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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따리 풀어라, 대목에 한몫 보자
2001-09-28

한가위 흥행 40년사

시대에 울고 돈에 웃었다, 극장가 1962 ~ 1997

추석은 극장에 손님이 꼬이는 날이다. 그것도 할리우드영화보다는 한국영화가 더욱 그렇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모든 공력을 쏟아붓는 시점이 여름방학 성수기라면, 추석은 짧긴 하지만 한국영화 흥행을 위한 텃밭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영화 배급사는 이 시기가 되면, 촉각을 곤두세운다. 하지만 지난 40년의 흥행사가 말해주듯, 항상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한국영화의 암흑기 시절이던 70년대에는 심지어 재상영작 외화들의 포진에 밀려 극장을 잡지 못한 한국영화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제는 한국영화가 한가위 잔치뿐 아니라 한여름 치열한 전투에 뛰어들 만큼 체력이 좋아진 게 사실이지만, 그러기 위해선 40년이란 세월을 부대껴야 했다.

1960년대 - 70원 주고 본 2500만원짜리 블록버스터

1962년 관람료 70원 시절이라고 ‘블록버스터’가 없을까. “총제작비 2500만원, 엑스트라 10만명 동원, 말 300필 공수.” <화랑도>는 당시 대작이었다. 이뿐 아니라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칠공주> <인목대비> <대심청전> 등 추석 시즌 개봉한 한국영화 대부분이 제작비 1천만원 이상의 초대형 사극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블록버스터의 흥행 결과가 제작사의 행로를 결정하는 건 마찬가지. 당시 한 신문은 추석 극장가를 두고 “사운을 건 한판 싸움”이라고 썼다. 이에 비해 외화의 외양새는 초라했다. 비비안 리의 <로마의 애수>(애수??)와 뮤지컬영화 , 그리고 서부극 <간 화이터>가 고작이었다. 대한극장 역시 <벤허>를 재상영하는 것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1961년,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서울로 가는 길> <전쟁과 사랑> 등 전쟁영화 등도 곧잘 극장에 내걸렸다.

1965년 추석에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영화들이 있었다. 이른바 ‘문예영화’들. 흥행을 보증하지 못하는 까닭에 추석 극장가에서 냉대를 받기 일쑤였다. 그런데 65년을 기점으로, 문예영화 제작 붐이 인다. 장사가 안 되는데도 끊임없이 영화사가 제작에 들어갔던 이유는? 다름 아닌 정부의 영화법 개정 때문이었다. 정부는 일정 규모 이상의 영화사만을 인정하는 설립 허가제를 도입한 이후, 이들 영화사 중 우수영화로 분류되는 문예영화 제작 실적에 따라 외화수입 편수를 배분했다. 기실 제작사들이 탐냈던 건, 문학과 영상의 행복한 만남이 아니라 돈이 되는 외화수입이었던 것이다. 이러하니, 65년 한국영화 상영편수는 전해보다 30편이 늘어난 168편이나 됐고, 68년에는 200편이 넘었다. 이로 인해 정부는 한해 앞선 67년, 두 차례의 통폐합을 거쳤던 12개 영화사에 연간 150편의 제작, 50편 수입이라는 마지노선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물론 모든 문예영화가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외면을 받았던 건 아니었다.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 이만희 감독의 <싸리골의 비가> 등은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969년 어딜 가나 문희, 남정임, 윤정희, 이렇게 셋이었다. 일례로 1969년 9월 한달 동안 한 일간지 광고면에 실린 한국영화(재개봉관 상영작 포함) 15편 중 12편이 트로이카의 몫이었다. 이처럼, 1969년은 이들 트로이카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이듬해 문희, 남정임은 결혼으로 영화일을 접었으니, 셋의 얼굴을 한 극장통에서 실컷 볼 수 있던 마지막 때이기도 했다. <여자로 태어나서>(윤정희, 신성일), <피도 눈물도 없다>(문희, 김진규), <마지막 왼손잡이>(남정임, 김희라) 등 추석 한국영화는 여전히 멜로 위주였지만,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제작자들 입장에서도 68년 정소영 연출, 문희 주연의 <미워도 다시한번>이 36만2천명이라는 관객동원에 고무받아, 이들을 캐스팅하는 데 골몰했다. 당시 외화는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 숀 코너리의 , 스티브 매퀸이 찰스 브론슨과 호흡을 맞춘 <에스케이프> 등 크게 보면 액션 굵은 남성영화가 주를 이뤘으나, 스타일은 모두 달랐다. 또한 히치콕의 <찢겨진 커텐>, 찰턴 헤스턴의 <혹성탈출>, 제인 폰다의 <바바레라> 등도 이즈음 제공된 다양한 식단이었다.

1970년대 - 새마을 시대, <성웅 이순신>을 향해 경례

1971년 추석을 앞둔 10월1일. 정부는 ‘퇴폐풍조 단속’ 조치를 발표했다. 사회 윤리와 질서를 저해하는 모든 행위가 대상. 끈질긴 장발족, 붐비는 고고장, 숨어든 도박장 등이 주요 타깃이었다. 연휴가 시작된 뒤에도 어수선한 분위기는 이어졌다. 부산에 무장간첩이 침투, 인질극 소동을 벌였고, 급작스런 쌀값 인상으로 서민들의 물가고는 가중됐다. 이랬으니, 어느 누가 한국영화를 보러 가자고 나섰을까. 개봉작 중 신파 멜로 <미워도 다시한번-대완결편>과 <성웅 이순신>만이 겨우 관객 10만명을 넘겼다. 그나마도 3명의 감독이 교체되며 가까스로 개봉한 <성웅 이순신>은 제작비조차 건지지 못했다. 초대형 시대극이었던 것만큼, 국도극장 14만7천명의 관객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 관객의 외국영화 선호도는 높아졌다. 60년대 주류였던 사극은 회생의 기운을 얻지 못했고, 기존의 신파 멜로영화에 대한 관객의 호응 역시 내림세를 띤다. 정초에 남정임이, 10월에 문희가 결혼한 뒤, 윤정희 홀로 남았지만, 3만여명의 관객을 제외하곤 그녀의 <고백>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1973년 이소룡의 시대를 예고한 추석이었다. <정무문>은 31만5579명을 끌어들여, 그해 최고 흥행작이 됐다. 반면, 유일한 한국영화였던 신성일, 김지미 주연의 <이별>은 관객동원 14만5천명에 그쳤다. 한편, <대부>는 추석 개봉을 코앞에 두고, 시비에 휘말렸다. 발단은 한 언론인이 “해당 영화는 경찰 등 공권력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각 정부 부처에 돌리면서부터. 문화공보부는 <대부>에 고등학생 관람가를 줬다가 결정을 철회한다. 그러자 하길종 감독은 이에 맞서 “<대부>는 투철한 영화정신의 뉴시네마”라며, “<대부>를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반론을 폈다. 이 무렵, 한국영화는 악재의 연속이었다. 석유파동 등으로 인한 불황으로 제작편수가 줄었고, TV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수상기 100만대 돌파) 관람객이 2년 전에 비해 30만명이, 극장 또한 50개관이나 감소했다. 등록제이던 영화업을 허가제로 바꾸고, 시설 및 촬영기재 이외에 제작자금 5천만원을 보유하고 있는 영화사에만 제작허가를 내주게끔 한 정부의 조치 또한 많은 영화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77년

긴 가뭄 끝에 단비였다. 조해일의 신문연재 소설을 영화화한 추석 개봉작 <겨울여자>가 58만5775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것. 이 영화 한편으로 장미희는 이후 정윤희, 유지인 등과 함께 새로운 진용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연이어 개봉한 김응천 감독의 <고교 우량아>, 석래명의 <얄개행진곡>은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인기를 끌었던 하이틴 코미디물의 제작 봇물을 예고했다. 제작편수는 줄었지만, 관객동원 10만명을 돌파한 한국영화가 무려 14편이나 됐다는 점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 배경은 74년 <별들의 고향>(46만4308명)과 75년 <영자의 전성시대>(36만1213명) 등이 끌어들인 젊은 한국영화 관객이었다. 그러나 한층 강화된 검열 아래 ‘작가’는 여전히 괴로운 신음을 토해내야 했다. 하길종 감독의 <한네의 승천>은 몇번씩이나 가위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연이어 터진 한국영화의 환호에 묻혀 들리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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