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술렁거린다. “악수도 했댄다. 쪼매만 더 보자. 야, 임은경이다, 임은경!” 스러지려는 여름의 빛이 가득한 8월28일, 부산시 사하구 감천1동 감천화력발전소 주변은 TTL 소녀를 만나려는 10대들의 그림자로 넘실거렸다. 영화촬영이라는 말에 가슴 설레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전날 화력발전소 입구에서 진행된 촬영에서 인도에 설치된 감독 모니터를 흘끗흘끗 보며, “와, 점마들, 엔쥐냈네. 졸라 고생하네”라고 쑥덕거리면서 발걸음을 머뭇거린 것은 나이 사십을 훌쩍 넘긴 아저씨들이었다.
촬영이 이뤄지고 있는 화력발전소 안쪽을 향해 연신 발돋움하는 10대들을 뒤로 하고, 촬영장으로 들어서니 발전소 건물 꼭대기에 어른거리는 검은 점들이 보였다. 촬영이 진행되는 곳은 발전소의 8층 꼭대기. 이날 촬영분은 거리에서 자신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총격을 가한 성소(임은경)가 시스템의 추격을 피해 발전소 꼭대기로 올라간 뒤, 자신을 생포하려는 보위대와 대치하는 장면. 그 과정에서 성소를 짝사랑하는 오비련(정두홍)이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홀로 꼭대기로 오르지만, 시스템의 지령을 받은 헬리콥터 속의 이(김진표)에 의해 사살된다. 시간상으로 보자면, 타워에서 뛰어내린 성소를 헬기에서 내려온 이가 공중에서 구출하는 전날 촬영분의 직전 상황이다. 우선 오비련이 정수리에 총탄을 맞는 장면이 촬영됐다.
이 작품을 통해 배우로 데뷔하는 ‘무술인’ 정두홍은 다소 긴장한 듯했지만, 그보다는 촬영이 겨울에 시작된 탓에 아직까지 입고 있는 두터운 겉옷이 거추장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이마에 설치된 특수폭약이 ‘탁’ 하는 소리를 내며 터지고, 그 자리엔 마치 총탄을 맞은 듯 붉은 자국이 생겼지만 장선우 감독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한번 더!”를 외쳤다. 정두홍의 메이컵을 다시 하는 동안 임은경은 그새 친해진 홍콩쪽 젊은 스탭과 ‘중국어 따라 배우기’ 시간을 가졌다. 연기에 들어가면 신비롭기 그지없는 느낌을 주는 그녀지만 또래와 쉴새없이 재잘거리는 모양은 영락없는 10대 소녀였다. “어른들에게 무시당하고, 아무도 자기를 주의깊게 봐주지 않는 그런 상황에 분노해서…”라는 스스로의 성소 캐릭터 설명을 듣고 있는데, 홍콩 무술감독이 달려와 촬영이 시작된다며 재빠르게 임은경을 채간다.
곧 이날의 하이라이트인 헬리콥터신을 위해 바다 저편에서 헬기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오늘은 헬기가 떠”라고 되뇌던 장선우 감독의 인상에 긴장감이 퍼졌다. 애초 아침 일찍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던 헬기장면은 기체 외부 도색작업이 뒤늦게 이뤄지는 바람에 지연됐던 것. 게임기 드림캐스트의 로고를 연상케 하는 시스템의 로고가 새겨진 검정색 대형 헬기가 거대한 소음과 바람을 일으키며 촬영장으로 다가오자 배우와 스탭의 몸놀림이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임은경 뒤로 보이는 헬기의 모습, 헬기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모습 등을 모두 찍기에는 반나절의 해가 너무 짧았던 탓이었다. 보통의 경찰 헬기와 달리 두개의 프로펠러가 도는 대형 헬기가 특이하다 했더니 해경에서 사용하는 러시아제 헬기란다.
일반 헬기로 바다 위를 낮게 날면 중력 때문에 바닷속으로 빨려들어간다나, 그래서 묵직해 보이는 해경 헬기가 등장한 것이라고 함께 온 부산영상위원회 관계자가 설명한다. “어차피 공짠데, 기왕이면 멋진 것으로 제공하고 싶기도 했다”는 그의 이야기처럼 이 모든 편의는 부산영상위원회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공기관인 화력발전소 안에 100명이 넘는 스탭, 배우들과 또 100명쯤 되는 엑스트라(그들도 의경이었다)가 득시글거릴 수 있었던 것은 시의 적극적인 지원이 아니었다면 꿈도 꿀 수 없었다. 부산 서면 롯데호텔 앞 거리를 막은 거나 부산역 광장에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38m 높이의 화력발전소 꼭대기에서 두대의 크레인을 이용, 이로 분한 스턴트맨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리는 성소 스턴트맨을 공중에서 나꿔채는 추락 스턴트를 펼쳤던 전날에 비하면 박진감은 덜했지만, 이날의 액션연기는 규모면에서 압도적이었다. 허창경 프로듀서는 “하지만 앞으로의 일도 태산”이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성소를 구출하겠다는 일념으로 불타는 청년 주(김현성)가 시스템을 돌파하는 장면의 세트촬영과 삼성자동차 공장 앞에서 진행되는 시스템의 외부 장면, 그리고 수중액션까지 폭탄이 터지고, 보위대원들이 파편과 함께 날아다니는 대형 액션신을 앞두고 있으며, 촬영이 끝난 뒤 편집, CG에 힘을 기울일 것을 생각하면 까마득하다는 얘기다. 특히 보위대원이 시스템의 벽을 통과해 나타난다거나 총을 맞으면 이상한 물질로 변화해 사라진다는 설정이 있기 때문에, 벌써부터 CG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인상이다.
낮촬영밖에 없었던 탓에 해가 질 무렵인 7시30분쯤 촬영장을 빠져나가는 장선우 감독의 표정에선 묘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포르노 감독’, ‘10대를 착취했다’는 것에서 ‘영화를 돈으로 때우려 한다’는 내용으로 비난의 초점은 바뀌었지만, 그럴수록 세상과 당당하게 정면승부해왔던 그다운 여유가 엿보인다. 여유만만 걸어가던 그가 선글라스를 슥 내리며 한마디 던진다. “오늘 괜찮았어? 허허허.”
글 문석 기자 [email protected]·사진 오계옥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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