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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와서 수면제 먹어봤나요, 사랑 때문에” (1)
2001-09-29

<소름>의 감독 윤종찬, 허진호를 만나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과 <소름>의 윤종찬 감독. 멜로와 공포, 장르적으로 양 극단에 서 있는 두 감독은 얼핏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보이지만, 둘에게선 어떤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분명 장르에 속하는 영화를 만들긴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경계선을 넘어가버린다는 점 말이다. 멜로 아닌 멜로영화를 만드는 허 감독이나 공포 아닌 공포영화를 만드는 윤 감독이나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되새김질하고 추억한다는 면에서 ‘반성적’ 영화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말쑥한 청담동 카페에서 시작해 쩍 벌린 입에 보쌈을 쑤셔넣는 맛이 일품인 주점으로 이어진 두 감독의 대화는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구도의 여행담을 공유하는 자리로 보였다. 이날 대담은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 한편으로 시작, 남녀의 사랑에 대한 속깊은 이야기를 거쳐 결국 감독의 자아와 작품의 관계, 감독이라는 일의 즐거움과 괴로움에 관한 이야기로 마무리됐다.

윤종찬(이하 윤): 만나서 반갑습니다. 3년 전인가 홍콩영화제 때 만나뵙고 처음이죠?

허진호(이하 허): 그렇네요. 영화 만드시는 데 폐를 끼치진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소름>의 프로듀서였던 백종학씨를 잠시 빼가서 배우를 시켰는데….

윤: 제작 도중 프로듀서가 바뀌었는데 새로 온 분이 종학씨였죠. 연기를 봤는데 느끼한 남자 역할을 잘해서 진짜 바람둥이로 소문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허 감독님과는 백종학씨를 사이에 둔 인연도 있는 셈이네요.

허: <소름>을 못 봐서 죄송합니다. 제가 영화 만들고 있을 때 개봉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고 와서 굉장히 좋다고 말씀 많이 하시더라고요.

윤: 별 말씀도…. <봄날은 간다>는 어제 봤습니다. 는 미국 유학 시절 봤어요. 학교 근처의 한국 음식 파는 식료품점에서 빌려봤는데 다섯번 이상은 본 것 같아요. 단순하고 깨끗하다는, 솔직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두편의 영화를 놓고 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족이더라고요. 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둘이서 살고 <봄날…>을 보니까 아예 3대가 나오더군요. (웃음) 영화를 따뜻하게 봤다면 그런 요인이 가장 큰 것 같아요. 도 그렇고 <봄날…>도 그렇고, 그런 점이 더 강하게 오는 것 같아요. 우선 물어보고 싶은 게, 이 감독이 어떤 집안에서 자랐는지가 가장 궁금하더라고요. 성장배경이라든가….

허: 성장배경이라…. 뭐 별로 부딪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결국 가족들의 사이가 나빠지는 이유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는 이렇게 해야 해’라는 것이 큰 것 같은데, 저희 아버지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하셨지만 강하지는 않았거든요. 예를 들어 철학과 간다고 했을 때나 취직이나, 회사 그만두고 영화 한다고 했을 때나 크게 반대하시지는 않으셨어요.

윤: 대가족이었나요.

허: 어렸을 때는 대가족이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계시고.

윤: 한집에서 같이 사셨나요.

허: 한집이라고 할 수 있는 게,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래 사시고 아버지, 어머니는 위에 사셨어요.

윤: 그런데 도 그렇고 <봄날…>도 그렇고, 나쁜 사람이 왜 영화에 안 나와요? (웃음) 친구들도 다 착하고, 가족관계도 원만하고, 그러니까 봄날의 정경을 보는 듯한 그런 게 있는데, 궁금했어요. 그런 사람을 의식적으로 빼는 건지, 쓰다 보면 그런 사람 없이도 얘기가 되는 건지. 나는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쓸 때 선한 사람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을 항상 본능적으로 생각하는데.

허: 왜 그런가 생각해봤어요. 일단 사람을 만나면서 저 사람 못됐다, 나쁜 놈이다, 이런 기억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딱 한 사람이 있는데, 군대 있을 때 슬리퍼 신고 밖에 나갔다고 맞은 적 있었는데, 그 사람은 참 안 좋았죠.

윤: 나 같은 경우에는 비교적 다혈질이에요. 싫은 사람은 완전히 싫고. 그러니까 결국 감독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악역이 없는 것도 그런 데서 기인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허: 운이 좋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실제로 학교 다닐 때나, 군대 있을 때나, 회사 다닐 때나 굉장히 나쁜 감정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내가 낯을 가려서 친한 사람과만 어울리고 친하지 않은 사람은 어색해하는 면이 있어서 그런지….

윤: 때도 그랬지만 <봄날…>을 보니 더욱 허우샤오시엔 생각이 났어요. 거기 할머니 보면서. <동년왕사> 보면 할머니가 저승 갈 노잣돈 만들고 만들고 하다가 돌아가시잖아요. 개인적으로 허우샤오시엔 감독 좋아하지 않으세요?

허: 좋아하죠.

연애, 너무나 사적인, 너무나 보편적인

윤: 자, 이제 좀 영화 안쪽으로 들어가볼까요. 결국 사랑이겠죠. 이번에는 둘이 좀 싸우더군요. 하긴 싸우는 것도 뭐 여자가 만날 라면 끓여달라니까 “넌 내가 라면으로 보이냐” 이렇게, 그게 이별의 시발점으로 보이고. 그런데 에서는 아예 갈등이란 것이 없었어요. 되게 궁금해요. 본인의 경험에서 오는 것인지, 혹시 그런 게 허 감독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인지.

허: 같은 경우는 뭐, 연애 얘기라고 하기에는 좀 다른 것 같았어요. 가족이나 친구나 이런 것들, 죽음이라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둘의 연애를 도와주는 쪽으로만 가는 게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가잖아요. 연애를 시작하기 전 단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좋잖아요, 그때. 좋아하게 돼서 가슴 설레고.

윤: 에서 딱 거기까지만이었잖아요.

허: 거기까지만이죠.

윤: 근데 <봄날…>에서 육체적인 접촉이 있으니까 결국엔 비극으로 끝나버리더라고. 뭐 사랑이 깨졌다는 게 비극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부정적이잖아요.

허: 글쎄 뭐, 아직 연애를 해서 완결을 지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일동 웃음) 대학교 1학년 때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서 한 1년 쫓아다니다가 만났어요. 한 3개월 정도 만나고 나서 내가 헤어지자고 그랬어요. 막 좋아하기 전의 감정이 너무나 컸던 것 같아요. 그 감정이 너무 커서 그런지 막상 만나고 보니까 너무 이상한 거야, 재미가 없어.(웃음)

윤: 그러니까 콩깍지 딱 씌워서 다니다가 막상 대면하게 되니까 요목조목 뜯어보는 심리라는 게…. 사랑이 시작되기 전의 두근거림과 막상 현실로 닥쳐 만나게 됐을 때 생기는 괴리 같은 것을 이 영화가 담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데 그것마저도 강도가 그렇게 센 것 같지 않아요. (웃음)허: 아니, 원래 강도를 세게 하고 싶었는데. 끝나고 무슨 얘기를 할까, 이런 것 갖고 조금 헤맸어요. 결국 연애 얘기를 하자, 이렇게 결정을 하고 나니까 조금 진도가 빨라졌어요. 그때부터는 뭐, 한달 정도 걸려서 시나리오가 나왔으니까. 연애 얘기는 되게 사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지만, 막상 얘기하다보면 너도 비오는 데 밖에서 기다렸니, 혹은 너도 잠이 안 와서 수면제 먹고 그랬니, 뭐 이런 식의 경험들이 대개 있더라고요. 아 되게 사적인데 보편적이구나, 연애라는 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재밌을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만나서 좋아해서 같이 자든지 어쩌든지 그러곤 어느 정도 권태기가 있을 것 같더라고요. 이제 생활로 들어온 것 같을 것이고. 싫증나고 부딪치면 서로 싸우고, 그러다가 헤어지고, 집착하고, 어느 순간에는 잊어버릴 때도 있더라고요. 그런 과정을 얘기하려다 보니까 얘기가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이걸 어떡하지, 그러다가 아예 빨리 자고, 빨리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일동 웃음)

윤: 아, 그래서 처음에 만나서 은수가 자고 가라고 그러는군, 바로 그냥. 밀착되는 과정은 빠른데 특이한 것은 균열이 오는 시점은 굉장히 길었던 것 같아요. 라면 얘기부터 시작되서 못 만나고, 안 만나고, 오해 생기고, 헤어지게 될 때까지.

허: 그쪽 얘기를 해보고 싶었던 같아요. 좋을 때나 둘의 일상보다는 헤어지는 것에서 나오는 고통이나 엄청 힘든 상황, 이런 것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연애담 모니터링을 해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약간의 정신병적 상황까지 가더라고요. 왜 나는 잊으려고 하는데 못 잊지, 왜 나는 잠을 자고 싶은데 잠을 못 자냐. 보다는 그런 감정들이 많이 나오는 느낌으로 가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한데 막상 찍다보니까 내가 내 나이에서 알고 있는 연애 이야기와 스물여섯살 먹은 배우 지태가 가지고 있는 연애 이야기가 다르더라고. 이쪽은 아직도 연애감정이나 이런 것에 대한 믿음 같은 게 있더라고. 원래 그런 친구이기도 하고.

윤: 그러니까 영원한 사랑은 있다, 뭐 이런 식으로?

허: 지태 같은 경우엔 그런 것을 믿는 거죠. 한번 좋아하면 영원히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바람 피우는 것 싫어하고. 극중 인물이랑 생각하는 것이 비슷했어요.

윤: 근데 나는 영화에서 유지태가 웃고 하는 게 감독 얼굴과 굉장히 오버랩되던데. (일동 웃음)

허: 글쎄, 그게 의도한 부분은 아닌데…. 같은 경우는 내 생활을 영화 속에 많이 집어넣다 보니까, 어머니가 보시더니 발톱 깎는 게 너랑 비슷하더라, 이런 말씀 하시더라고요. 이번엔 지태가 들으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닮았다는 말 많이 들었어요. 나야 좋은 얘기지만. (웃음) 그것도 어머니가 말씀하셨는데, 너랑 생긴 게 비슷하더라, 근데 우리 아들이 좀더 낫지 않냐 이렇게. (일동 폭소) 채은석이라고 CF감독이 있는데, 대학교 때 서로 친하니까 집에 와서 역기도 들고 했거든요. 근데 영화에서 유지태가 역기 든 모습에서 자기가 잠시 착각했다는 거야, 이거 허진호잖아, 라며. (일동 웃음)

윤: 허 감독 어머니는 보시고 영화에서 아들과 비슷한 면을 찾으셨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소름>을 보시더니 도대체 이게 무슨 얘기냐, 하시더라고. (일동 폭소) 상당히 부러운 얘기예요. 지금까지 어머니는 제가 뭘하고 있는지 몰라요. 아들이 감독이 되긴 된 것 같은데, 어머니 생각으로는 영화라는 것은 훨씬 허 감독 영화에 가까워요. 신성일이 있고, 엄앵란이 있고. 그런 것밖에 없어요.

▶ 허진호와 <봄날은 간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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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름>의 감독 윤종찬, 허진호를 만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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