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아니 종종 아카데미영화제를 보고 있자면 너무 진지해 몸이 뒤틀린다. 진행 미숙하고 쇼의 성격도 부족한 국내 영화제들은 보고 있으면 썰렁하고 지루해서 끝까지 버티기조차 어렵다. 그럴 때 생각한다. 미국의 라스베리영화제나 MTV 영화 시상식처럼 말장난과 농담(거기엔 때로 뼈아픈 비판도 담겨 있다) 일색의 웃기는 영화상을 우리끼리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마련했다. 2006 ME 무비 어워즈. 부제는 ‘지난 5년간 한국영화 최고의 연기 8선’이다. 2001~2005년까지 5년간(그리고 2006년 상반기를 살짝 더해서) 한국 영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8명의 배우를 뽑았다. 특별상 부문에 해당하는 노력상과 인기상을 포함해 총 10개 부문의 상 이름은 <ME>에서 마음대로 정했다. 독자 여러분들은 그냥 즐겨주시길.
최고의 베드신 연기상
송강호(<살인의 추억>) 황정민(<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작업 기술상은 이영애가 가져가는 대신 최고의 베드신 연기상은 두 남자배우 송강호, 황정민에게 돌아갔다. 수상 이유는 두 사람이 영화 속 베드신의 통념을 깨고 독창적인 연기를 보여주었기 때문.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 형사(송강호)는 용의자 색출 작업에 실패하고 돌아와 아내 곁에 눕는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아내와 화끈한 위로의 잠자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아내 가슴만 만지작대다 마는데, 이것은 바로(!) 연쇄살인범이 잡히지 않아 답답하고 막막한 형사의 심정이다. <내 생애…>에서 나두철 형사(황정민)는 술 취한 허유정(엄정화)을 모텔에 데려다 눕힌다. 돌아서서 가려던 그는 허유정의 치마가 말려 올라간 것을 보고 내려주려고 낑낑댄다. 허유정이 깼는데도 포기하지 않는다. 치한 취급을 무릅쓰면서까지 치마를 내려주려고 하는 나 형사의 모습은 순진하고 올곧은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 대목이다. 베드신에서 애욕 이상의 복잡한 심리를 담아내는 연기력이 서로 만만찮아 공동수상으로 결정.
최고의 눈빛 연기상
눈은 마음의 창. 그래서인지 배우들은 카리스마를 뿜을 때 눈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타고난 외모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눈을 활용하기 좋은 배우가 있으니 바로 장동건이다. 장동건의 부리부리한 눈매는 그저 평범히 뜨고만 있어도 부릅뜬 듯, 카리스마 방출 효과가 노력 대비 매우 큰 편이다. 거기에다 평소 현장에서 성실, 노력파로 잘 알려져 있어, 안 그래도 강렬한 눈매에 더욱 강렬한 카리스마를 담아내고자 그는 성실한 노력을 많이 기울이는 편이다. 가장 좋은 예가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와 <태풍>의 씬. <태극기…>에서는 6·25전쟁 중에 동생과 헤어져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게 된 형의 찢어지는 마음을 두눈에 간절히 담아냈고, <태풍>에서는 어릴 때 헤어진 누나를 되찾고 가족의 복수를 대신하는 일을 생의 목표로 삼은 청년의 뜨거운 마음이 이글이글 두 눈 바깥으로 타오른다. 눈동자의 크기로 봐서나 그것이 떨리는 힘으로 보아서나, 감히 또래 배우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눈빛 연기다.
최고의 거짓말 연기상
이병헌(<중독>)
모 도너츠 CF에서 이병헌이 보여준 달콤한 눈웃음은 달리 보면 바람둥이의 위험한 거짓말 내지 유혹 같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중독>에서 기가 막힌 거짓말 연기를 선보였다. 형수인 은수(이미연)를 사랑했던 대진(이병헌). 그와 그의 형 호진(이얼)은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나란히 교통사고를 당한다. 같은 병원에 후송돼온 형제의 운명은 엇갈려, 형은 죽고 동생은 산다. 아니 동생은 죽고 형은 산다. 아니, 그러니까…. 생존한 육신은 대진의 것이지만 구천에 남은 영혼은 호진의 것이다.
‘빙의’라고 설명되는 이 현상은 알고 보면 대진의 ‘뻥 연기’다. 은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함께 살고 싶어서 자기가 호진인 척ㅘㅇ 것이다. 그런데 대진은 자신의 거짓말에 지나치게 심취, 혼자 있을 때조차 모든 게 빙의인 척 연기한다. 의식불명에서 깨어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뻔뻔함. 이 캐릭터를 통해 거짓말 연기의 일가를 이룬 이병헌의 명성은 세 자매를 한번에 속여먹는 바람둥이(<누구나 비밀은 있다>)로 절정에 달했다.
최고의 ‘타고난’ 연기상
강동원(<늑대의 유혹> <형사 Duelist>)
‘신이 내린 연기’, ‘타고난 연기실력’, ‘천재적인 배우’ 등 배우의 연기력을 칭찬하는 표현은 종종 운명적인 느낌을 띤다. 캐릭터와 배우가 혼연일체되어 관객을 100%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 진정 훌륭한 연기력이라고 한다면, 운명으로 타고난 진짜 연기란 이런 것이다. 미남 배우의 꽃미남 연기.
이런 점에서 강동원은 최근 두편의 영화를 통해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놀라운 연기실력을 보여주었다. 싸움 잘해, 얼굴 잘 생겨, 인근 학교 여학생들의 사랑을 연예인만큼 받는 <늑대의 유혹>의 정태성. 깊고 애잔한 눈빛, 냉혹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가진 <형사 Duelist>의 ‘슬픈 눈’. 두 역할은 모두 강동원이 아니면 아무도 소화할 수 없고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심지어 ‘슬픈 눈’은 강동원이 연기하지 않았으면 역할 이름을 바꿔야 했을지도 모른다. ‘덜 슬픈 눈’이랄지 ‘즐거운눈’이랄지. <늑대의 유혹>과 <형사 Duelist>는 모델 출신 강동원이 자신의 ‘타고난 연기력’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배우의 위치를 확고히 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최고의 ‘작업 기술’ 연기상
이영애(<봄날은 간다> <친절한 금자씨>)
청초하고 순수한 이미지의 이영애는 막상 영화에서 의외의 이미지로 수를 던진다. “라면 먹고 갈래요?”(<봄날은 간다>) 한밤중에 라면을 먹고 가라니. 누가 들어도 이 말의 뜻은 ‘몹시 시장해 보이시는데 라면 먹고 가세요. 돈은 안 내셔도 돼요’가 아니라 ‘라면도 먹고 대화도 하고 피곤하면 잠도 자고 가세요’다. 영화 역사상 이렇게 은근하게 작업 거는 여자가 또 있었을까? 너무 쉬워 보이지도, 너무 고지식해 보이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쿨하고 적당히 친근한 척할 줄 아는 여우 은수.
이때만 해도 이영애에게 수줍음과 설렘이 있었다면 4년 뒤 <친절한 금자씨>에는 천연덕스러움밖에 남아 있지 않다. 대략 10살 연하인 빵집 아르바이트생과 하룻밤을 보내는 금자 아줌마. 볼 일을 마친 다음 뚱한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물고 말한다. “난 괜찮았는데, 넌 어땠어? 좋았어?” 수준이 이 정도에 이르면 굳이 라면은 필요없는 거다.
최고의 악역 연기상
유승호(<집으로…>)
최소한의 도덕관념이나 상식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의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사악해지기 일쑤다. <집으로…>의 상우(유승호)는 그런 점에서 아주 사악한 인간형이다. 상우는 일흔 넘어 시골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에게 짜증과 투정으로 일관한다. 그에 반해 할머니는 손주에게 한없는 사랑만 베푼다. 상우의 어떤 모습도 감싸주고 받아주고 이해해주고자 한다. <집으로…>는 이 두 캐릭터의 관계가 가지는 습성을 100% 활용한 멜로드라마다.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는, 부모나 조부모에 대한 불효의 기억을 날카로운 바늘 끝으로 건드리는 것, 그리하여 관객들에게서 죄의식이 바탕에 깔린 눈물을 끌어내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기 때문에 상우는 거의 절대악에 가까운 캐릭터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점들을 판단할 나이가 아니었던 유승호는(그는 영화 촬영 당시 열살이었다) 오직 상우의 심정으로, 할머니께 죄송한 마음으로 연기했을 터다. 배우의 계산되지 않은 순수함이 더해져서 <집으로…>의 상우는 한국영화 최연소 악역 캐릭터(심지어 주인공인데 악역이다)로 탄생하게 되었다.
최고의 ‘2년차’(sophomore) 연기상
이준기(<왕의 남자>)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일이지만 <왕의 남자>가 만든 스타 이준기는 영화 <발레교습소>로 데뷔했다. 변영주 감독의 청춘영화 <발레교습소>는 가수 윤계상의 영화배우 데뷔작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영화에서 이준기는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모습과 전혀 상관없는 이미지의 캐릭터로 등장했다. 강민재(윤계상)의 친구 장동완(이준기)은 발레가 좋아서 아버지 몰래 발레교습소를 다니는 고등학생. 친구들 사이에서는 눈치가 있다가도 없는,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평범한 녀석이다. <왕의 남자>의 공길을 시작으로 석류음료 CF나 휴대전화 CF, 의류 CF 등에서 이어지는 이준기의 메트로섹슈얼한 이미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캐릭터이며, 이준기라는 신인에게 현재와 같은 스타성이 숨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을 캐릭터다. <왕의 남자>가 첫 영화였다면 이준기는 틀림없이 국내 영화제 신인상을 휩쓸었을 것이다. 흔히 첫 작품에서 성공을 거두고 두번째 작품에서 제자리걸음을 보이는 ‘서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라는 현상이 존재하지만 이준기에겐 반대로 두번째 작품에 대운이 찾아왔다.때문에 상의 명칭도 ‘서포모어 행운상’이 적절하지 않은가 싶었으나 공길 역으로서 본인이 다한 최선 역시 오늘날 스타덤의 또다른 바탕이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연기상’으로 결정했다.
최고의 외국어 연기상
이영애(<친절한 금자씨>)
금자씨는 외국어 배우는 데 다소 천재과로 보인다. 외국으로 멀리 입양 보냈던 딸과 재회할 당시 처음엔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나눴던 그녀다. 가령, “엄마, 왜 나를 버렸어?” “그래 내일 소풍 가자” “한국어로 엄마가 뭐야?” “금자씨” 이런 식이다. 이랬던 금자는, 딸이 남긴 영문 편지의 깊은 의미를 영한사전 한권 뒤지는 것만으로 해결을 본다. 작문에 비해 회화에는 다소 약해서 백 선생을 불러다 동시통역을 요구하기는 하지만, 금자씨는 딸에게 “아임 소리”를 세번 이상 함으로서 딸이 원하는 사과를 영어로 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십수 년 만에 상봉하는 엄마와 딸. <친절한 금자씨>의 영어-한국어 간 의사소통은 상처와 죄와 복수로 벌어진 모녀 사이의 거리를 뜻하는, 매우 중요한 비유법이다. 이영애의 금자씨는 작문과 회화와 통역의 적절한 혼용으로 외국어 연기를 탁월하게 소화해낸다. 이영애와 마지막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인 후보들로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외국어에 가까운 강원도 사투리를 구사한 강혜정과 <태풍>에서 러시아어와 타이어와 조선족 사투리 등 3개 외국어를 동시 구사한 장동건 등이 있었다.
특별상 부문
노력상/ 감우성(<왕의 남자>)
어느 배우라고 노력하지 않겠냐마는 <왕의 남자>의 광대 장생 역의 감우성은 ‘육체’ 노력상을 필히 받아 마땅하다. 그는 생전 흉내도 내본 적 없는 묘기를 이 영화에서 몸소 보여주기 위해 안성 남사당 전수관에서 줄타기를 배웠다. 높이 50cm 위의 줄에서 걷던 그는 약 열흘 뒤 와이어를 매달고 실제 광대들이 줄타기하는 높이에서 방향 바꾸기, 점프 등의 묘기를 하게 되었고 와이어 없이 10m를 걷는 데에도 성공했다고 한다. 연습 시작하자마자 낮은 줄에서 7m를 걸어갔다는 전설도 현장에 떠돌았다.
줄타기뿐 아니라 꽹과리 등 광대들의 사물놀이도 연습했는데 감우성은 꽹과리 치는 걸 가장 “우습게 봤었다”고 한다. “오른손으로는 치고, 꽹과리를 든 왼손은 소리를 잡아주는데, 기타로 애드리브하듯 하는 거죠. 그게 해본 사람 아니면 안 돼요.” 하다 보니 줄타기도 대단한 걸 알겠다며, “먹고살기 힘들다”는 소감을 현장에서 밝혔다.
인기상/ 신현준 (<킬러들의 수다> <블루> <황산벌> <페이스> <달마야, 서울가자> <무영검> <가문의 위기: 가문의 영광2> <맨발의 기봉이>)
2001년부터 2005년, 플러스 2006년 상반기까지 지난 5년 반 동안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왔음에도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의 운이 따르지 않았던 배우 신현준이 ME 무비 연기상 인기상을 차지했다. 1990년 <장군의 아들>에서 일본인 하야시 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신현준은 강렬한 눈매와 인상으로 <은행나무 침대> <태백산맥> <퇴마록> <비천무> <싸이렌> 등 주로 심각한 역할에서 두각을 나타내왔다.
신현준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미지 방향을 급선회한다. 작은 계기는 장진 감독의 <킬러들의 수다>.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나사 빠진 킬러 캐릭터를 거쳐서 그는 <달마야, 서울가자> <가문의 위기: 가문의 영광2> 그리고 최근 <맨발의 기봉이>까지 코미디 연기 분야에 또 하나의 탑을 쌓는 중이다. 코미디가 관객과 가장 친근하게 소통할 수 있는 장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신현준의 인기상 수상은 적절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신현준은 현재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과 <가문의 부활: 가문의 영광3>라는 두편의 코미디 물을 촬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