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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영화 걸면 행운이었지”
2001-09-21

단성사에 얽힌 나의 추억1 - 영화감독 김수용

종로3가는 오늘도 사람들 발길이 부산했다. 지하철 입구를 오르내리는 젊은이들에 섞여 밖으로 나오니 눈부신 가을햇살을 받고 단성사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94년 동안이나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극장문화의 본산이었던 단성사는 그렇게 초라하게 늙어 있었다. 벌써 간판이 모두 철거되어 굴레 벗은 말처럼 벌쭉한 모습으로 조만간 철거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얼마 전 극장이 헐리고 그 자리에 새 영화관 12개가 들어선다고 자랑하던 J 사장의 말을 들었을 때 반가우면서도 한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헐리기 전에 건물이라도 한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곳을 찾아간 것이다.

단성사는 우리 세대 감독들에게 영화를 발표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상영관이었다. 극장 수보다 영화제작편수가 넘치던 시절, 그곳에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큰 긍지였고 행운이었다. 물론 당시 단성사의 웅장한 음향과 스크린의 선명한 영상 덕에 관객은 즐거워했지만,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 무렵의 한국영화는 녹음, 현상, 편집의 낙후성이 한눈에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일었다. 대신 우리는 그곳이 있어 마카로니 웨스턴을 만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젊은 날과 마주칠 수 있었다. 액션영화는 그리 좋아하지 않던 나였지만, 그 영화들만큼은 폭력도 서정적일 수 있구나 하는 어떤 경지를 맛보게 해주었다. 60년대부터 나는 감독으로서 일년에 한편 정도의 영화를 이곳에서 개봉했고, 관객의 엄정한 심사를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동시에 단성사 객석에 앉아 관객과 더불어 자기 영화를 보고 있을 때는 무척 행복한 기분이었다. 영화란 게 재생예술 아니었던가. 완전무결하게 스크린 위에 감독이 의도한 음향과 영상이 되살아날 때면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빙점>이 상영될 때도 잊지 못한다. 당시 원작자인 미우라 아야코와 함께 단성사에서 영화를 본 뒤 그녀가 “한국감독이 내 작품을 더 잘 이해한 것 같다”는 예상치 못한 칭찬을 듣고서 흐뭇해했다. 비좁은 입구를 통과한 뒤 딱딱한 의자에 의지해야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던 날들이었다.

단성사가 문을 연 것은 1907년이라고 들었다. 단성사 사무실을 들락거리던 이들은 극장에서 나오면 늘 요정과 유곽을 쫓아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도 없어진 황금좌(국도극장)나 그 골목 안의 대정관(大正館) 그리고 요정 명월관, 앰배서더호텔 자리에 있던 신마치(新町) 유곽촌이 그때 그 장소들이다. 그때는 아직 우리 영화가 나오기 이전이었고, 극장은 외국영화와 공연물을 보여주었다. 일본 엔카(演歌)를 우리 가사로 부르는 노래와 연극이 주를 이뤘는데, 소녀가수 신카나리아가 그무렵 데뷔해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연극은 김도산 등이 전속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는 영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구미영화와 일본영화에 빼앗기고 있는 관객을 어떻게 하면 되찾을까 고심하고 있었다. 그의 염원은 1919년 10월27일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단성사에서 상영함으로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기술의 낙후성과 자금부족으로 영화제작이 중단되었고, 연극을 연쇄적으로 삽입해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나운규의 <아리랑>이 개봉된 것도 1926년, 단성사였다. 지금은 필름이 실종되고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 환상 속의 명작이 된 <아리랑>이지만 내면으로는 민족의식이 흐르고 겉으로는 재미있고 세련된 영상이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토키(발성영화)가 발명되기 전의 무성영화시대여서 변사가 영화를 해설하고 있었으며 김영환은 대표적인 단성사의 변사로서 인기가 대단했다. 그가 숨차게 말을 이어가다 변소에 가면 영사기는 잠시 멎고 돌아올 때를 기다리던 그런 시대였다.

해방 뒤 단성사는 외국영화 전용관처럼 되었고 늘 할리우드나 유럽의 최신 필름들이 상영되었기 때문에 이른바 국산영화 관객보다 수준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60년대 한국영화의 활기찬 제작기세는 단성사에까지 파급되어 우리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으며 이곳에서 상영되는 국산영화는 거의 흥행에 성공을 거두어 극장의 주가를 높이고 있었다. 소위 손님발이 좋은 극장으로 시내의 어떤 극장보다도 손꼽혔으며 영화를 보러 간다는 말은 단성사에 간다는 뜻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정점이란 곧 내리막길을 예고한다. 길 건너에 위치한 피카디리극장에서 좋은 프로그램을 엄선해 관객을 빼앗았으며, 버려지다시피 한 세기극장이 서울극장으로 개명하면서 재미있는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단성사는 그 사이 여러 차례 운영자가 교체되면서 활로를 찾으려고 했지만 낙후된 시설로는 승부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100년 가깝게 영화를 줄기차게 상영하면서 한국의 극장문화를 선도해온 단성사. 그 옛날 김도산이 최초의 한국영화를 걸고 초조하게 서성거렸고, 나운규가 극장이 터지도록 관객이 모여 기고만장해 거닐던 극장 앞 광장은, 지금 텅 비어 있다. 몇년 뒤 새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단성사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이 자리가 한국영화의 발상지였다’, ‘이곳이 나운규의 <아리랑>이 상영된 곳이다’라고 쓴 작은 안내판이라도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발길을 돌린다.

▶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1)

▶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2)

▶ 역대 단성사 주인들

▶ 단성사 터주대감 조상림 상무

▶ 단성사에 얽힌 나의 추억1 - 영화감독 김수용

▶ 단성사에 얽힌 나의 추억2 - 영화감독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