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전지현이 출연한 <시월애>가 <레이크 하우스>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됐다. 키아누 리브스, 샌드라 불럭 주연의 <레이크 하우스>는 할리우드로 이식되고도 <시월애>의 결을 거의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을 주요한 볼거리로 삼은 것이나 남녀주인공을 이어주던 우편함을 다시 한번 등장시키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중 더욱 눈길을 끄는 건 바로 우편함의 존재다. 어찌하여 우편함이 2년이란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의 메신저가 됐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들은 그 자체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소품이다. 되돌아보면 영화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또 관객의 눈과 귀를 현혹하기 위해 마법의 힘을 발휘하는 소품들을 유독 자주 애용해왔다. 여기, 영화 속 마법의 힘을 발휘했던 소품들을 한데 모았다.
어서오십쇼. 잭 스패로우 골동품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거 참, 인물이 훤하신 게 꼭 부잣집 자제분 같아 보이시네 그려. 이런 음침한 곳까지 행차하시다니 특별히 찾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뭐든지 말만 하십쇼. 저, 스패로우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진귀한 보물을 손님 입맛에 꼭 맞게 추천해드리는 것으로 유명합죠. 가게에 없는 물건은 직접 공수해드리기도 합니다만 그럴 경우 수수료가 추가되는 걸 각오하셔야 합죠.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신 분이라면 비슷한 물건이라도 잽싸게 대령해 모시겠습니다. 근데 언제 직업을 바꿔치웠냐굽쇼? 아아, 요즘 경기가 안 좋아 해적질하기도 힘들고 여름도 벌써 지나갔고 모아놓은 보물도 있고 해서 그럭저럭 골동품상을 차리게 됐습죠. 원하시는 물건이 있으시면 빨리 말씀하시죠. 아, 수집광이시라굽쇼? 허허. 그중에서도 마법의 힘을 지닌 물건을 찾고 계신다고요? 그렇다면 고급 중에서도 최고급 취향을 지닌 손님이시구려. 알아모시겠습니다. 우선 이쪽에 잠시 앉아 계십죠. 양질의 보물들만 골라 모은 제 컬렉션 중에서도 최고급 상품들만 보여드리겠습니다. 암, 그렇고 말굽쇼.
가장 먼저 보실 물건은 아주 로맨틱한 사연을 지닌 것입니다. 달콤쌉싸래한 연애 얘기를 좋아하신다굽쇼? 그럼 아주 마음에 드실 겁니다. 첫째 물건은 바로 우편함입니다. 저희 가게 상품들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귀하디 귀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만 이 물건은 예외적으로 두개이니 세일가에 제공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먼저 여기 회색빛이 도는 우편함은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저기 저 뻘건 우편함은 메이드 인 코리아입니다. 당연히 미제가 좋지 않냐굽쇼? 천만의 말씀입니다요. 약간 녹슨 듯한 느낌의 표면이며 겉면의 섬세한 장식이며 한국 제품이 훨씬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합니다만 저 미제는 한국 제품의 카피입죠. 물론 기능면에서는 차이가 없으니 걱정 붙들어 놓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손님, 혹시 편지 쓰는 걸 좋아하시나요? 미려한 문체를 자랑하시는 분이라면 이것들의 확실한 임자일 겁니다. 이 물건을 맡기고 간 머리 길고 늘씬한 여자분과 서늘한 인상의 남자분도 모두 편지를 통해 이뤄진 로맨스를 귀띔하고 사라졌거든요. 다시 말해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과 펜팔을 100% 보장하는 우편함이라 이 말씀입니다. 단점이라면 손님의 펜팔 상대가 2년 전 인물이거나 2년 뒤 인물이라는 점이지만 사랑은 시공간의 장벽까지 뛰어넘는다고 하지 않습디까. 어떻습니까. 사랑의 힘이란 실로 대단하다굽쇼? 핫핫.
<레이크 하우스> <시월애>의 우편함
특징: 편지를 넣어두면 2년 전 혹은 2년 뒤 인물에게 전달됨 장점: 미지의 인물과의 펜팔이 가능함. 인테리어 소품으로 그만임 단점: 귀차니스트에게 전달되면 답장을 받지 못할 수 있음. 필체만 믿고 사랑에 빠졌다가 얼꽝을 만날 가능성이 짙음 기타: 미국 제품은 신품, 한국 제품은 구모델임
다 좋은데 일일이 편지쓰기 귀찮으시다굽쇼? 허허. 손님,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피나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죠. 그래도 영 당기지 않는다면 펜팔 로맨스에 도움이 될 만한 이 물건을 함께 구입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두 번째 물건은 여기 이 속기 깃펜입니다. 이 펜을 빼앗기 위해 악독한 여자와 싸웠던 걸 생각하면 아직까지 이가 갈리는군요. 리타 스키터라고, 잡소리 잘하는 기자랍니다. 해리 포터라는 소년 마법사 역시 그 여자가 이상한 기사를 써대는 통에 엄청 짜증을 부렸다는 후문이 있습죠. 그 마녀 같은 여자의 손톱에 얼마나 긁혔는지 제 손등을 보십쇼. 아직도 상처 자국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물건은 어찌나 영특한지 한번씩 꺼내볼 때마다 그런 아픔 따위는 싹 가신답니다. 암, 그렇고 말고요. 필기하기 싫은 학생이나 손님처럼 글쓰기를 싫어하시는 분들께 안성맞춤이랄까요. 머리 굴러가는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모두 받아 적는, 이름하야 속기 깃펜이라 이 말씀입니다. 게다가 건전지도 필요없고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아도 되니 편리하기까지 합죠. 하나 염두에 두셔야 할 점이라면 머릿속에 담고 있는 사념까지 읽는다는 것 정도랄까. 우편함과 함께 사시면 이 물건 역시 세일가에 모시겠습니다. 야, 싸다 싸. 세일기간도 아닌데 이런 기회 흔치 않습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속기 깃펜
특징: 쓰고 싶은 말을 알아서 적어줌 장점: 잉크나 볼펜 자국 등을 묻히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음. 지니고 다니면서 지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음 단점: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 헛소리들이 노출돼 주변 사람들의 빈축을 살 수 있음 기타: 우체통과 함께 사용하면 더욱 좋음. 필기를 많이 하는 학생들의 원추 아이템
여기까지 봐도 매력적인 물건이 없으시다… 나 참, 이 바닥에서 100년 넘게 굴러먹었지만 손님처럼 눈 높은 사람은 처음입니다. 가만 있자… 아차, 제가 까맣게 잊고 있었구료. 곧 죽어도 스타일을 외치시는 손님 같은 분들을 위해 마련해둔 비장의 아이템이 있습니다. 세 번째 물건은 턱시도입니다. 디자인이 쫙 빠진 게 몸매 좋은 분들이 입으면 그냥 달라붙습니다요. 이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구제라굽쇼? 손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합니다. 다림질 잘해서 여태까지 소중하게 보관해온 물건인걸요. 저 칼날 같은 바지선을 보십쇼. 새것 못지않게 훌륭한 제품인데다 이 턱시도만 착용하면 환상적인 능력도 발휘하실 수 있으십니다. 혹시 성룡이라는 땅딸막한 남자 아십니까? 그 남자 역시 이 턱시도 덕에 부린 묘기로 나름 영웅으로 추앙받았다고 할까요. 앞구르기도 힘든 똥배의 소유자조차 세계에서 가장 애크러배틱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옷입죠. 사랑하는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돌린다면 이 턱시도를 입고 멋진 패션 감각과 특출한 운동신경을 자랑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성을 위한 드레스 같은 건 없냐굽쇼? 허허, 글쎄올시다. 여성분들이야 총알을 피해 굴러다니기보다 더 우아한 걸 좋아하지 않으실까요. 경비망을 요리조리 피해 몸을 뒤틀려면 드레스보다야 달라붙는 가죽옷이 제격이겠죠.
<턱시도>의 턱시도
특징: 입으면 근력, 지구력, 유연성 등 신체지수가 최대치로 상승함 장점: 서커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온갖 재주를 부릴 수 있음. 어느 파티장이나 출입 가능. 어느 여자에게나 작업 가능 단점: 현란한 몸동작 때문에 너무 요란해보일 수 있음 기타: 작업은 가능하나 성사 여부는 100% 장담 못함
허허. 여성분들의 원성이 여기까지 들려오는구료. 그렇다면 이번에는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물건을 보여드립죠. 손님을 색다른 세계로 인도해줄 네 번째 물건은 보드게임판입니다. 한때 보드게임 크게 유행했었습니다만 이 물건을 이용하면 조금 독특한 게임을 접하실 수 있으십니다. 이번 것도 비슷한 물건 두개로 구성돼 있지만 둘의 버전이 다르다고 할까요. 여기 퍼런 게임판을 선택하면 우주여행을 맛보실 수 있고 이 초록 게임판을 선택하면 정글의 동물들과 사냥꾼을 만나실 수 있으니까요. 조금 위험하진 않냐굽쇼? 우주여행시에는 우주복을 입은 남자가, 동물 사파리시에는 수염을 길게 기른 남자가 도움을 주기야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내놓은 목숨을 도로 거둘 순 없을 겁니다. 허허. 목숨 내놓은 적 없으시다고요? 손님. 원래 게임이란 끝장을 봐야 하는 겁니다. 승리하기 전까진 누구든 빠져나올 수 없죠. 하지만 걱정 붙들어 매십쇼. 유성비와 로봇의 공격, 야생동물의 갑작스러운 출현 등과 모두 맞닥뜨린다 해도 끝까지 살아남을 사람은 살아남을 테니까요. 그게 또 게임의 재미 아니겠습니까. 냉동된 채 잠에 빠져들거나 원숭이로 변해버려도 마지막에는 결국 해피엔딩이 되고 말지요. 가족과 사이가 소원하시거나 오랜만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징한 운동 한판 하고 싶으신 분들은 귀가 솔깃해질 물건입니다. 오늘 사가셔서 가족이나 친지와 게임 한판 어떠십니까.
<자투라> <쥬만지>의 보드게임판
특징: 우주여행, 동물 사파리, 이용 가능함 장점: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아주 역동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음. 가격도 저렴하니 해외여행 대신 강추 단점: 우주만 보면 숨이 막힌다거나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에겐 쥐약. 목숨을 보장 못함 기타: 두 가지 버전으로, 취향대로 골라잡을 수 있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건 싫으시다고요? 한번 사는 세상 갖은 즐거움을 맘껏 누려보고 싶으시다고요? 알겠습니다. 이제 어떤 물건을 보여드려야 할지 감이 오는군요. 이것이야말로 먼저 내지르고 보자는 손님 같은 분들께 딱일 겁니다. 이리하야 다섯 번째 물건은 초록색 마스크입니다. 누구든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고자 하지만 그게 어디 쉽습니까? 이 마스크는 깊숙이 감춰놓은 본능이나 욕망을 분출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지요. 조심하십쇼. 여기에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 손님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유혹적인 연인처럼 얼굴에 쫙 달라붙고나면 어느새 능글능글한 웃음을 만면에 띄우게 됐습죠. 어떻게 이런 보물을 얻었냐고요? 어느 날 비루먹은 강아지 한 마리가 이걸 뒤집어쓰고 난동을 부리다가 그만 저한테 딱 걸려 혼쭐이 났습죠. 주인인 듯한 삐쩍 마른 남자 하나가 찾아와 미안하다며 머리를 조아렸지만 제 성질이 그리 호락호락하답니까. 결국 언성을 높이는 말싸움 끝에 어부지리로 이 보물을 얻어냈답니다. 그 남자도 남자지만 함께 찾아온 글래머 아가씨는 얼마나 드세던지. 혹시 저도 이걸 써봤냐굽쇼? 저 역시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유혹에 많이 시달리긴 했습죠. 더구나 가끔씩 윌 터너를 생각하면 씁쓸해지는 것이… 그놈이야 엘리자베스랑 잘 먹고 잘산다지만 저는 싱글남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한때 지독한 저주에 걸려본 저는 알고 있습죠. 요상한 힘을 지닌 물건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것을요. 어떻습니까. 이놈에게서 손도 털 겸 싸게 싸게 드리겠습니다.
<마스크>의 마스크
특징: 본능과 욕망을 자극해 쾌락을 추구하도록 함. 신체지수 역시 최대치 상승 장점: 소심남은 화끈남이, 소심녀는 섹시녀가 될 수 있음. 세계 최대의 악당도 간단히 물리침 단점: 사람을 반쯤 미치게 만들기 때문에 나중에 추태부린 걸 완전 후회할 수 있음 기타: 피부가 초록색으로 변함. 노래 부르거나 춤추는 것을 좋아하게 됨
이것 가지고는 성이 안 차다니요. 더욱 사악한 마력을 지닌 물건을 원하신다굽쇼? 어허, 그러다 큰일나십니다. 그래도 일단 보고 싶으시다고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간신히 그 힘을 억누르고 있다지만 이건 애초부터 존재하면 안 되는 물건이었습죠. 그럼 여섯 번째 물건 절대반지를 꺼내 모시겠습니다. 진짜 절대반지 맞냐굽쇼? 당연하죠. 확인을 부탁드린다고요? 알겠습니다. 이 반지를 잘 보십쇼. 바로 여기 여기입니다. 이제 붉은 글씨가 보이십니까? 한번 깨물어봐도 되겠느냐굽쇼? 손님, 이거 24K 맞습니다. 믿어주세요. 그보다 이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차마 말로 설명이 안 됩니다. 호빗족인 프로도와 메리가 이 반지를 없애기 위해 불의 산으로 모험을 떠났을 때 저 역시 그들을 따라 나섰습죠. 멍청한 골룸은 곧 발각되고 말았지만 저는 끝까지 정체를 숨긴 채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아찔한 모험이 대단원의 막을 내릴 즈음 알다시피 프로도는 반지를 저버리지 못해 발광했습죠. 이 얘기의 마지막은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반지가 여기 있게 됐냐굽쇼? 하하. 절벽 사이에 숨어 있던 제가 잽싸게 손을 뻗어 용암으로 떨어지는 골룸에게서 슬쩍 빼앗았기 때문입습죠. 죽음 앞에서 반지마저 강탈당한 골룸의 절규는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요. 그 찢어지는 비명 소리란. 아, 등이 오싹하지 않으십니까? 아니, 저기 저 유리창을 보십쇼. 저기에 뭔가 서늘하고 두려운 것이 어른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반지의 제왕>의 절대반지
특징: 절대적인 악의 힘을 부여함 장점: 투명인간으로 변함. 목걸이에 펜던트처럼 걸어 착용하면 센스있는 패션 소품이 됨 단점: 어지럼증 등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음. 감시당하는 듯한 기분을 항상 느껴야 함 기타: 일단 껴보고 선택할 것. 사이즈 조정이 불가피해 손가락이 너무 가늘거나 굵은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음
겁쟁이 같으니라고. 결국 이렇게 도망치고 말았군. 땡전 한푼 없어 보이더니 지갑 속에 돈도 없었을 거야. 내 완벽하고 매혹적인 설명을 들으면서도 군침만 흘리고 있는 놈이라면 차라리 내쫓아버리는 게 나아. 휴, 다행이다. 모두 이미테이션인 걸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더군. 생각해봐. 진짜 절대반지를 얻었다면 그토록 쉽게 남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냐고. 참 나. 그리고 저 턱시도 말이야. 입으면 멋있기야 하겠지만 저기에 무슨 대단한 마법의 힘이 숨어 있겠어. 마스크며 속기 깃털, 우편함 역시 비슷하게 생긴 걸 가져다놓고 약간의 마법을 걸어놓았을 뿐 오래 못간다고. 보드게임판도 마찬가지. 부작용이 심해 잘못 사용했다간 다른 차원의 세계로 날아갔다 다신 돌아오지 못한다지. 그런데 잠깐. 이 모든 것이 가짜임을 알면서 왜 거짓과 가식을 일삼느냐고? 장사가 원래 다 그런 거지. 돈을 벌려면 입에 발린 말이나 거짓말도 서슴없이 내뱉어야 하는 법. 네가 배고프고 술고픈 아픔을 알아? 아, 저기 또 손님이 들어오네. 어서오십쇼. 잭 스패로우 골동품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인물이 훤칠하니 척 봐도 부잣집 자제분 같으시군요. 핫핫. 그런데 특별히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