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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는 연극이고자 하지 않은 연극”
2001-09-21

평생공로상 수상한 에릭 로메르 인터뷰

“베니스는 그동안 내게 4개의 트로피를 줬다. 너무 잘 대해줬다. 이번 초청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 것은 그런 오랜 부채의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영화제 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언론과 대중 앞에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은둔 작가 에릭 로메르가 올 베니스영화제 평생공로상 시상식에 나타나기로 한 것은 이래저래 화제가 됐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초청장을 내민 칸영화제에도 퇴짜를 놓았으니, 베니스쪽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노심초사 마음을 졸인 것은 당연했다. 로메르는 확답을 하기 전에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고 한다. 시상식은 폐막 전야인 9월7일에 해야 하고, 신작 <영국여인과 귀족>의 상영도 같은 날 해야 한다는 것. 그의 요구대로 시상식은 9월7일 영화제 메인 상영관인 살라 그란데에서 거행됐다.

평생공로상은 말 그대로 영화에 평생 헌신해온 영화인에게 주는 상으로, 수혜자는 대개 노배우들인 경우가 많았다. 베니스영화제가 올해의 평생공로상 수상자로 로메르를 선정한 것은, 벌써 여든이 넘은 로메르의 영화 커리어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누벨바그의 흐름 속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담은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후 수십년 동안 “자신의 예술관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너른 공감과 지지를 확보했다”는 것이 공식적인 선정 이유. 때마침 <영국여인과 공작>이 완성돼 이 작품의 프리미어와 세미나까지 준비할 수 있었다.

<영국여인과 공작>은 76년작 과 78년작 <갈로아인 페르스발>에 이은, 로메르의 세 번째 사극으로, 프랑스혁명 당시 프랑스에 머물고 있던 스코틀랜드 아가씨 그레이스 엘리어트의 회고록 <프랑스혁명의 기록>을 영화화한 작품. 그레이스는 루이 16세와 사촌지간이었던 귀족 오를레앙과의 연애를 청산하고 좋은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었는데, 혁명이 닥치면서 자신의 사촌을 지지해야 할지 내쳐야 할지에 대한 오를레앙의 고민을 나누기 시작한다. 그레이스는 오를레앙과 루이 16세에게 충성하려 하지만, 그 자신 어쩔 수 없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영국여인과 공작>은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와 ‘사건’ 그 자체보다는 ‘사람’에 초점을 맞춰, 섬세한 심리묘사의 특장을 잘 발휘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을 바라보는 외부자의 시선이 투영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작품. “이건 프랑스혁명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나는 영화로 정치적 표현을 하지 않는다. 주인공 그레이스는 단지 불안정했던 시대상에 대처해나가는 능력을 가진 인물일 뿐이다. 그녀는 프랑스의 절대군주제보다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지지했지만, 프랑스의 왕이 그리 군주적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헌신한다. 나는 기존의 영화들이 프랑스혁명을 다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려 했다.”

베니스 현지 상영 직후, 가장 큰 화제가 된 것은 <영국여인과 공작>의 연극적 구성과 회화적 이미지였다. 제작 당시부터 ‘로메르가 40만프랑을 들여 디지털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이 궁금증을 부추긴 탓. <영국여인과 공작>의 영상은 18세기 회화 같은 느낌을 주는데, 실제로 프랑스혁명기의 거리와 실내 풍경은 캔버스에 그린 그림들이었다. “탁 트인 시야에서 도시 전체 풍광을 조망”하고자 했기 때문에 세트나 소품 제작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아티스트가 3년간의 연구 조사를 거쳐 모두 37점의 배경 그림을 그렸고, 세트에 병풍처럼 두른 뒤 촬영했다. 2차원적인 배경과 3차원적인 인물을 디지털카메라로 ‘합성’한 셈이다. 로메르는 이를 가리켜 “멜리에스가 시도했던, 영화의 역사만큼이나 낡은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시각적으로는 물론이고, 구성상으로도 ‘연극’의 틀을 빌려온 데 대해서는 “나의 영화는 연극이고자 하지 않은 연극이다. 바쟁은 영화와 연극의 차이를 인지하기는 힘들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건 역설이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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