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겨울여자, 단성사를 찾다.
1972.10.17 박정희, 국회 해산 및 정치활동 금지를 골자로 하는 유신조치 발표 1978.6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 여고생 농락 사건 발생
1979, 정부, 영화사 등록제를 허가제로 변경. 이로 인해 제작사 수 대폭 감소
“할리우드 제국의 신성일, 로버트 테일러 얼굴에/ 지지직 굵은 비가 내렸네 나는 어느새/ 70년대의 찌린내와 함께 종로 화신극장에 앉아 있었네/ 격투기 쑈도 보고 연극도 보았던 그 옛날 원형극장의 관객들처럼/ …/ 그래, 누구도 살아서 이 극장의 어둠을 벗어나진 못할 것이네”
(‘로마 콜로세움 속의 화신극장’, 유하 <천일馬화> 중에서)
1970년대 한국영화는 암흑기의 수렁을 피할 수 없었다. 유신조치와 함께 영화를 한편 만드는 것조차 쉽지 않아졌다. 영화사 설립여건이 강화돼 수많은 영화사들이 무너졌고, 제작사전신고부터 시작되는 겹겹의 검열에 한국영화는 숨이 막혔다. 제작 의무편수를 정해놓고 그걸 채워야 외화 수입권을 주는 조치로 한국영화의 명맥을 잇겠다했지만, 질식한 영화의 소생은 가망없는 일이었다. 한국영화는 외화를 수입하기 위한 ‘낚싯밥’에 불과했다. 안타까운 건 60년대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감독들의 작품까지 난도질을 당해야 했던 상황이다. <삼포가는 길>(1975)은 연출자인 이만희 감독이 개봉을 앞두고 세상을 뜨자, 제작자가 외화수입권을 위해 마지막 장면을 바꿔친다.
지금의 단성사 2관 자리인, 200석 규모의 공간에서 열린 기자시사회에서 김수용 감독과 이만희 감독의 미망인은 영화의 끝부분이 원래 고인의 의도와 달리 꽃피는 신작로 위를 주인공들이 걸어가는 ‘새마을 영화’로 변질되어 있음을 발견했지만, 눈물을 닦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하길종이 질식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극장 역시 한국영화를 냉대했다. 외화쿼터를 채워야 하는 규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줄어든 관객이 찾는 건 외화뿐인 상황에서 한국영화는 심심풀이였다. 단성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팔이와 맹협> 같은 홍콩영화나 내용과는 상관없이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 붙인 <나타샤> 등이 손님을 끌었고, 휴교령으로 인해 텅 빈 대학과 달리 극장은 <스팅>을 보러온 젊은이들로 쉽게 메워졌다.
비슷한 시기 다른 극장에서 상영한 <별들의 고향>과 <영자의 전성시대> 등이 관객몰이에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한국영화는 제자리 걸음을 반복했다. 유일하게 먹히는 건 ‘멜로’와 ‘스타’였다. 단성사도 장미희의 <겨울여자> 때문에 비원 앞 물만두 집까지 관객이 장사진을 치는 드문 광경을 목격한다. 한국영화로는 58만5700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133일 동안 간판이 걸렸으며, 여대생의 성적 방황이라는 논쟁적인 소재 덕에 각 대학에서는 세미나가 끊이지 않았다. 단성사가 한국영화로 이만한 행렬을 다시 마주한 건 10년 뒤쯤의 일이었다.
제6장 직배사 상륙과 마지막 개화
1980.8.17 <워싱턴포스트>. 미 정부는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에 추대되는 데 대해 반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보도
1988.9.19 영화감독 50여명, 미국 UIP사의 영화 직접배급에 항의 철야농성
단성사는 언제서부턴가 ‘쌍둥이 형제’의 ‘나와바리’였다. 주인보다 더 자주 극장 주위를 맴돌던 이 전설적인 암표상들은 하나가 경찰서에 잡혀가도, 또다른 이가 바통을 이어받아 극장 주위를 맴돌 정도로 황금 콤비였다. 관객이야 비싼 값을 치뤄야 하니 분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제작자 입장에서는 암적 존재들이 요긴할 때도 있었다. 출구조사를 바탕으로 흥행여부를 판단하는 그들의 동물적인 감각 앞에서 제작자들은 입술이 바짝 마른 채 점괘를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극장별로 구역이 나뉘어 있긴 했지만, 얼마나 암표상들이 꼬이느냐가 흥행을 내다볼 수 있는 유일한 척도였다.
이쯤 되니 뱃심이 두둑해져 제작자들에게 커피를 사거나 명절 때 값비싼 선물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80년대 초반 단성사의 효자는 007과 성룡이었다. 시리즈 <나를 사랑한 스파이>와 <문레이커>만으로 94만명을 불러들였고, 성룡 역시 1인 기예로 30만명에 이르는 관객의 넋을 빼놓았다. 그랬던 단성사가 다시 한국영화의 산실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현 태흥영화의 이태원 사장이 극장을 임대받아 운영하면서부터다. 든든한 극장 하나 없으면, 외화에 밀려 한국영화를 제작해도 원하는 날짜에 걸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의 전략은 간단했다. 서울시내 개봉관 10개가 경쟁적으로 외화를 걸면, 그는 반대로 한국영화를 틀었다. <어우동> <무릎과 무릎 사이> <기쁜 우리 젊은 날>이 순탄대로를 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단성사가 있었다.
극장 계약 때 연간 관객 수 얼마 이상을 채우지 못하면 극장주한테 변상하기로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여기에 <장군의 아들> 1, 2편으로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다시 썼으니, 단성사의 흥행을 기뻐하지 않는 이는 극장 간판을 그리던 백춘태씨뿐이었다. 도급제였으니, 흥행작 한편이 터지면 언제 다음 일감이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사정 때문이었다. 여기에 200일 동안 상영되며, 84만6천명을 불러모은 <서편제>까지 가세했으니 심통이 터질 만도 했다. <서편제> 행렬은 이태원 사장과 임권택 감독도 예상못한 일이었다. 개봉 3일 동안의 성적은 낙담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성사 옆 2층 동궁다방에서 창문을 뚫어 조심스레 내다보았을까.
그러나 <서편제>가 마지막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단성사는 한번도 제왕의 자리를 되찾지 못했다. 88년 UIP를 시작으로, 하나둘 상륙한 할리우드 직배사들이 수십벌의 프린트를 전국에 동시다발로 뿌리는 융단폭격이 첫 번째 이유였다. 단성사도 한동안 20세기 폭스의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지만, 가장 먼저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일류 개봉관의 메리트는 순식간에 없어졌다. 극장가 1번지라는 패찰이 할리우드 강풍에 의해 떨어져나간 것이다. 멀티플렉스의 거대한 흉상은 두 번째 위협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명성의 복구가 아니라 극장의 생존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95년 이후 20만명 이상을 동원한 영화가 한편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지난 몇년간 단성사는 악몽 속을 헤매야 했다. 이제, 단성사는 공사에 들어간다. 빠르면 2003년 여름, 지하에 5개관, 지상 12층에 11개관을 불러들인 대규모 멀티플렉스로 거듭난다. 한때 자웅을 겨루었던 대한극장과 피카디리가 일찌감치 멀티플렉스에 항복 선언을 하고서 개축에 들어갔던 것에 비하면 늦은 출발이다. 하지만 100년 전에도 상황은 그러했다. 2년간의 유예기간이 끝나면, 단성사는 새로운 애활가(愛活家)들을 만날 준비를 끝낼 것이다.
제7장 <서편제>와 함께한 마지막 영광
1991.11.13 미국,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한국이 요구하는 쌀 시장 개방 예외 조치는 들어줄 수 없다고 강조
1992.12.18 YS, 제14대 대통령 당선
1993.3.25 부산행 무궁화 호 열차 전복, 78명 사망, 112명 부상
“인터뷰 하러 다니면서 밥 얻어먹어 본게 그때가 처음이야. 다들 내 옷깃을 붙잡고서 서로 하자고들 했으니까…처음에야 몰랐지. 첫 3일은 죽을 맛이었어. 오죽했으면 임권택 감독하고 둘이서 단성사 옆 2층 동궁다방에다 몰래 창문을 내고 내다봤을까”
(<서편제> 개봉에 관한 이태원 사장의 회고)
<서편제> 행렬은 누구도 예상못한 일이었다. 당시 영화사는 비슷한 시기에 제작이 끝난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에 더 기대를 걸었었다. 원미경, 김혜선, 이혜영 등 낯이 익은 여배우들이 낯선 신인배우와 텁텁한 연극배우의 하모니에 무너질 줄은 누구도 몰랐다. 심지어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대한극장의 국정남 사장도 이태원 사장이 늘어놓은 두편 중 <화엄경>을 골랐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초반 부진했던 관객몰이는 청와대 시사회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세를 보인다. 상영이 시작되기 전 종묘앞까지 늘어선 6,7백명의 도열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매번 할리우드에 관객을 뺏기다 예상치 않게 복주머니를 안은 단성사의 가슴은 터지기 직전 아니었을까. 그러나 <서편제>가 마지막이었다. 1990년대 이후 단성사는 한번도 제왕의 자리를 되찾지 못했다. 88년 UIP를 시작으로, 하나둘 상륙한 할리우드 직배사들이 수십벌의 프린트를 전국에 동시다발로 뿌리는 융단폭격이 첫 번째 이유였다. 단성사도 한동안 20세기폭스의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지만, 가장 먼저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일류 개봉관의 메리트는 순식간에 없어졌다. 극장가 1번지라는 패찰이 할리우드 강풍에 의해 떨어져나간 것이다. 멀티플렉스의 거대한 흉상은 두 번째 위협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명성의 복구가 아니라 극장의 생존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95년 이후 20만명 이상을 동원한 영화, 한편을 건지지 못했다. 악몽의 계속이었다.
스러진 종로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것일까. 이제, 단성사는 대규모 공사에 들어간다. 이르면 2003년 여름, 지하에 5개관, 지상 12층에 11개관을 불러들인 대규모 멀티플렉스로 거듭난다. 한때 자웅을 겨루었던 대한극장과 피카디리가 일찌감치 멀티플렉스에 항복 선언을 하고서 개축에 들어갔던 것에 비하면 늦은 출발이다. 하지만 100년 전에도 상황은 그러했다. 2년간의 유예기간이 끝나면, 달라진 모습의 단성사는 새로운 애활가(愛活家)들을 만날 준비를 끝낼 것이다. 화려했던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품은 채로, 또 한번 맞닥뜨릴 종로통 싸움에 나설 채비를 마친 채로. 글 이영진 [email protected], 사진 정진환 [email protected]
▶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1)
▶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2)
▶ 역대 단성사 주인들
▶ 단성사 터주대감 조상림 상무
▶ 단성사에 얽힌 나의 추억1 - 영화감독 김수용
▶ 단성사에 얽힌 나의 추억2 - 영화감독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