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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길을 돌아 내게로 오다
2001-09-21

남미의 정체성 월터 살레스의 <태양 저편에>와 알폰소 쿠아론의 <너의 엄마도 마찬가지>

그들은 왜 집으로 돌아왔을까. 월터 살레스는 <중앙역>으로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비롯, 장기간의 해외 순례를 거쳐 50개의 트로피를 싹쓸이한 장본인이었다. 영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에게 할리우드의 구애가 없었을 리 없지만, 그는 브라질에 남기로 했다. 할리우드로 건너와 <소공녀> <위대한 유산>을 찍은 멕시코 감독 알폰소 쿠아론의 결론도 같았다. 그는 할리우드에서의 작업은 늘 순조롭고 행복했지만,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게 됐다고 고백했다. 우연일지 몰라도 이들이 베니스에 들고 온 작품들은 ‘내게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부제를 달아주고 싶을 만큼, 정체성과 성장에 관한 의문으로 가득하다. 아버지를 부정하고, 대물림된 운명에 저항하는 월터 살레스의 페르소나, 그리고 성에 탐닉하며 어른이 되길 갈망하는 알폰소 쿠아론의 어린 분신들은 라틴아메리카의 오늘을 투사하고 있는 반가운 얼굴들이다.

<태양 저편에>, 재평가를 기다린다

월터 살레스는 <태양 저편에>는 브라질 황무지에 안착한 한편의 신화다. 복수극의 시원조차 아득하지만, 무조건 죽이거나 죽어야 하는 가업을 안고 태어난 형제가 있다. 원수의 총에 죽은 큰형의 셔츠에 남은 혈흔이 노랗게 변하자, 아버지는 차남 토뇨에게 복수하라고 닦달한다. 토뇨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만, 막내 파쿠와 서커스단 소녀 클라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들”의 순환에서 이탈하고 싶어한다. 파쿠가 토뇨를 대신해 원수의 총을 맞은 새벽, 넋을 잃은 토뇨는 아버지의 고함소리를 뒤로 한 채, 집 밖으로 나 있는 갈랫길 중 이제껏 가지 않았던 길로 걸어나간다.

<태양 저편에>는 브라질, 스위스, 프랑스 3국 합작품으로, 비토리오 데 시카의 파트너였던 인디 프로듀서 아서 콘이 총제작을 맡았다. 원작은 알바니아 소설이고, 각색 과정에는 아이스킬로스 등 고대 그리스 희곡작가의 입김과 19세기 후반 브라질 북부의 유혈전의 기록과 이탈리아영화 <파드레 파드로네>의 정서가 가미됐다. 영화가 길을 잃지 않은 건 감독 월터 살레스의 역량 덕이다. 그는 <중앙역>에서보다 훨씬 강렬하고 서정적이고 에스닉한 영상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특히 토뇨의 숲 속 추격신이나 마굿간에서의 러브신, 그리고 바닷가 엔딩장면은 관객 사이에 두고두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안타까운 건 이탈리아 평단의 반응이다. <태양 저편에>의 평점은 ‘베네치아 58’부문 진출작 중 최하위권(10점 만점에 4점대)에 머물렀다. 이탈리아 일간지 <리푸블리카>도 “필요 이상의 수사적인 표현과 세부적인 폭력 묘사, 자기과장적인 수사술과 자만의 태도 등은 창작성의 전면적인 후퇴를 보여준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베니스에서 버림받은 <태양 저편에>는 <인디와이어>가 베니스영화제 결산기사에서 "가장 아름답게 촬영된 영화"라고 상찬했듯이, 재평가의 여지가 충분한 작품이다.

<너의 엄마도 마찬가지>, 길 위에서 크는 아이들

<너의 엄마도 마찬가지>의 주인공은 멕시코의 17살 동갑내기 청소년들이다. 훌리오와 테노츠는 각자 애인이 있고, 섹스에 갓 눈을 뜨기 시작해 애인과 그걸 나누는 데에 온통 정신이 빠져 있다. 여름방학을 맞아 애인들이 모두 여행을 떠나버리자 둘은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테노크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20대 초반의 스페인 유부녀 루이사를 만난다. 둘은 즉흥적으로 루이사에게 멕시코에 환상적인 해변이 있다며 그곳을 찾아가자고 제안하지만, 막상 그런 해변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루이사는 그 제안을 웃어넘겼다가 어느날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잤다는 고백을 하자 테노크에게 그 해변에 데려다달라고 한다. 테노크와 훌리오는 지도책을 펴놓고 적당한 바닷가를 찍은 뒤 루이사를 태우고 여행길에 오른다.

<너의 엄마도 마찬가지>는 멕시코 출신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해 기네스 팰트로, 에단 호크 주연의 <위대한 유산> 등을 감독한 알폰소 쿠아론이 10년 만에 스페인어로 찍은 영화다. 올해 멕시코 개봉에서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둔 <너의…>는 몇 가지 다른 유형의 영화에서 자주 보아온 요소들을 적절히 배합한다. <아메리칸 파이> 같은 청소년들의 발랄하면서도 노골적인 성 탐험기가, 목적지가 불분명한 채 잘 모르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로드무비의 구성 속에 스며든다. 여행은 또다른 상처를 가지고 있는 루이사에게는 <노킹 온 헤븐스 도어>나 <델마와 루이스>처럼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되지만, 두 청소년에게는 바깥세상과 직접 대면하는 잠시 동안의 가출이 된다. 영화는 훌리오와 테노크에게 시점을 맞추면서 성장영화의 틀을 빌려 마무리한다.

다양한 요소들이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잘 어울려 보기 편안한 영화를 만들지만, 쿠아론은 이 청소년들의 성장길 한구석에 그늘을 드리워놓았다. 고위 정치인인 테노크의 아버지와 세계화 반대시위에 열성적으로 참가하는 훌리오 누나에 대해 잠시 스쳐가는 언급이 냉소적이고, 여행길에서 주인공 일행은 농민 시위대와 이를 저지하는 군인들의 행렬을 자주 마주친다. 마지막에 여행에서 돌아와 대학생이 된 뒤 만난 훌리오와 테노크도 밝게 그려지지 않는다. 젊은 한철의 격정을 그렇게 쏟아부은 뒤에 대다수 그 또래처럼 시스템에 종속돼가는 무기력한 모습이다. 그러나 조미료처럼 살짝만 첨가된 이런 연출이 에피소드 중심의 트렌디한 성장영화의 인상을 크게 바꿔놓지는 못한다.

박은영·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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