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는 무사히 끝났다. 지난 7월28일부터 8월1일까지 인천 송도에서 개최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시작은 불안했다. 7년 전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을 중단시키며 록 팬들을 눈물 흘리게 했던 장마 구름은 좀처럼 송도의 상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2만여명의 관객과 국내외 70여개의 뮤지션들의 열정은 발목까지 빠지는 진흙탕마저 청춘의 해방구로 만들어냈다. 불꽃처럼 피어오른 한국의 우드스톡, 인천 송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사흘을 지면에 옮긴다.
프롤로그, 송도로 출발하기 전에
“7년 전 트라이포트의 악몽이 떠올라”
1999년 7월31일. 1만여명의 혈색 좋고 이빨 튼튼한 젊은이들이 인천의 송도로 몰려들었다. 하늘은 심상찮았으나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우드스탁도 그랬대. 폭우 때문에 완전 진흙펄이었는데도 50만명이 모여들었대.” 그러나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불손한 이국의 사운드에 물들 것을 염려하셨던 모 대통령 각하가 하늘에서 마지막 계엄령을 내리신 듯, 강풍과 폭우가 갑작스레 찾아왔다. 1만명의 젊은이들은 자정까지 버텼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은 태풍 앞에 무너졌고, 젊은이들은 수재민으로 분류되어 근처 학교로 옮겨져 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당시 30대 초반의 생생한 젊은이였을 <씨네21>의 M기자는 회고한다. “한국 록의 역사를 10년 후퇴시킨 사건이었지.”
2006년 7월28일, 펜타포트 첫째 날
“들었어? 줄리안(더 스트록스)이 서태지 노래를 불렀어!”
K는 대학 후배인 J와 길을 나섰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였다. 준비성이 지나치게 철저한 나머지 배낭여행 역사상 최악의 짐꾸림꾼으로 기록됨이 마땅한 K의 가방에는 ‘당신이 록 페스티벌에 참여하기 위해 꼭 필요할 것 같지만 사실은 별로 쓸 일도 없는 물건 101가지’가 들어 있었다(선글라스가 2종에 비타민제까지 들어 있었던 것은 비밀이다). 두 사람이 가방을 짊어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송도 유원지 근처의 모텔에 도착한 것은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Headliner: 주요 출연진)가 등장하기 딱 1시간 전이었다. 주말 연인들을 위한 모텔방은 커튼부터 침대보까지 수줍은 핑크빛이 감돌았다. 정오부터 저녁 8시까지는 ‘쉬었다 가시는’ 손님들을 위해 핑크빛 침대를 비워주어야만 한다는 게 모텔의 원칙이다. 모텔을 나서자 비는 더이상 내리지 않는다. 구름은 태양을 가리고 바람 또한 시원하니 이것이 바로 록을 위한 기상이 아니더냐. 시조라도 한수 읊으려는 K에게 J가 대꾸했다. “7년 전 그날의 날씨도 처음엔 이랬었지.”
기다려! 그들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를 사랑하지 않아. 기다려! 그들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를 사랑하지 않아. -‘예예예스’의 <Maps> 중에서-
15만원짜리 3일권 팔찌를 손목에 차고, 합법적 음주가 가능한 19살 이상임을 증명하는 노란색 종이 팔찌를 또 하나 찬 두 사람은 ‘예예예스’의 보컬인 ‘카렌 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하자 질주를 시작했다. 그러나 질주는 불가능했다. 이미 바닥은 어제 내린 비로 인해 펄판으로 변한 지 오래다. 신고 있던 ‘조리’(일본식 슬리퍼)는 진흙에 푹푹 묻혀 걸을 때마다 발을 끌어당긴다. J가 불안한 듯 말했다. “7년 전이랑 똑같애. 7년 전이랑.”
9만평에 달하는 페스티벌 부지의 끝에서 끝으로, 마침내 도달한 빅 톱 스테이지는 관중의 열기로 가득했다. 폴란드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카렌 오’가 리드 보컬인 예예예스는 뉴욕 출신의 거라지(Garage) 록밴드. 카렌 오의 무대는 그야말로 에너지의 집약체다.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짓고 무대를 장악하는 이 당돌한 여인은 끊임없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관객을 선동한다. “사촌들을 만나기 위해 여러 번 한국을 방문했지만, 한국에서 공연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공연 전 인터뷰에서 밝혔던 그다. 록 페스티벌의 장점 중 하나는 흥행문제로 단독 내한공연이 불가능한 뮤지션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마치 단독 개봉이 어려운 인디영화들을 부산과 전주의 국제영화제를 통해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심상치 않던 하늘은 끝끝내 7년 전의 악몽을 재현할 심상이다. 예예예스의 공연이 끝나자마자 하늘은 멀건 국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비닐옷을 걸쳐 입은 맨발의 관중이 곳곳의 천막으로 뛰어들었다. K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옆자리의 여인에게 비닐의 절반을 양보했다. “고마워.” 호주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다가 한국어를 공부하러 왔다는 케스였다. “한국에서 이런 공연을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K가 대답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더 크게 외쳐, 더 크게 그러면 우리는 살기 위해 달릴 거야 나는 거의 말할 기운도 없어 난 니가 왜 목소리를 높여 말할 수 없는지 이해해 -스노우 패트롤의 <Run> 중에서-
거대한 비 구덩이 속에 모인 군중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듯한 스코티시 밴드 ‘스노우 패트롤’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끝나자 사람들은 거대한 지붕으로 덮인 엠넷 스페이지로 질주했다. 재즈와 힙합과 레게와 컨트리, 모든 장르를 포크록의 기운으로 화해내는 미국 루츠록(Roots Rock)의 귀염둥이 제이슨 므라즈의 무대가 시작될 참이었다. 그는 비에 지친 소녀들의 마음을 원없이 달랬다. “I won’t worry my life away. I won’t worry my life away.” 나라면 똥끝이 타도록 걱정하진 않을 것이라며 사람들을 위로하는 그의 재롱을 뒤로하고 K와 J는 빅탑 스테이지로 달음박질쳤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쿨한 뉴욕의 꽃미남 밴드 ‘더 스트록스’의 공연이 시작될 찰나였다. 빅탑 스테이지와 엠넷 스테이지 사이의 진흙탕길은 흙탕물을 머리까지 튀기며 달려가는 청춘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드루 배리모어의 연인인 드러머 파브리지오 모레티를 선두로 ‘더 스트록스’의 멤버들이 하나둘씩 스테이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거라지 밴드란 게 원래 좀 쿨하고 도회적인 태도로 유명한 족속들이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나라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페스티벌에 왔으니 거만하고 깔끔하게 공연을 끝내고 돌아가겠지. 그러나 K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퍼붓는 비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곡들을 목청껏 따라 부르는 괴이한 관중을 미리 예감이라도 했던 것일까. 보컬인 줄리언 카사블랑카스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노래를 한곡 부르기 시작했다.
“소뤼 쳐주둬어언, 옙푸게 우숴떠어언, 아룸다운 느희드레 그 모쓰비 조아써~.”
카사블랑카스가 “대학 시절 한국인 룸메이트에게 들었던 노래”라며 부르기 시작한 곡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우리들만의 추억>이었다. 그렇게 믿어지지 않는 극적인 순간들을 시작으로 펜타포트는 시작되었다. K는 불어치는 강풍우가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2006년 7월29일, 펜타포트 둘째 날
“꺄~악~~!! 브라이언 몰코가 웃었다!”
전화 소리가 울렸다. “손님. 시간입니다.” 송도를 찾은 연인을 위해 핑크빛 침대보를 양보해야 할 시간이다. K와 J는 말려놓은 바지를 대충 걸쳐입고 모텔을 나섰다. 비는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트라이포트의 악몽이 재현될 정도는 아니었다. 거리는 팔찌를 찬 퀭한 얼굴의 좀비들이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으로 가득했다. 일본 밴드 ‘드래곤 애쉬’의 무대가 시작된 메인 스테이지 근처의 땅은 어머니가 아침마다 머그잔 가득 타주시곤 했던 미숫가루처럼 농밀한 진흙으로 변해 있었다. 곳곳에서 임자 잃은 슬리퍼들이 진흙을 꾸역꾸역 토해냈다. 밟는 순간 꺼져 내리는 진흙 지옥이 따로 없다. K가 “역시 진흙이야말로 록 페스티벌의 재미지. 글래스턴베리와 우드스톡을 보라구”라고 말하는 순간, 옆에서 한 바가지의 진흙이 K의 머리 위로 튀어올랐다.
페스티벌이 열리는 장소는 약 9만평. 빅탑 스테이지와 엠넷 스테이지 사이의 거리는 어림잡아 500m 정도. 그 사이에 임시로 만들어진 편의점, 각종 식당들(전주 콩나물국밥으로부터 피자까지 메뉴는 다양하나 질은 보장할 수 없다), 음반 할인점, 기념품 판매대, 카페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빗물 섞인 국밥으로 요기를 마친 K와 J는 곳곳에서 사람들과 마주쳤다. 5년 만에 만나는 대학 후배들, 5주 만에 만나는 업계 사람들, 10년 만에 만났으나 모르고 지나쳤을 수많은 기억 속의 사람들.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음악으로 이어진 인간들의 섬이다.
꿈을 포기하지마. 원하는 것을 포기하지마. 진실된 모든 것을 포기하지마. 꿈을 포기하지마. 원하는 것을 포기하지마. 왜냐면 나 역시 너를 원하니까. 나 역시 널 원하니까. 내가 널 원하니까. 내가 널 원하니까. -플라시보의 <Because I Want You> 중에서-
페스티벌 기간 중 가장 많은 군중이 모인 4인조 힙합그룹 ‘블랙 아이드 피스’(Black Eyed Peas)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사실 록 페스티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록’이라는 것을 애티튜드(자세)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록 페스티벌에 어울리는, 혹은 그렇지 않은 장르는 존재하지 않는다. K는 옆에 있는 지인에게 컨트리와 트로트 가수라도 ‘록’의 애티튜드를 가지고 있다면 얼마든지 페스티벌 무대에 설 수 있는 게 아니냐고 강변했다. “페스티벌이 다 끝나면 록의 순수를 운운하면서 페스티벌에 어울리지 않는 밴드를 초청했다는 말들이 나돌걸.” 지인은 대꾸했다. “그럼 싸이는?” “….”
공연 내내 “코리아!”를 외치더니 급기야 “한국 여자들이 젤로 섹시해”를 모토처럼 내지르던 블랙 아이드 피스는 앙코르 무대를 30분이나 펼치고도 쉽게 무대 뒤로 들어가지 못했다. 엄청난 열기는 90년대 영국 록계의 가장 퇴폐적인 아름다움의 소유자, 플라시보의 무대로 이어졌다. 글램(Glam)한 매력을 지닌 보컬 ‘브라이언 몰코’가 등장하자 이상하게도 송도의 진흙밭은 짙은 안개로 휩싸였다. 마치 누군가가 거대한 드라이아이스 기계를 9만평의 부지에 설치한 듯했다. 그리고 페스티벌의 가장 마술 같은 순간이 벌어졌다. 터져오르는 폭죽을 본 몰코가 살짝 웃음을 보인 것이다. 물론 그 미소는 낮고 로맨틱한 플라시보의 곡들을 모조리 따라부르는 참으로 괴이한 극동의 관중에 대한 수줍은 화답이었을 것이다. 팬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몰코는 공연 중에 웃어 보이는 일이 거의 없는 남자다. 이제 펜타포트에 모여들었던 플라시보의 팬들에게 “몰코가 웃었다”라는 문장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고전영화의 팬들에게 “가르보가 웃었다”는 문장이 지니는 것과도 비슷한 진앙을 전해주리라.
2006년 7월30일, 펜타포트 셋째 날
“하하, 우리는 진짜 멋진 관객이야!”
K의 코는 끊임없이 콧물을 쏟아낸다. 젖은 바지 하나로 3일을 버티고도 멀쩡한 J와 달리(집요한 준비성 덕택에) 바지와 겉옷을 3일 내내 새것으로 갈아입었던 K다. J가 한마디한다. “늙었군.” 모텔을 나서자 갑자기 무시무시한 태양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이건 그나마 좋은 징조다.
여전한 진흙을 겨우겨우 헤치고 빅탑 스테이지에 당도하자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몇년 만에 만나는 대학 동창생들이다. 근처 야산의 이름을 딴 고교 그룹 사운드 ‘옥봉산’의 기타리스트 출신이자 이후에는 록의 스피릿을 운동의 스피릿으로 전환시켜 화염병도 좀 던졌던 K의 동창 Y군은 아이스박스에 방수 매트까지 차려놓고 스테이지 근처에 앉아 있었다. 그의 일행은 3일 동안 캠핑을 했노라 했다. “수재민이 따로 없었지. 떠내려가는 줄 알았다.” 27일과 28일 이틀 동안 인천 지역에 내린 비는 모두 235mm. 포클레인은 끊임없이 땅을 다지느라 분주하다. 페스티벌 진행에 참여한 지인의 한탄을 뒤늦게 참조하자면, 팔레트라고 불리는 징검다리를 공급하기로 했던 업자가 펜타포트의 절박한 사정을 알고는 30분 만에 개당 가격을 부풀리며 배짱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예산이 부족한 펜타포트쪽이 급히 마련할 수 있는 처치는 불도저를 불러서 땅을 밀어내는 방도밖에.
꽃과 여름의 향기처럼, 태양과 광휘처럼 진실은 낯선 위장을 한 채로 와서는 너의 마음에 메세지를 전할 거야 탓바… -쿨라 셰이커의 <Tattva>(진실이라는 의미의 힌두어) 중에서-
K가 가장 기다렸던 공연은 전성기가 지나도 너무 지난 영국 밴드 ‘쿨라 셰이커’였다. 인도 음악과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절묘하게 접합한 그들의 음악은 90년대 후반 심신이 불안정하던 20대의 K를 위한 정신적 치료제였다. 하드코어 록의 하드코어 팬인 J가 엠넷 스테이지에서 펼쳐진 ‘스토리 오브 더 이어’의 공연에서 (동그란 원을 만들어 뛰다가 서로 부딪치는) 모싱과 슬래밍으로 초죽음이 되어가던 순간, K는 연체동물처럼 몸을 흐느적거리며 쿨라 셰이커의 흥취에 빠져 있었다. 보컬 크리스피언 밀스는 전성기의 미모를 잃은 지 오래지만 그의 음악은 여전히 힌두신의 은총을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힌두교 경구로 가득한 알아듣지 못할 가사들을 K와 친구들은 따라부르고 또 따라불렀다. 밀스의 눈이 빛났다. “고마워. 느네들은 정말로 좋은 관중이야.” 그리고 젊은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을, 지금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거라지 밴드 프란츠 퍼디난드의 마지막 무대가 시작되었다. 다져진 진흙 속에서 방방 뛰던 K의 조리끈이 둘 다 끊어져나갔다.
오늘밤 일어났을 때 나는 말했지 누군가가 날 사랑하도록 만들 거라고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그리고 지금 난 알아. 알아. 알아 난 알아 그게 너란 걸 -프란츠 퍼디난드의 <Do You Want To> 중에서-
프란츠 퍼디난드의 마지막 공연과 함께 축제는 끝났다. 축제가 끝났다는 것을 믿지 못한 채 넋을 잃고 앉아 있는 K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첫날 비를 함께 피했던 호주 여인 케스였다. “전혀 못 알아봤어. 좋은 날 보니까 훨씬 근사하네.” 줄리언 무어처럼 붉은 머리와 귀여운 주근깨를 가진 케스는 지난 3일이 한국에서 보낸 최고의 시간이었다고 다소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K 역시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나에게도 지난 3일이 한국에서 보낸 최고의 시간 중 하나였어.” K는 명함을 한장 건넸고, 어디로 가면 시원한 냉커피를 살 수 있는지 일러주었다. “꼭 연락할게.” 냉커피를 시원하게 마셨을 케스는 명함을 어디엔가 흘렸을 테고, 폭우 속에서 비닐옷의 절반을 빌려준 작은 키의 K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사실 페스티벌에서 만난 인연이란 게 원래 그렇다. 그 짧은 순간의 인연은 순결하지만 금세 지워지는 첫 연애편지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순간은 영원히 기억되는 종류의 시간이므로 아쉬울 것은 없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K에게 외쳐댔다. “너무 좋아. 너무 좋아.” 플라시보의 도도한 보컬 브라이언 몰코가 관객에게 그토록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두번의 앙코르 공연을 하고, 또 웃어 보이기까지 한 공연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라고들 했다. 누노 베텐커트로 하여금 “너네는 정말 멋진 관객이야”라고 수없이 소리치게 만들고, 결국엔 (스스로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을 듯한) ‘익스트림’(Extreme) 시절의 멜랑콜리한 러브송 <More Than Words>를 선물을 바치듯이 노래한 페스티벌은 처음이었을 거라고들 했다. 아마도 이 ‘처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K와 친구들의 간절한 소망에 가까운 것임에 틀림없다. 펜타포트 페스티벌은 후지록 페스티벌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뮤지션들을 잠시 모셔올 수 있었기에 가능한 축제다. 록음악이 청년문화에 끼치는 영향력이 이상할 정도로 적은 2000년대의 한국에서, 그들 모두를 우리의 힘(과 자본)만으로 불러모을 수 있는 방도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좋다. 펜타포트는 첫발자국이며, 그 발자국은 지난 3일 동안 송도의 진흙탕에 모인 관중과 뮤지션 모두에게 깊이 새겨졌다. 두 번째 발자국을 떼는 것은 첫발자국보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에필로그, 일상으로 돌아와서
“지난 3일은 나에게 최고의 시간 중 하나였어”
1969년 8월17일. K의 전생인 K(케이트)는 지쳐 있었다. 음향 시설도 별로였고, 음식과 식수도 모자라 곳곳에서 매점을 습격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화장실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연일 내린 폭우로 농장은 거대한 진흙펄로 변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K는 지난 3일간의 지옥 같은 축제가 인생의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여겼다. 옷이라고는 머리에 꽂은 꽃밖에 없는 남녀들이 진흙 웅덩이에 몸을 씻으며 재니스 조플린의 목소리에 따라 춤을 춰댔던 지난 3일 말이다. 그녀는 친구에게 말했다. “이곳을 우드스탁 네이션이라고 명명할 거야. 여기에 집을 짓고 아이들을 키우겠어.”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2006년 8월2일. 우드스탁에 집을 짓고 살다 농장주에게 강제 철거된 분노를 과도한 약물 복용으로 달래다가 삶을 마친 카렌이 자신의 전생인 줄은 눈곱만큼도 모르는 한국의 K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기침을 콜록거리던 K는 인터넷 포털의 뉴스들을 살폈다. “운영은 낙제점”, “차라리 머드 축제라고 하는 편이 나아”, “빈 페트병이 산더미, 시민의식 부재” 등등의 중제들이 박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축제가 어떤 카오스 상태에서 발현하는 기이한 에너지의 집약체일 수도 있다는 것을 태생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 저항과 창조, 공동체와 평화로 일컬어지는 록의 정신이 아쉬웠다는 기사들도 보였다. 이념적인 가치가 드러나지 않는 축제였다는 작은 비난들이었다. 록나고 이념났나, 아니면 이념나고 록이 났나. K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진 K는 가위로 조심스레 잘라놓은 초록색 팔찌에 묻은 진흙 냄새를 맡았다. 그건 축제의 냄새였고, 젊음의 냄새였고, 내년을 기약하는 첫발자국의 냄새였다. 그건 참 드물게도, 더럽고도 좋은 냄새였다.
그들은 언젠가는 좋았던 옛날을 그리워하겠지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렇게 말하기 좀 아프긴 하지만 나는 니가 머무르길 원해 이따금씩은, 때로는 말야 우리 젊었을 때, 이 친구야. 우리 재미있게 살았던가 -더 스트록스의 <Someday>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