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의 절반 이상이 흘러가도록 베니스에는 입성한 할리우드 스타들의 동정 이외에는 특별한 이슈나 화제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면, 이번 베니스영화제가 거장들의 컴백무대를 제공했다는 사실. 올 베니스영화제는 동서양의 현대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세명의 ‘마에스트로’에게 특별한 오마주를 바치고 있다. 일본의 스즈키 세이준, 이집트의 유세프 샤인, 그리고 포르투갈의 마뇰 드 올리베이라가 그들이다. 이들은 각기 자신들의 신작을 들고 베니스를 찾아왔고, 족히 3세대와 5개 대륙을 아우를 법한 너른 관객 앞에 그들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재미있는 아이러니는 중견 또는 신진감독들이 그닥 새로울 것 없는 작품들을 내놓는 반면, 평균 연령 75살이 넘는 이들의 신작은 도전과 실험의 의욕과 에너지로 충만하다는 사실이다. 우러르며 비결을 묻는 후배들 앞에서도 이들은 폼을 잡지 않았다. 셋 중 막내뻘인 일흔넷의 유세프 샤인은 작품 속 대사를 통해 이렇게 둘러댔다. “일흔 넘은 사람들의 말은 무조건 옳다. 그건 일종의 권리다.” 일흔여덟살의 스즈키 세이준은 이렇게 받아쳤다. “무슨 거창한 의미나 명분은 없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뿐이다.” 남미에서 돌아온 여든줄의 마뇰 드 올리베이라는 한술 더 떴다. “난 벌써 다음 작품에 들어갈 준비를 다 끝냈다. 생각만 해도 신바람이 난다.” 결코 ‘마지막’을 말하지 않는 이들의 열정과 저력에 베니스의 관객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스즈키 세이준, 반갑지만 다소 실망스런
지난해 베니스 경쟁부문, 올 칸 경쟁부문, 그리고 올 베니스 비경쟁부문에 지속적으로 출품하면서 반년에 한편꼴로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보이고 있는 마뇰 드 올리베이라 감독은 너무 자주 영화제에 드나든 때문인지 관심권 밖으로 약간 밀려난 반면, 오랜만에 신작을 내놓은 스즈키 세이준과 유세프 샤인을 향한 취재진과 현지 관객의 관심은 뜨거웠다. 67년작 <살인의 낙인>의 리메이크 <피스톨 오페라>를 들고온 스즈키 세이준은 가장 많은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안겨준 감독. 스즈키 세이준은 <도쿄 방랑자> <치고이네르바이젠> 등 독특한 스타일의 B급영화로 일본 대중문화에 활력을 불어넣은 장본인이다.
서구에서는 90년대 이후 로테르담 등의 영화제를 통해 이름을 알렸고, 그의 작품이 오우삼, 짐 자무시, 쿠엔틴 타란티노 등이 즐겨 만드는 펄프 액션물의 원조라는 정보 때문에 뒤늦게 더욱 유명해졌다. <피스톨 오페라>는 ‘넘버1’이 되고 싶어하는 킬러의 이야기 <살인의 낙인>의 여성버전으로, 이탈리아 현지 언론은 이 작품을 “<니키타>와 <레옹>을 연상시킨다”고 소개하기도 했지만, 여성킬러(전사)가 등장한다는 점말고는 언급된 작품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미유키는 킬러 조합에서 공인한 ‘넘버3’ 킬러. ‘넘버4’의 급습을 받고 그를 죽이는데, 그 현장을 목격한 소녀 사요코까지 죽이지는 못한다. ‘넘버1’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조합원들 사이에 혈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미유키는 자신을 따르는 사요코가 킬러가 되길 원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워한다. 과연 ‘넘버1’은 누구일까, 존재하긴 하는 걸까,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들이 그녀를 괴롭힌다.
<피스톨 오페라>는 오리지널인 <살인의 낙인>처럼 기이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말을 거는 영화지만, 연극과 무용, 가부키 등의 형식을 차용하고, 현란한 컬러와 조악한 컴퓨터그래픽까지 동원해 인공미의 극한을 향해 한층 더 과격해진 형식실험을 보여준다.
<피스톨 오페라>를 상영하는 극장 앞에는 관객이 줄을 이었고, 일부는 입장하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등 큰 성황을 이뤘지만, 결국 상영 도중 가장 많은 관객이 빠져나간 영화 중 하나가 됐다. 영화의 이미지와 화법이 낯설고 거북했던 탓이다. 과거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듯한 설정과 일본적인 것을 상품화하는 데 대한 반감도 작용한 듯. 그러나 베니스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들의 반응은 거의 열광적이었다. <키네마순보>의 평론가 사이토 아쓰코는 이 작품에 대해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식은 여전히 혁신적이다. 그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고 평했다. “그는 많이 늙었다.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 관심이 없다. 그저 영화를 만드는 데 의미를 두고 또 그걸 즐기고 있다. 감독을 좋아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가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게 놀랍고 반갑다.”
유세프 샤인, 국가대표급 유쾌함
유난히 유쾌한 영화를 좋아하는 이탈리아 관객의 각별한 호응을 얻은 <조용히… 지금은 촬영중>의 유세프 샤인은 제3세계의 대표적인 감독. 79년작 <알렉산드리아… 왜?>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면서 이목을 끌었지만, 그전부터 고국 이집트에 대한 애정을 품고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상업영화의 관습을 따라 관객이 쉽게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이번 작품 역시 코미디와 뮤지컬을 결합한 독특한 드라마 속에 황금만능주의에 젖은 이집트사회에 대한 풍자를 담았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가수 겸 배우 말락은 결혼에 실패한 뒤에도 사랑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때 말락의 후광을 입고 출세하려는 국가대표급 바람둥이 라메이가 접근하고, 말락은 자신의 커리어를 망쳐가면서 라메이에게 빠져든다.
말락의 동료들은 라메이의 본색을 드러내기 위해 그에게 말락의 딸을 접근시키기로 한다. 말락은 라메이의 정체를 똑바로 보게 되고, 안정을 되찾아 춤과 노래와 연기에 복귀한다. 1940년대와 50년대 미국 코미디와 뮤지컬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인물과 상황 설정이 다소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독특한 생기와 유머가 넘친다. 영화(공연)와 현실의 경계를 풀어놓고, 코미디와 뮤지컬과 드라마의 장르를 뒤섞는 이음새는 과연 45년 경력의 영화거장다운 솜씨다. “이건 러브스토리다. 예술가와 야심가의 위험한 사랑에 관한 얘기다. 하지만 예술가와 정치가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은 진리 한 토막을 감추고 있다. 일단 갈 길을 결정하면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스즈키 세이준은 “이해할 수 없는 영화만 만든다”며 소속 스튜디오에서 해고당하는 계기가 된 바로 그 작품을 리메이크했고, 유세프 샤인은 정치적인 갈등으로 오래 전에 등진 조국 이집트의 정서와 문화를 담은 또 한편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공교롭게도 한 자리에서 만난 이들 두 작품은 40년 가까이 그들을 지탱해온 예술혼, 그 고집과 열정의 결정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은영 기자 [email protected]
▶ 제58회 베니스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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