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바다 위에 피어난 국경없는 시네마 파라디소
2001-09-07

경쟁작 절반이 합작영화, `영화의 세계화` 논란일듯, 섹션 재정비로 재도약에 나선 첫해

늦여름의 베니스에는 저마다의 그림엽서를 가슴에 품은 관광객들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다. 관광객들이 현지주민들의 머릿수를 훌쩍 뛰어넘는 8월 말 9월 초가 되면, 물 위에 떠 있는 도시 베니스의 땅덩어리 위에는 사람들이 둥둥 떠다닌다. 그들의 몸은, 특히 마음은 그렇게 떠다니고 있다. 베니스만큼 이방인에게 세상의 주인공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또 없다고 했던가. 낭만적인 여정, 낯선 사랑을 예감하며 베니스를 찾는 이들이 과연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이맘때의 베니스가 다양한 양질의 문화 체험장으로 거듭나는 복된 공간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흔히 베니스 관광 성수기의 핵심 행사로 곤돌라 축제를 들지만, 알고 보면 더 큰 주역은 영화제를 비롯한 문화행사 ‘비엔날레 디 베네치아’다. 이때만큼은 베니스도 뉴욕 못지 않은 코스모폴리스가 된다. 그뿐 아니다. 올해 베니스에 도착한 예술작품들은 국경도 무너지고 장르도 무너져 있다.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 섬은 온통 국적 불명의 합작영화 물결이고, 미술전이 열리는 아르세날레지역에는 영화제의 손님이어야 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아톰 에고이얀의 영상물들이 ‘설치’돼 있다. 우연일까.

푸른빛 가득한 영화의 바다로 뛰어든 여인의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리드필름을 시작으로 58회 베니스영화제가 ‘2001 시네마 오디세이’에 나섰다. 지난 8월29일 저녁 7시 리도 섬의 팔라초 델 시네마에서는 58회 베니스영화제의 출항을 알리는 개막식이 펼쳐졌다. 행사 시작 두어 시간 전부터 영화제 메인 행사장인 팔라초 델 시네마 앞 야외무대로 스타들의 캣워크를 보기 위해 취재진과 이탈리아 현지관객이 몰려들었지만,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스타는 난니 모레티를 위시한 심사위원단, 그리고 개막작 <더스트>의 밀초 만체프스키 일행 정도로 단출했다. <타인들> <생일소녀>의 니콜 키드먼, <제이드 스콜피온의 저주>의 헬렌 헌트, <트레이닝 데이>의 에단 호크, 덴젤 워싱턴, <프롬 헬>의 조니 뎁과 헤더 그레이엄 등의 할리우드 스타들과 일찌감치 평생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된 에릭 로메르, 이태리필름 파운데이션의 위원장 마틴 스코시즈, 소설가로 전향(?)한 마이클 치미노 등이 영화제 기간중 베니스를 찾을 예정이지만, 개막식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관객은 그들의 우상 난니 모레티의 존재만으로도 흐뭇한지, “몇년 전부터 내가 영화제에 참석하는 걸 반대한 유일한 사람이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인데, 올해는 내가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고 이 자리를 내준 것 같다”는 썰렁한 농담에도 흐드러지게 웃어보였다. 올해로 취임 3년째를 맞는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은 그간 영화제의 섹션정비와 행사장 증축 등에 힘을 쏟아왔고 결과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베니스영화제와 이탈리아영화가 하향길을 걷고 있다는 일부 평자들의 냉소어린 비난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긴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영화제지만, 한동안 칸과 베를린의 기세에 눌려 있던 베니스는 올해 새로이 섹션을 정비하면서 재도약을 노리고 있다. 장편 극영화의 공식부문을 ‘베네치아 58’로 개칭하고, 그중 경쟁부문은 작가 발굴을 위해, 비경쟁부문은 거장 유치를 위해 따로 자리를 꾸리면서, 노거장들의 작품을 모셔오는 일과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일 중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갓 데뷔한 젊고 유능한 감독들을 일찌감치 ‘베니스 패밀리’로 포섭하기 위해 ‘현재의 영화’를 경쟁부문으로 그 성격을 바꿨다. 시상도 늘어서, ‘베네치아 58’의 최우수 작품에 황금사자상을, ‘현재의 영화’ 출품작 중에 올해의 사자상을, 최우수 데뷔 작품에 미래의 사자상을 안기기로 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소개하는 140여편의 상영작들을 아우르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국적이 사라진 영화’라는 점이다. 단적으로 ‘베네치아 58’의 경쟁부문에 오른 작품의 절반이 적게는 2개국, 많게는 4개국이 손을 잡고 완성한 영화들이다. 개막작 <더스트>도 영국, 독일, 이탈리아, 마케도니아 4개국 합작영화이고, 참여한 배우와 스탭들의 국적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출품작들의 면면을 봤을 때 합작이 상업적 성공에 기대지 않는 예술영화의 생산활로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이지만, ‘영화의 세계화’가 장기적으로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는 여러 가지 논쟁을 불러올 듯하다.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이 “베니스영화제는 안티 아메리카영화제가 아니”라는 해명을 먼저 나서서 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올해는 12편으로 비교적 미국영화들이 많고, 스필버그의 등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작품도 서너편 들어 있다. 국적이 사라지고 있는가 하면, 국적이 늘어난 것도 올 출품작들의 또다른 경향. 아프리카 등 낯선 대륙의 영화들도 상영된다.

‘베네치아 58’부문 작품 중에서 이미 상영돼 언론과 관객의 반응이 읽히는 작품은 래리 클락의 <불리>와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 <키즈>에 이은 또 한편의 10대 청소년 비행기 <불리>는 또래 집단 내부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표현 수위와 그 파급효과에 관한 논쟁을 불러왔다. 김기덕 감독은 <섬>을 기억하는 유럽언론들에게 다시 한번 주목됐는데, 그들의 관심은 주로 특히 남북한 상황이나 주한미군 문제의 현주소에 집중됐다. ‘현재의 영화’부문과 ‘미래의 사자상’ 후보에 올라 있는 송일곤 감독의 <꽃섬>은 오는 9월5일에 소개될 예정. 이 밖에 앞으로 선보일 베네치아 58 경쟁부문 작품들, 오는 7일 평생 공로상을 받는 에릭 로메르의 신작 <영국 여인과 공작> 등에도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베니스=박은영 기자 [email protected]

▶ 바다위에 피어난 국경없는 시네마 파라디소

▶ “이야기를 하고 듣는 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