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XXXX, 근거지: 서울시 동작구 사당2동 148-12, 혐의점: 테이프 불법복사 및 밀반입 수천건, 활동시작: 1991년 5월10일, 특이점: 유사조직들과 달리 지난 10년 동안 탄탄한 조직체계, 방대한 지지세력 과시, 최근 동향: 생소한 외국감독들의 영화를 대사관과 연계, 프린트를 국내로 직접 반입하여 상영하는 등 대담한 행태를 보이고 있음
문화학교 서울은 실정법상 명백한 범죄집단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에게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그들의 지난 10년이 있었기에 우린, 조악한 비디오 화질로나마 고다르를 만날 수 있었고, 파졸리니에 경악할 수 있었다. 문화학교 서울을 거쳐간 3500명의 회원들 모두 가난한 공범이었고, 어수선한 사당동 어귀를 돌아 한번이라도 혜민국 한의원 3층 시사실의 문턱을 넘은 이들 또한 행복한 수혜자였다. 문화학교 서울의 김노경(30) 사무국장 역시 이곳을 처음 찾은 날 “그동안 내가 무엇인가를 박탈당해왔구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문화학교 서울이 시네마테크를 겨냥했던 것은 아니었다. 16mm 단편영화를 만들기 위해 정민택, 김우형 등이 모여 예비 스터디모임을 꾸렸던 것이 단초. 당시 그들은 할리우드 장르의 고전들과 배창호 감독의 영화들을 옆구리에 끼고 자취방을 전전했다. 지금도 든든한 후원인격인 혜민국 한의원 최정원 원장이 마련해준 공간에 보금자리를 튼 때가 1991년 5월. 곽용수, 이주훈, 조영각 등 이른바 문화학교 서울 3인방이 운영위원으로 결합하면서 93년부터 정기적인 상영회를 꾸준히 치를 수 있게 됐다. 첫 번째 영화제는 짐 자무시,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를 묶은 ‘작은 영화제’. 이후 기획전과 작가전 두 가지 포맷으로 총 200여회의 소규모 영화제를 꾸려왔다. 초기의 중국 5세대 영화제나 95년 이와이 순지 영화제 경우는 길가에 줄을 서기도 했을 정도. 그런 대규모 인원들이 15평 남짓한 시사실 앞뒤를 꽉 채운 탓에 한번은 회원 중 한명이 산소 부족으로 실신해서 운영위원들을 긴장케 했다.
문화학교 서울의 자산은 빨간 커튼 뒤에 숨겨놓은, 여지껏 한번도 공개하지 않은 2천개의 비디오테이프다. 지역 시네마테크들과 물물교환을 하는 것만으론 모자라 일본 원정을 떠나 비디오를 대여한 뒤 몰래 카피한 결과다. 엄청난 양의 비디오테이프들을 갖고 있는 회원들의 전폭적인 도움도 컸다. 그렇게 애써 모았건만 예상치 않은 습격에 망연자실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철창을 뜯고 들어와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쓸어 담아간 욕심많은 도둑 때문에 고다르와 왕가위를 비롯 여러 작가들이 실종됐고, 열혈 마니아로 보이는 이의 소행으로 우디 앨런은 한동안 상영작 목록에서 빠지기도 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파업> 등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정부의 정보기관으로부터 “거기, 뭐하는 곳이냐?”며 추궁당했던 건 그에 비하면 약과였다.
하나, 아직 문화학교 서울은 정식 시네마테크라고 보기 힘들다. 지난해 열었던 아시아감독 3인전, 루이스 브뉘엘 영화제 등 필름영화제를 치르기 시작했건만, 그들에게 주어진 건 올해 6천명이 몰려든 에릭 로메르 회고전으로 인해 그동안 졌던 빚을 조금 갚고, 인건비를 줄이는 대신 중고 빔 프로젝트를 구입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것 정도다. 안정적인 상영공간 하나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이들은 다음 영화제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저렴한 가격에 상영공간을 내준 아트선재센터 덕분에 그나마 버텨왔지만, 상영수익에 기대어 진행해야 하는 이들로선 하루 100만원 수준의 대관료가 버거운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700만∼800만원이 드는 운송료, 2회 상영 기준으로 편당 100만원 안팎의 상영료까지 지불해야 하니 매번 숨이 막힌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상영 때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같은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올 초 하명중 감독의 영화 7편을 모아 상영하려 했지만, 판권을 소유하고 있는 제작사들의 의견이 달랐고 결국 조율에 실패해서 포기했다. 한쪽 영화사는 무료로 상영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고 또 한 제작사는 2회 상영에 수백만원의 상영료를 요구했던 것. 상영수익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절충점을 찾지 못했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보고 싶어 몸이 달았던 60, 70년대 한국액션영화 회고전도 같은 이유로 일찌감치 손을 놨다. 에릭 로메르 회고전도 어려움은 적지 않았다. 상영한 17편 중 국내에 수입된 작품은 고작 <여름이야기> 1편. 그것마저도 수입사가 프린트를 잃어버려 결국 해외에서 들여와야 했다. 이 모든 것이 변변한 필름아카이브 하나 없는 탓이다.
든든한 밑동이 없는 한 이러한 난관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운영위원인 오주은씨는 “지금 우리가 단번에 외무성이 자체 라이브러리를 갖고 있는 프랑스나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160여개 시네마테크의 네트워킹으로 원활하게 영화를 수급하는 독일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1년에 네 차례 정도 영화제라도 치룰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필름아카이브와 안정적인 상영공간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지금보다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식단을 짤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함께 활동하는 정지영씨 역시 “정부나 지자체가 큰 규모의 국제영화제를 늘릴 것이 아니라 지역 시네마테크 지원 등을 통해 내실을 다져야 한다”고 덧붙인다. 정책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세계영화의 최근 경향을 둘러보고 직접 영화를 고르고 싶다는 이들의 꿈은 열악한 국내상황에 비춰볼 때 아득하기만 하다.
이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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