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사에 얽힌 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며 식민지 시절의 유명한 협객이었고 뒤에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고 김두한씨의 단성사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아주 오래 전 조감독 시절, 우연한 기회에 나는 고 김두한씨의 실물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하필이면 내가 있던 건너편 건물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그의 정면 모습이었는데 나는 그가 바로 그 유명한 김두한씨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숨을 죽이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렇게 소변을 끝내기까지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과연 그는 거물다운 기품을 보이고 사라졌다. 그가 국회 본회의에서 부총리였던 장기영씨에게 똥물을 퍼부은 것은 아주 유명한 사건이다.
나는 전부터 그의 전기를 영화로 만들면 좋을 것이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그의 일화를 소개하곤 했는데 그중에 단성사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화장실과 관계가 있다. 그는 소년 시절, 단성사 옆 설렁탕 집에서 키워졌는데 당연히 단성사 출입이 잦았다. 물론 동네 꼬마들을 이끌고 비밀 출입구를 통해 몰래 들어가곤 했는데 그 비밀 출입구라는 게 바로 재래식 화장실 외부에 뚫려 있는 청소용 구멍이어서 그 냄새 나는 뚜껑을 열고 변소 바닥으로 내려가 다시 한 사람씩 화장실 내부의 변기를 타고 올라가면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여자 화장실이었고 그중 한칸이 당시 최고의 인기 변사에게 실연을 당한 어느 기생이 그곳에서 자살을 한 연유로 문에 못을 박아 폐쇄시켰던 것인데 꼬마들이 몰래 이 칸을 전용출입구로 사용했던 것이다.
화장실 밑바닥은 꼬마들의 몸무게를 지탱해줄 만큼 적당히 굳어 있었다. 하루는 이렇게 화장실 바닥에 들어온 소년 김두한을 비롯한 꼬마들이 바닥에 모여 이제 막 변기를 타고 올라서려는데 마침 영화가 끝났던 모양이다. 소변이 급했던 여자들이 화장실로 몰려들고 누군가가 급한 나머지 문제의 폐쇄된 그 문을 열고 이크! 볼일을 시작했던 모양이다. 밑에서 대기중인 꼬마들은 고스란히 뜨거운 오줌을 그대로 뒤집어써야만 했고 한번 길이 트인 문은 다음 사람, 다음 사람, 계속해서 출입이 이어졌다. 그때를 회고하면서 고 김두한씨는 이렇게 말했다.
“허허허! 여자들이 참았던 오줌이라 또 양은 얼마나 많은지 뒤집어쓰다 못해 약이 올라 그만 두눈을 부릅뜨고 올려다보질 않았겠소. 아!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여자에겐 소변 나오는 곳말고도 또 하나의 문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소.”나는 이렇게 김두한 선생을 통해 단성사를 인상깊게 알게 되었다. 내 영화가 처음 단성사에서 개봉한 것은 <바보선언>이었다. 처음 <바보선언>은 흥행사들이 외면하는 바람에 제작사 창고에서 1년 동안이나 썩고 있었다. <바람불어 좋은날> <어둠의 자식들>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낮은데로 임하소서> <바보선언> <과부춤> 등 계속해서 빈곤한 소외층의 어두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더니 안기부 영화담당의 입김이 작용해 어느새 제작자들이 나를 왕따로 돌리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줄줄이 이어졌던 연출 의뢰가 뚝 끊어졌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별 수 없이 16mm 새마을 문화영화를 촬영하고 있는데 강원도 평창으로 연락이 왔다. <바보선언>이 단성사에서 개봉한다는 소식이었다. 펑크프로로 일주일간 시한부 개봉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미국영화인가 뜻밖으로 인기가 없어 계약한 날짜도 메우지 못하고 간판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남은 일자를 대신 메우기 위해 시한부로 개봉하는 속칭 펑크프로였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바보선언>이 개봉하는 첫날 아침이었는데 다시 강원도 평창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단성사 펑크프로 <바보선언> 간판 아래 대학생들로 보이는 바보 같은 젊은이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표를 사기 위한 줄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사실을 확인하려고 문화영화 촬영을 잠시 접어두고 부지런히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정말 이게 웬일인가. 내가 도착했더니 이미 개봉 첫날 표는 매진이 되어 창구를 닫아놓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도는 순간이었다. 설움이 컸던 작품인 만큼 감회도 극적이었다. 그렇게 첫 인상이 좋아서였는지 단성사에서는 그 다음에 만든 내 영화를 두말없이 부쳐주었다.
물론 제목부터 아주 선정적인 <무릎과 무릎사이>였다. 그것도 빅 히트를 했다. 다시 <어우동>도 부쳤고 이번엔 더 큰 홈런을 쳤다. 단성사와 나는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맺었다. 당시 나이 지긋하셨던 단성사 이 사장님은 극장 뒤에 있는 작은 횟집에서 꼭 캔맥주를 혼자 즐기셨는데 나를 만나면 아주 반갑게 맥주를 사주시곤 했다. 아! 그 단성사가 이젠 가면 언제 오나. 죽은 친구처럼 다시는 못 보는 건가.
▶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1)
▶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2)
▶ 역대 단성사 주인들
▶ 단성사 터주대감 조상림 상무
▶ 단성사에 얽힌 나의 추억1 - 영화감독 김수용
▶ 단성사에 얽힌 나의 추억2 - 영화감독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