데 비가 그치더라고. (웃음)
윤: 감독이 애정을 갖는 숏이라면 전쟁이 일어나도 예쁘게 찍어요. 대나무 숲에서 둘이 앉아 있는데 대나무가 일렁거리는 장면 있잖아요. 그런 장면은 아마 비가 3일 와도 찍을 거야. (일동 웃음) 그런데 마티즈 긁는 장면 같은 것은 미장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감독의 애정이 어디에 가 있는지 너무 명확한 것 같아.
허: 아, 그랬었구나. 하하.
사랑의 감정은 사라져버리는 걸까?
윤: 그런데 왜 은수는 헤어지고 싶어하는 거예요?
허: 실제로 이영애씨에게 김치 담글 줄 아냐고 물었어요. 은수라는 인물이 그 집에 들어가 며느리로 산다고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그랬더니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힘들 것 같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윤: 그러면 여기서 여주인공은 즐기며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는 거구나.
허: 본인 자신이 안정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사는 그런 삶도 행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게 잘 나오진 않았지만 은수라는 인물은 그럴 수도 있다. 편집본에서는 결혼이라는 게 중요한 문제로 들어갔는데, 내 생각에는 결혼 전에도 연애를 시작할 때처럼 멀리서 뛰어오고, 이런 감정들은 없어지지 않았나, 서로간에. 상우라는 인물 자체는 가족이라는 것으로 만들어가면서 사랑을 새롭게 지속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은수는 그게 힘든 여자였기 때문에 싫증이 먼저 났고. 아니 싫증이라기보다는, 연애하다보면 그런 게 있잖아요, 뭔가 재밌게 해야 하는데 왜 재미가 없지, 이런 단계까지 오지 않았을까.
윤: 그럼 사라져버리는 걸까, 그런 감정이.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둘이 너무너무 좋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 라면만 끓여달라고 하고, 떡도 넣어달라고 하고, 김치도 넣어달라고 하고, 그래서 끓여주면 짜증내고. 그러면 혼자 밥 먹게 되고 뭐 이런 균열이 오기 시작하는데. 그럼 여자가 그렇게 나오는 이유가 벌써 싫증을 냈기 때문이에요? 힘들어서 그런 건가.
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둘은 어쨌든 사랑했다고 하고 싶은데, 그래서 그것이 변해가는 것이 내 관심이었는데, 잘 모르겠더라고요. 실제로 사랑한 건가. 나는 은수가 상우를 계속 좋아했던 것 같긴 해요. 사람으로서도 좋아하고.
윤: 마지막에 은수가 할머니에게 드리라며 상우에게 화분을 주고 가는데, 다시 와서 우리 같이 있을까, 그러잖아요. 그런 거는 뭐… 다시 즐기자는? (일동 웃음)
허: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랑 안 했다고 볼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사랑했다고 볼 수도 있고, 되게 어려운 얘기 같아요. 여기서도 너 나 사랑하니, 하면 대답 안 하잖아요.
윤: 그런데 통상적으로 만약에 그 여자가 남자를 사랑했다면, 남자가 너 나 사랑하니, 했을 때 대답하잖아요.
허: 사랑하지 않는다는 얘기죠.
허: 은수가 다시 찾아올 때는 문득 봤을 때, 아 이 남자가 참 좋은 남자였구나,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생각이 있다. 그리고 자기 생각으로는 이 남자는 부르면 올 것 같다는 생각을 아직도 했을 것 같아요. 화났니, 하면 고개 끄덕거리면서 보고 싶었어, 그렇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웃음)
윤: 그런데 할머니 대사는 뭐예요. 떠난 버스와 여자는….
허: 잡는 게 아니다.
윤: 그건 잡는 게 불가능하단 얘긴가요, 아니면….
허: 잡아도 잡히지 않는다는 거죠. 묘하게 오늘 색보정하면서 다시 보며 연관성을 발견했는데, 아라리 할아버지가 노래 부르시잖아요. 백발이 오지 말라고 했는데, 가로질러 오더라는. 그런 노인들이 갖고 있는 지혜로운 이야기들이 있어요. 떠난 버스와 여자라는 것도. 왜 그게 생각났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게 좀 위험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어떤 감정을 가져가는데. 인위적이기도 하고. 할머니가 느닷없이 정신이 돌아온 듯한 얘기를 하는 것도 그렇고….▶ 허진호와 <봄날은 간다> (1)
▶ 허진호와 <봄날은 간다> (2)
▶ 허진호의 낱말풀이
▶ <소름>의 감독 윤종찬, 허진호를 만나다 (1)
▶ <소름>의 감독 윤종찬, 허진호를 만나다 (2)
▶ <소름>의 감독 윤종찬, 허진호를 만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