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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이들이 있었다
2001-09-21

역대 단성사 주인들

긴 역사처럼 단성사의 주인도 여러 번 바뀌었다. 기록이나 구술에 의한 것만 하더라도 열번이 넘는다. 첫 번째 단성사를 세운 이는 지명근, 박태일, 주수영 세 사람. 1907년 동대문시장 상인 출신이던 이들은 근처 영도사 대원암에 사람들을 모아넣고 ‘조선 연예계 발전 방안’이라는 연설회를 가진 뒤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 다음은 이익우. 1909년부터 경영을 맡았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지가 않다.

단성사는 같은 해 호남의 갑부 한흥석에게 넘어가고, 이듬해 일본인 후지와라 구다마로에게 넘어갈 정도로 운영이 어려웠다. 그러다 1917년 황금관(이후 국도극장)의 소유주인 다무라가 단성사를 인수한다. 당시 토지는 일본인들에게 불하한 것이라, 해방 이전까지 단성사의 땅 주인은 다무라였다. 단성사가 흥행 극장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18년 당시 광무대의 소유주이자 창에 빠져 있던 박승필이 단성사를 인수한 뒤, 영화상설관을 표방하면서부터다. 그는 본관을 신축하고, 주임변사 서상호 외 6명의 변사를 고용하고 관현악단장에 백만진을 기용한다.

또한 1926년 <아리랑> 이후 나운규와 함께 영화제작에 뛰어들어 <들쥐> <금붕어> <옥녀> 등을 만들고, 1928년에는 단성사 영화구락부를 창설하기도 했으며, 영화잡지 <단성가>를 발행하기도 했다. 1932년 박승필의 사망으로, 지배인이던 박정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1934년 박정현의 지휘로 발성영화 상영을 위해 철근 3층 건물에 750 좌석을 갖춘 것이 지금 단성사의 골격이 됐다. 단성사는 1939년 대륙극장으로 개명, 해방까지 일본인에 의해 운영된다. 이후 김인한이 극장 대표로 취임하지만, 1950년 간접세 체납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을 겪는다.

그의 아들이자 (전)벽산그룹 대표인 김인득이 1962년까지 대표 자리를 맡게 된다. 당시 김인득은 중앙극장, 피카디리, 단성사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 현재 대표인 이남규-이성호 체제가 등장한 건 1962년. 당시 남한기업공사를 운영하던 이남규 대표는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철퇴를 맞고, 단성사로 옮겨온다. 단성사는 1986년도부터 이태원 사장의 태흥영화, 1993년 이후로는 신도필름의 정융사 대표가 임대 운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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