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도 안 들어가고 색보정도 안 된 미완성 상태에서 <꽃섬>을 봤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송일곤 감독이 작가라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고 곧바로 영화제에 초청할 것을 결심했다. 데뷔작으로는 드물 만큼 진지하고 완성도가 높았다.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세명의 여자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매우 용감했다. 또 송 감독은 아주 개인적인 시각과 언어를 가지고 있고, 그것에 깊이가 있다. 감독이 스토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세 여자에게 현재의 사회에 대해 말하게 한다. 아주 좋고 용감한 영화다.”
베니스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알베르토 바르베라는 9월5일(현지시각) 오전 <꽃섬> 제작사 ‘씨앤필름’ 주선으로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accomplished’, ‘good’, ‘brave’, ‘auteur’, ‘artist’ 등 호의적인 수사를 연발했다. 자기가 초청한 영화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게 관례일 수 있지만, 평론가 출신으로 이탈리아 안의 여러 영화제를 이끌었던 바르베라는 수사가 정치적이고 신중한 사람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꽃섬>에 대한 지지가 남다른 듯했다.
‘현재의 영화’부문에 초청된 <꽃섬>은 4일 기자시사에 이어, 5일 공식상영과 기자회견 일정을 치렀다. 아직 한국에서도 시사회를 가진 적 없이 베니스에서 말 그대로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를 가진 이 영화는 상처를 갖고 떠나는 세 여자의 로드무비다. 화장실에서 낙태한 여고생, 설암이 도져 혀를 제거해야 할 처지에 놓인 성악가,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기 위해 몸을 팔다가 남편에게 쫓겨난 주부 등 10대, 20대, 30대 여자가 여행길에서 만나 남해의 ‘꽃섬’까지 가면서 여러 사건을 겪고 그를 통해 위로받는다. 각자에게 가해진 상처의 내용이나, 치유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디테일들이 함의하는 바가 도식적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이건 송 감독이 의도한 대목이기도 하다.
“찍는 방법은 사실적이지만, 얘기는 옛날에 듣던 동화처럼 모험, 고통이 있고 마지막에 가서 원하는 걸 얻는다.” 4일 오후 한국 기자들과 따로 만났을 때 송 감독은 이 영화를 ‘동화’라고 표현했다. 동화의 형식에 약간의 판타지도 가미했지만, ‘상처와 치유’라는 고전적인 주제에 다가가는 영화의 모습은 매우 진지했다. 폴란드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키에슬로프스키를 존경하는 송 감독은 형식실험 이전에, 다루고자 하는 테마부터 작가주의적이었다.
“머리 속의 단어와 이미지를 가지고 영화를 구상했다. 상처와 치유에 관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찍고 싶었다. 운명적으로 생긴 상처가 어떻게 치유 가능한지, 그 과정에서 사람들끼리 어떻게 관계맺는지 그런 걸 펼쳐보이기 위해 시나리오를 짧게 쓰고서 여행가는 기분으로 정확한 콘티없이 시작했다.” 이런 개념들 외에 또다른 계기는 디지털이었다. “서울시 전광판에서 틀기로 했던 1분짜리 영화 <플러시>를 찍으면서 디지털의 다른 가능성을 봤다. 여고생이 낙태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필름은 마구 쓸 수 없지만 디지털은 달라서 오래 가다 보니까 배우가 정말로 배역에 몰입하는 순간이 왔다. 그 순간을 잡을 수 있다는 장점을 보고서 디지털로 장편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 이유까지 첨가돼 <꽃섬>에는 롱테이크가 많다. “배우의 호흡을 따라 길면 길게 찍었고 호흡이 살아 있으면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넣었다. 결과적으로 롱테이크가 많았고, 배우들이 무척 고생했다.”
송 감독은 99년에 단편 <소풍>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은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지만, 장편으로 치면 경력이 없었던 때문인지 5일 오전에 열린 <꽃섬> 공식기자회견장에는 외국 기자가 적었다. 질문과 답변은 전날의 간담회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어 열린 공식상영장에는 1300석 가까운 살라그란데극장의 3분의 2가량이 찼다. 상영도중 소수 인원은 밖으로 나갔고, 끝까지 관람한 관객의 박수소리는 컸다. 특히 여자관객이 좀더 반기는 분위기였다. <꽃섬>은 신인감독의 데뷔작치고는 드물게 유럽 카날플러스의 지사인 와일드번치가 유럽 배급을 맡기로 했다. <소풍>에 주목하고서 <꽃섬>의 제작에 함께 참여한 프랑스 만달라영화사의 프로듀서 프란체스카 페더는 “신인감독의 단편이 칸에서 상 받고 장편 데뷔작이 베니스 경쟁부문에도 오고 그걸 유럽의 유력한 배급사 와일드번치가 배급하는 일은 유럽에서도 드물다”고 말했다. 페더는 “영화에 너무 만족한다. 이 영화제작에 참여한 게 자랑스럽다”고 덧붙였다.
임범 기자/ 한겨레 문화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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