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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가족(野蠻家族)
2001-09-28

비디오 클리닉 1

처방전1 가족이 꼴보기 싫다면

“가족주의는 야만이다”라는 말이 있다. “현실에 대한 감각은 재능을 요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 재능이 없다”(<가을 소나타>의 샤를로트)는 말처럼, 충분히 지혜로워지기 전에 만나서 인연을 맺고 자식을 낳아 서로의 운명을 책임져 보겠다고 복닥거리다 보면, 전생의 웬수가 가족이 아닐까 싶은 순간도 없지 않을 터. 그런데도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야릇한 기대를 갖고 사돈네 팔촌까지 온 가족을 다 불러 모으거나 부지런히 찾아다닌다. 만나면 또 실제로 기뻐한다. 그러나 반나절만 지나보라. 듣기 좋은 인사치레들이 시들해지고 나면 아들딸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어디론가 나갈 준비를 하고, 아내들은 부엌에서 남자들 흉보기를 시작하며, 노인들은 궁시렁 거린다. 어쩌면 명절은 이미 분리된 가족을 가족으로 재확인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인지도 모른다.

현실세계 속에서 가족과의 분리가 처음 일어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친구와 첫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졸업>(The Pallbearer, 맷 리브스, 1996)은 바로 그 출발점으로부터 결혼 직전까지의 과도기를 묘사한다. 대학 졸업 뒤 1년 동안 뚜렷한 일자리를 갖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던 탐은 친구의 디너 파티에서 첫사랑 줄리와 재회한다. 줄리로부터 인생의 기회를 얻기 위해 곧 떠나겠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이기지 못한 탐은 죽은 고교 동창 빌의 어머니 루스와 성관계에 빠져든다.

사랑은 가족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낸다

아들 빌의 추억을 듣고 싶어하는 루스에게 탐은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빌에게는 줄리라는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했고, 잊으려고 했었지만 사로잡혀 있었죠. 그녀처럼 빌에게 환상을 준 여자는 없었거든요.” 탐이 다시 줄리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힘은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그리고 바로 이 환상이다. 환상은 상대방을 다가설 수 없는 천상에 올려놓고 숭배하는 에로티시즘의 충동이지만, 가족을 떠나지 못한 채 언저리에서 맴도는 청춘을 가족 울타리 밖으로 잡아채서 사회로 내보내는 동력이기도 하다. 대지를 박차오르려는 로켓의 거대한 분사 엔진처럼.

가족을 떠난 청춘의 다음 항로는 연애와 결혼이다. 생애의 가장 눈부신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연애는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결혼은 ‘글쎄요’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는 <맥멀랜가의 형제들>(The Brothers McMullen, 에드워드 번즈, 1995). 아버지의 장례를 막 치른 묘지에서 어머니는 황당하게도 35년 전의 애인을 찾아 아일랜드로 돌아간다. 동거하던 애인이 결혼을 제안하자 “누구랑 하느냐, 초대해주면 고맙겠다”고 뺀질거리던 패트릭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혼전관계를 가졌던 애인을 배신하고 떠나도 되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착실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던 잭도 폭풍우를 못 피하기는 마찬가지. 구닥다리 취급하는 동생들의 놀림에도 끄떡없던 잭은 “평생 다른 여자랑 못 자볼 남자”라고 쪼아대는 여자의 공세에 그만 넘어가고 만다. 연애와 결혼에 대한 젊은이들의 생각을 끝없는 입담으로 떠들어대는 삼형제의 이야기가 그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결혼에 대한 태도를 도식적일 만큼 잘 보여주는 것은 서부극이다. <수색자>(The Searchers, 존 포드, 1956)에서 존 웨인은 역시나 저 먼 황야에서 말을 타고 나타나 집으로 들어간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 ‘이든 삼촌’은 조카들을 구별 못하고 헷갈릴 만큼 가족이라는 것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아예 행복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터프한 야생의 사나이다. 그러나 인디언들이 마을을 유린하고 동생의 가족을 몰살하자, 가족은 그에게 복수를 해주어야 할 뜨거운 애정의 대상으로 바뀐다. 이같은 가족주의가 국가적 정체성으로 쉽게 전환된다는 것은 최근 테러사건 이후 미국사회의 동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영화, 특히 서부극은 가족과 문명사회로의 진입을 기피하는 야생의 영웅과, 그의 모험심을 꺾고 사회에 정착시키는 여성의 관계를 반복해서 묘사한다. 결혼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포와 가족주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엄마 노릇만 하긴 싫어

가족 내부의 갈등은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에 다름 아니다. <가을 소나타>(잉마르 베리만, 1978)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은 평생 무책임하게 남편과 자식에게 상처를 줬던 어머니 샤를로트로 나온다. 7년 만에 딸 에바의 집을 찾은 샤를로트는 뇌성마비인 작은딸 헬레나를 에바가 데려다 돌보는 것을 보고 눈물짓다가도 이내 “늘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했기 때문에 열받는다”고 말할 만큼 자기중심적이다.

베리만 감독은 딸 에바의 입을 통해 이 철없고 이기적이며 현실도피적인 어머니를 향해 한치도 틀림없는 말의 복수전을 펼친다. 피아니스트로서는 유능했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연민을 모르던 어머니는 딸이 자신을 그토록 오래 미워해왔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잔인할 만큼 차곡차곡 털어놓는 에바의 애증 못지않게 “엄마 노릇만 하긴 싫었다. 나도 너만큼 무기력하다는 걸 알아주길 바랐다. 나이가 중요하냐”는 샤를로트의 변명도 마음을 울린다.

부모 때문에 인생이 꼬였다고 화가 나 있을 때 <아버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Father, CIC, 1993)본다면 결과는 두 가지다. 화가 더 나거나(모든 부모가 빌리 아버지처럼 지혜롭고 희생적이지는 않으므로),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연민을 갖거나(부모가 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꿈과 욕망의 희생이었을 것이므로). 광산 노동자의 아들인 꼬마 빌리는 발레수업에 매료된다. 분홍색 발레 슈즈를 신은 아들을 본 아버지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 되지만, 아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 결국 자신의 명예와 가치관까지 희생하는 헌신적인 후원자가 된다.

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죽을 쑤건 말건 아무런 관심과 책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회가 선동하는 가족주의의 신화는 뒤집어 해석해야하겠지만, 가족 자체는 자연의 섭리이자 신의 사랑을 체험하는 최초의 원천적인 장소임을 부인할 도리는 없을 것 같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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