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독일인 안나는 완전한 망각을 소망한다. 누더기 같은 조각 기억들마저 힘겨운 사람에게 자아나 정체성은 잘못 배달된 초대장, 겉장만 단정한 쓰레기일 뿐이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자기의 영혼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그래서 어떤 호명도 거부한 채 허깨비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다행히 <나비>의 무대인 가까운 미래의 서울엔 망각의 바이러스가 살고 있고, 영리한 장사꾼들은 망각 바이러스를 찾아떠나는 패키지 여행상품까지 마련해두었다. 독일에서 온 안나를 가이드 유키와 운전사 K가 맞는다. 납중독자인 유키는 의사의 심각한 경고에도 7개월 된 아이를 지우지 않았다. 과거를 잃어버린 K는 기억을 찾아줄 친지를 찾고 있다. 망각의 바이러스를 나비가 인도하며, 나비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지독한 산성비가 내린다.
세 사람의 젖은 겨울옷 같은 여정이 시작되지만, 그들이 찾는 망각의 바이러스는 눈앞에서 자꾸만 사라진다. 대신 세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조금씩 알아간다. 유키는 안나의 배의 깊은 흉터를 쓰다듬고, 안나는 유키의 어두운 과거와 아이에 대한 집착을 조금씩 수긍한다. 안나는 이렇게 독백한다. “그녀는 내가 끝낸 곳에서 새로 시작하려 한다.” 야비한 K는 두 여인의 모습에서 유사 가족의 흔적을 발견한다. 두 사람의 도움으로 유키는 바닷가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죽는다.
<나비>에선 2000년 서울의 모습 그대로가 별다른 치장없이 온기없는 미래공간으로 옮겨진다. 때론 씻어내야 할 독과 한기로, 때론 양수처럼 따뜻한 보금자리로, 때론 고통스런 영적 세척제로 탈바꿈하는 물의 유동하는 이미지에 실려, 이 낯설고 낯익은 공간은 오염된 자궁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자궁으로부터의 도피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머물수록 더욱 병들어간다. 이런 곳에서도 망각과 무뇌의 길 대신 실핏줄 같은 희망이라도 있진 않을까. <나비>는 그걸 조심스럽게 묻고 있다.
▶ 문승욱과 <나비>
▶ <나비>는 어떤 영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