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개월 동안 아메리카와 유럽 대륙 곳곳을 이리저리 소요하며, 그날 그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드로잉으로 옮긴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샘터 펴냄, 2005)는 바람을 맞으며 종이 위를 달리는 펜의 사각거림이 들려오는 독창적인 여행기였다. <깜삐돌리오…>의 저자인 건축학도 오영욱(일명 오기사)은 경유지라도 거치듯 서울로 돌아왔다가 이내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날아갔다. 지난 8월 초 출간된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예담 펴냄)는 지중해 도시에 자리잡고 더디게 보낸 1년 반 동안 블로그에 차곡차곡 쌓은 글과 스케치, 카툰을 모은 책이다. 여느 여행기들처럼, 그의 여행기도 로망을 판다. 그러나 여행하면서 놀고 공부하고 일하는 오영욱에겐 여행법은 더이상 살아가는 법과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디지털 유목민의 개념을 논하는 대신, 이 스물아홉 청년의 사례를 엿보면 어떨까. 인생의 시기도 장소도 뜻대로 우회로를 고를 수 있었던 이 행복한 1976년생의 초상은, 원하는 곳에서 필요한 만큼 세상과 접속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N세대(Net Generation)의 동화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잘도 떠나갔다. 덩달아 여행책도 공항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나오는 수하물처럼 꾸준히 쏟아졌다. 그 대열 가운데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는 도드라졌다. 3년 반치 건설회사 월급을 천천히 까먹으며 중남미와 유럽 등지를 15개월 동안 주유한 오영욱(일명 오기사)의 여행기는, 약간의 주석이 붙은 스케치북에 가까웠다. 애초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책만이 지닐 수 있는 박력이 거기 있었다. 숱한 이국 풍경의 공간감을 나그네의 순결한 눈과 0.3mm의 펜촉으로 잡아낸 드로잉은 대범하고 비범했다. 보는 사람을 들어올려 화면 안쪽으로 데려가는 오기사의 그림은, 그 자체로서 조촐한 여행이었다. 뒤늦은 연락이 닿았을 때 이미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떠난 뒤였다. 이번에는 눌러앉아 머무는 여행이라고 했다.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의 출간에 맞춰 서울로 잠깐 돌아온 오영욱은 표지를 가리키며 말한다. “사실은 책 제목과 달라요. 행복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이전에도 저는 행복한 사람이었어요. 그저 거기에 다른 종류의 행복이 있는 줄 알고 간 거죠.”
책 만들기는 통쾌한 즐거움, 여행은 필수적인 사치
정식으로 펴낸 책은 <깜삐돌리오…>가 처음이지만, 오영욱과 책의 인연은 한참 앞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림 잘 그리는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펴낸 음란 만화가 처녀작이다. 당연히 원본 딱 한권뿐이었던 이 책은 대여료를 모아 떡볶이를 함께 사먹자는 대의명분으로 기획됐다. 중학교에서는 학생 문집을 편집하고 컷을 그렸다. 반장, 부반장은 못해도 책 만들 때만큼은 “편집장은 나야!”라고 외치는 통쾌한 경험을 통해 창작자의 권력을 맛보았다. 아울러 담임 선생님의 힘을 빌려 원고를 모으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사는 법도 배웠다. 중학 시절 접한 만화 <드래곤볼>도 오영욱에게 아주 중요한데 오늘날 그의 스케치와 일러스트, 카툰을 이루는 ‘선’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진학 뒤에도 편집자의 이력은 계속됐다. 책은 오영욱에게 읽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만들어서 즐거운 물건이었다. 수능시험에서 “운이 좋아서 찍은 문제가 다 맞는 바람에” 그는 좋은 점수를 얻었다. 부모님은 내심 의대를 원했지만, 입시를 일찌감치 끝내고 12월 말 여가를 활용해 졸업 신문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건축공학과에 특차 지원했다. 대학을 마치고 건설현장에 근무하는 분주한 시기에도 후배들과 어울려 재미로 책을 만들었다. 주제는 “가볍게 살자”였다.
오영욱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배낭하나 달랑 메고> 같은 책을 읽으며 배낭여행을 자연스럽게 상상한 세대다. 건축학이라는 전공은 여행을 낭비가 아닌 삶에 필수적인 사치로 여기도록 부추겼고, 대상을 눈과 손으로 그리며 세부를 기억하는 버릇을 몸에 새겼다. <깜삐돌리오…>가 기록한, 2003년 6월부터 2004년 말까지 장기 여행은 충동적 일탈이 아니라 ‘입사 전부터’ 미리 계획한 일이었다. 마지막 근무일, 동료들과 송별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이제 씻고 잠들기만 하면 나는 내일 아침 공항으로 간다’고 생각하며 귀가하던 밤길의 희열은 세상 최고의 기분이었다. 다른 여행자와 달리 그는 어떤 인생의 약속도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았고 3년 반 직장생활이 만들어준 통장이 있었기에 심지어 돈까지 넉넉했다(대개의 여행자는 둘 중 하나만 많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여정을 정하고 한곳에서 내킬 때까지 어슬렁거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부양할 가족이 없는 조건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가족을 지탱하거나 새 가족을 만들기 위해 투자하는 돈으로 그는 시간을 산 셈이다. 여기에는 미량의 오만도 필요했다. 지금 나는 다만 우회하고 있을 뿐이며, 몇년쯤 뒤처진다 해도 극복할 재능이 있다는 뻔뻔한 믿음. 각국을 일정도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오영욱은 매일 꼬박꼬박 10분씩 PC방에 들러 살아 있다는 표식을 남겼다. 그날의 그림을 사진 찍어 홈페이지에 올리고 떠오른 단상을 즉석에서 덧붙였다. 분량이 제법 쌓이자 방문자 중 누군가가 책으로 내면 어떠냐고 말을 흘렸고, <깜삐돌리오…>의 씨가 됐다. 설마 그렇게 간단히? 그렇게 간단히!
서태지와 인터넷, 21세기 아날로그적 작업의 기반
오영욱은 이곳의 삶이 불행하거나 불만스러워서 길을 떠난 경우가 아니다. 그의 스케치와 카툰에는 건설현장의 안전모를 푹 눌러쓴 캐릭터 ‘오기사’가 항상 얼쩡거린다. 일종의 아바타다. “남들한테 나를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있긴 했는데, 그렇다고 확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고 약간 왜곡해서 보여주고 싶어서” 만든 분신이다. 그래도 왜 하필 딱딱한 직함을 닉네임으로 정했을까? 직장인 시절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일주일에 7일 그 이름으로 불리다보니 그만큼 친숙한 이름이 없어서다. 또 다른 이유는 알파벳으로 표기한 오기사(ogisa)의 글자 형상이 마음에 들어서. 오영욱에겐 나중에 설계사무소를 차리면 ‘5000K’라는 간판을 달겠다는 계획도 있다. 의미를 묻자 그냥 한번 써보면 안다고 한다. (과연!)
돈과 물건은 그에게 중요하다. 긴 여행을 감당할 사람의 조건은 이미 돈을 벌어놓았거나 나가서도 돈을 벌 수 있는 사람, 돌아와도 잘 살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망설이지 않고 말한다. 어떤 물건을 소유해 얻는 즐거움이 자신감을 키우고, 그렇게 되고 나면 꼭 그 물건이 아니어도 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고 오영욱은 표현한다. 유목민처럼 20대를 보냈다고 성공의 야심이 덜한 것이 아니다. 때때로 그는 부모님의 기대가 본인의 기대에 비해 오히려 작다고 느끼기도 한다. 건축가라면 그렇듯 그는 언젠가 마을 혹은 도시 하나를 통째로 설계하고 싶다. 오영욱의 중·고교 시절에 해당하는 90년대 초반을 흔든 스타 서태지는 어른이 된 지금도 그와 몇몇 친구들에게 여전히 역할 모델이다. 전략이 마음에 들어서다. “한국적인 기반 위에서 보편적으로 훌륭한 것을 만들어내고 싶어요.”
오영욱의 여행기는 손 글씨와 개성적인 그림체를 살린 아날로그적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인터넷 시대의 최대 수혜자”라고 자인한다. 첫 책을 계기로 일러스트레이터로서 그는 상당한 일거리를 얻었다. 네이버 블로그와 싸이월드의 스킨을 디자인했고 <W> <SURE> <트래블러> 등의 잡지에 기고했다. 청소년을 위한 도서 편집자들은 기존의 컷을 재활용하겠다며 비용을 지불했고, 이용자들이 쓴 글에 디자이너의 일러스트를 삽화로 제공해 한권의 책을 만들어주는 체리북 사이트에도 입점했다.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낸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그가 지금처럼 스페인에서 생활비를 벌며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프라인에서도 초대가 날아왔다. 2005년 말에는 <이미지와 텍스트> 전시회에 참여했고 한 피자 체인은 매장 벽을 오기사의 풍경 스케치로 장식했다. 오기사 여행기의 독자라면 파울로 코엘료의 신간 <순례자>(문학동네 펴냄)의 표지 그림도 눈에 익을 터다. 올 초부터 바르셀로나 엘리사바 디자인학교에서 인테리어·건축 석사과정에 들어간 오기사는 통상 컴퓨터를 쓰는 3차원 공간 그래픽을 손으로 시도해 호의적 반응을 얻었다. 건축가로서도 하나의 방법론일 수 있겠다 싶었다. <프리 에이전트의 시대>의 저자 대니얼 핑크는 회사에 붙박히지 않고 스타벅스와 킹코스(각종 사무기기를 이용할 수 있는 체인점)를 사무실 삼아 자유롭게 일하는 노동력의 출현을 선언한 바 있다. 오영욱에게도 카페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장소라기보다 혼자 일하는 공간이다. 설계 아이디어를 내고 착실한 일러스트를 그리는 작업장이다.
여행은 살아가는 방식, 우연히 여행 중일 뿐
만 서른살을 한달 남짓 앞둔 오영욱의 귀에도 피터팬에게 다가오는 악어 뱃속의 시계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다. <오기사, 행복을 찾아…>를 읽은 그의 신뢰할 만한 벗은 “너도 이제 고민하는 30대를 맞았구나, 좋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깜삐돌리오…>에 과거를 반추하지도 미래를 내다보지도 않는 청춘의 눈부신 빛이 어려 있다면, 바르셀로나 여행 정보를 곁들인 두 번째 책 <오기사, 행복을 찾아…>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미래를 더듬는 기색이 역력하다. “진정한 우리의 경쟁 상대는 부모님 친구 분들의 자식”이라는 예리한 통찰은 길이 인용될 대목이다.
서울로 돌아올 날을 1년 남짓 헤아리는 그에게 문득 당신한테 집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새벽 2시에 혼자 있을 때 간절히 가고 싶은 곳”이라는 답이 나온다. 그러니까 특정한 사람도 지역도 아닌 마음이 기준이다. 지금까지는 집 아닌 방만 가져본 오영욱은 얼마 전 한 월간지의 요청으로 살고 싶은 집을 벽화로 그려보았다. 발코니에 나서면 이웃집 발코니가 보이고 내 모습도 이웃에게 보이는 집, 그리고 면적은 좁아도 천장이 높은 집을 떠올렸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바닥 평수에는 집착하면서 층고(層高)에는 그리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이 새삼 신기하다. 삶의 부피를 재는 잣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영욱은 지난 1년 반의 거처가 바르셀로나가 아닌 다른 도시라 해도 상관없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서울 아닌 뉴욕에 태어났다고 해도 다름없이 여행을 하며 살았을 거라고 말한다. “여행이 나라는 인간의 본질을 바꾼 것은 없어요. 여행은 살아가는 방식의 하나고, 저는 지금 우연히도 여행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여행자의 입장이 되면 자신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즐기지 않으면 손해이기 때문에, 행복해야 할 일종의 의무가 생긴다는 오영욱의 마지막 지적이 솔깃하다. 행복은 꼭 이방에 있지 않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와야 파랑새를 만난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단, 행복의 기술을 터득하는 데에 이방인으로서 살아보는 경험은 유익하다.
오기사의 그림
마음으로 잡아당긴 직선과 곡선의 풍경
두권의 여행기에 실린 오영욱의 스케치는 세부가 빈틈없으면서도, 마치 펜을 떼지 않고 한번에 그린 그림처럼 선의 장력이 팽팽하다. 거의 실용적일 만큼 대상에 충실하지만, 착시를 부르는 에셔의 판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오영욱은 풍경에 좀처럼 자신의 모습을 넣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를 통제하는 ’시점’으로서 그의 지배는 단호하다. 시야를 실로 홈질해 잡아당긴 주름이 보이는 것 같다. 평균 세 시간쯤 지긋이 앉아 펜을 놀려야 하다보니 실내에서 밖을 내다보는 구도가 많다. ‘맥도널드 매장에서 내다본 파리의 라데팡스’처럼 재미난 앵글도 연출된다. “전체 구도를 잡은 다음 사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끌리는 요소들부터 무작위로 그린 다음 연결한다. 어긋난 위치를 만나게 하려니까 자연히 왜곡된 상이 나왔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스타일로 성립됐다”고 오영욱은 설명한다.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는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에 비해 노련한 곡선을 구사한다. 구조체와 자연물을 다룰 때와 대조적으로 동물과 사람을 묘사하는 그의 펜은 수줍고 어색하다.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을 때도, 오영욱은 공간 전체가 보이도록 위치를 잡고 타이머를 작동한 다음 배경 속으로 슬쩍 걸어들어가는 방법을 선호한다. 인물이 들어가 그 공간의 실제 크기와 느낌을 드러내는 ‘스케일 모델’의 구실이라고 그는 표현한다. 오영욱의 그림도, 나아가 여행의 과정도 ‘나와 세계의 거리’를 가늠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한 나무의 다른 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