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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따라 떠돌이의 예술혼이
2001-09-12

<취화선> 촬영현장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의 예술가들은 권세가들이 벌이는 사적 연회장의 엔터테이너 처지를 피하지 못했다. 여흥을 제공한 대가로 얻는 권세가들의 후견과 배려가 가난한 예술가들의 가장 든든한 생계수단이었던 까닭이다. 궁중예술가란 따지고 보면 결국엔 가장 서열 높은 쇼맨 아니었던가.

술에 취한 그림의 신, 오원 장승업. 지방 고을 수령이 마련한 잔치판에 초대된 이 떠돌이 천재 예술가는 당대의 유명 화가들과 함께 합동그림이란 기묘한 여흥을 권세가에게 바치고 있다. 합동그림은 여러 화가들이 한붓씩 합쳐 작품을 완성하는 것. 오원의 화명은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어, 그의 붓이 움직일 때마다 탄성과 함께 짙은 시샘의 기운이 연회장에 기묘한 긴장을 몰고온다.

8월29일 경기도 남양주의 종합촬영소.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은 3일째 이어진 합동그림장면을 마무리하고 있다. 한 시퀀스지만 이미 스승보다 높은 경지에 이른 천재화가의 솜씨가 과시되는 장인데다, 평생의 연인 매향(유호정)과의 재회까지 겹쳐 있어, 갖가지 앵글과 숏을 교차시키느라 3일이 꼬박 걸렸다. 촬영은 이제 곧 중반에 접어들 것이며, 명성과 함께 더욱 커가는 공허감을 안고 장승업은 다시 전국을 떠돌 것이다.

<취화선>은 그렇게 한 천재 예술가의 내면을 향해, 불운한 시대의 심장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글 허문영 기자·사진 정진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