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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욱과 <나비>
2001-08-31

이방인, 길끝에서 길을 찾다

실패한 데뷔작 <이방인>에서 로카르노가 축복한 <나비>까지, 문승욱 감독의 고단한 영화 만들기

올해 부천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됐던 문승욱 감독의 <나비>가 지난 8월12일 막을 내린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청동표범상(여우주연상)과 젊은 비평가상을 함께 받았다. 로카르노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배용균 등 각국의 뛰어난 재능을 발견해온 54년 전통의 영화제다. 해외영화제 수상이 많은 걸 해결해주진 못하지만, 적어도 문승욱 감독처럼 자기 표현으로서의 영화를 만들며 영화산업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에겐 큰 힘이며 축복이다. 문승욱 감독에게 <나비> 만들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편집자

문승욱 감독은 <나비>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데뷔작 <이방인>(1998)이 실패한 지 2년. 윤기나는 이야기도 일급 스타도 없는 그늘에서 그는 두 번째 영화의 첫 릴을 힘겹게 끼우고 있었다.

첫 발자욱을 잘못 내디뎌 엉뚱한 길로 접어든 등반객이 선택할 수 있는 코스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정규 등반로로 추정되는 곳을 향해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위험부담은 있지만 성공한다면 보답은 따뜻할 것이다. 문승욱 감독은 남은 다른 코스를 선택했다.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데뷔작 <이방인>이 실패한 지점으로 돌아갔다. 왜, 어디서 어긋났을까. 인물들은 굳은 빵처럼 딱딱해지고, 이야기는 생기없는 관념의 나열이 돼버린 이유가 무엇일까.

“<이방인>은 찍을 때부터 고통스러웠다. 자유롭고 싶은데, 너무 많은 제약 속에 갇혀 꼼짝 못하고 있었다. 제약의 정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프레임 밖에서 안성기씨는 아름다웠지만, 막상 난 그걸 하나도 프레임 안에 담지 못했다. 인물이 자꾸 죽어버렸다. 누굴 탓할 수 없도 없었다. 죽고 싶었다.”

리얼하지 않아도 좋다

<나비>는 근미래의 서울을 무대로 다시 찍은 <이방인>이다. 황량한 바르샤바 거리를 걷던 한국인 태권도 사범의 빈 어깨는, 완전한 망각을 위해 서울을 방문한 한국계 독일인 안나의 눈 그림자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이방인>의 실패 직후 때맞춰 찾아온 수해로 익숙한 것들을 쓸려보내고 나서 문승욱 감독은 세상이 더 낯설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아닌가”라는 김현의 말을 떠올리며 근미래 이방인의 우울한 여정을 <나비>에 담겠다고 마음먹었다. 자기의 영혼으로부터 유배되기를 청하는 한 여인의 짧은 여행기 <나비>는 그렇게 시작됐다.

“모든 게 깜깜했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한번이라도 하고 싶었다. 김현과 함께 카프카와 보르헤스를 읽었다. 리얼하지 않아도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알레고리의 힘을 발견했다. <페스트>에서 바이러스의 힌트를 얻어 <나비> 이야기를 만들었다. 상황이나 설정은 바뀌었지만, 난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기 불편하고 어두운 이야기를 들고 출발선으로 되돌아온 굼뜬 감독을 반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를 거절한 제작자들 중 하나는 이렇게 권했다. “시나리오 고칩시다. 스타도 쓰고, 20억원짜리 영화로 갑시다.” 이런 제안이 귀에 들어오지 않은 건 아마도 그렇게 하기 싫거나 그럴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너무 낯설어서였을 것이다. 충무로에서도 그는 이방인이었다. 디프로덕션을 만나 제작의 기회가 어렵게 찾아왔을 때, 그는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유롭고 싶었다. 많은 기회가 남아 있다면 몰라도, 이게 마지막이라면 정말 자유롭고 싶었다.”

<나비>는, 영화가 그림이나 시처럼 자기 표현의 또다른 양식이라고 믿는 고지식한 감독이 첫 출발의 자세로, 동시에 마지막의 예감으로 완성한 그의 두 번째 영화다. 많은 사람과 즐겁게 소통하진 못하겠지만, <나비>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조차 낯선 사람들에겐 더운 손을 내미는 마음의 영화다.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이 무명의 영화가 젊은 비평가상과 여우주연상(김호정)을 받았을 때, 감독의 머리를 스친 생각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한편 아니 몇편 더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감독님, 우리 영혼은 왜 황폐하게 만드시나요”

어떤 감독은 부자유를 즐긴다. 많은 감독들은 적어도 부자유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영화는 자유롭지 않다. 그것은 구속과 제한의 예술이다. 그래서 앙드레 바쟁은 “진정한 예술적 창조행위는 다른 분야에서보다 영화에서 훨씬 불확실하고 상처받기 쉽다”고 했다. 감독에게 무한의 재량권이 주어졌을 때조차 적어도 수십명의 스탭과 출연진의 몸과 마음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 적은 제작비로 자유롭기를 원하던 문승욱 감독에게 디지털은 거의 유일하게 허락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1999년 겨울에 폴란드에 갔다. 거기서 디지털로 찍은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을 봤다. 충격이었다. 인물들이 살아 꿈틀거렸다. 그건 <이방인>에서 내가 실패한 점이기도 했다. 필름으로 아주 잘 찍은 몇몇 폴란드영화들을 보고는 구역질이 났다. 죽은 영화들이었다. 디지털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필름은 미장센 강박증을 낳는다. 프레임 안의 모든 요소를 아름답게 혹은 의미있게 만들 것. 그 강박증이 영화의 미모와 지성을 드높인 에너지였지만 때론 영혼이 사라진 겉멋의 그림을 낳기도 했다. 미장센과 인물을 모두 살릴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문승욱 감독은 미장센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직 충분한 공간의 깊이를 필름만큼 담지 못하는 디지털 기술의 한계는 오히려 그 때문에 인물에 더욱 집중하게 할 것이다. “영화제에서 중국감독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중국에서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건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는 영화라는 매체의 훌륭한 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르다. 영화의 처음은 인간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미장센은 그 다음이다. <나비>는 <이방인> 때의 어설픈 미장센 집착을 버리고 다큐멘터리의 느낌으로 찍어야 했다. 그건 디지털의 강점을 가장 잘 살리는 길이기도 했다.”

디지털카메라는 자유롭다. 한손에 잡히는 이 경량의 요물은 원하는 때 원하는 대상을 셔터의 단순조작만으로 포착한다. 그러나 이 자유로움은 동시에 배우들의 부자유를 의미한다. 촬영이 시작된 시점부터 배우는 어쩌면 자신의 잠든 모습까지 카메라에 빼앗길지 모른다. 연기가 아닌 발작적 짜증과 추한 찡그림조차 감독은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디지털은 잔인하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조차 어느새 침입한 카메라에 빨려드는 배우에겐 특히 잔인하다. 디지털카메라 100대가 동원된 <어둠 속의 댄서>를 찍을 때, 나중에 보는 이를 무방비의 오열로 몰고간 주연배우 비욕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멱살을 잡았으며, 칸영화제에 와서도 감독과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인상의 문승욱 감독도 잔인한 디지털의 능력을 독하게 구사했다. <나비>의 주연배우 김호정은 감독이 우는 장면에서 극단적인 감정으로 몰아가서 탈진하도록 만들고도 “잘했어요. 하지만 한번 더 갑시다”라고 말했을 때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문승욱 감독은 콘티를 만들지 않았고 구체적인 연기를 거의 지시하지 않았다. 디지털의 장기를 무기삼아 자신이 설정한 상황에 배우를 던져놓고 반응의 극대점을 포착하는 사악한 길을 택한 것이다.

택시를 황급히 빠져나온 안나가 길을 잘못 접어들었다가 납중독자를 쫓는 경찰 무리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이 있다. 감독은 촬영 때 김호정에게 구체적인 정보를 주지 않았다. 개략적인 동선만을 지시한 채, “앞으로 벌어질 일에 그냥 반응하세요”라고만 말했다. 뜻밖의 봉변을 당한 김호정은 그 장면 촬영이 끝나고 한참을 움직이지 못한 채 멍하게 주저앉아 있었고, 감독의 얼굴을 마주보지 않았다.

캐릭터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 뛰어난 배우들이 정서의 난기류에 휘말리는 건 좋은 캐릭터 영화의 제작기에선 낯설지 않지만, 디지털카메라는 그 기계적 권능으로 배우의 의지 위에 군림하며 영화 안과 밖의 경계를 흐려놓는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으며 배우도 스탭도 감독의 본능과 직관에 착취당한다. 한 스탭은 “감독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영화를 찍는다면서 우리 영혼은 왜 이렇게 황폐하게 만드시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촬영 전부터 우리가 얼마나 감정이 상하게 될지는 나도 김호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백치들>을 김호정에게 보여줬을 때, 그녀는 전율했다. 배우들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군요, 라고 말했고 나는 우리도 그렇게 찍을 거라고 대답했다. 김호정은 대단히 지적인 사람이었고, 나의 의도를 거의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렇지만 막상 촬영중엔 격렬한 감정의 기복을 막기도 달래기도 힘들었다.”

김호정, 안나의 가이드 유키 역을 맡은 강혜정, 택시기사 K 역의 장현성은 촬영 전 두달 동안 리허설을 거쳤다. <나비>의 리허설은 단 한번의 독회말고는 캐릭터와 카메라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거의 전부였다. 특히 어린 강혜정은 남자친구와 만날 때, 쇼핑을 할 때도 카메라가 따라다녔다. 무엇보다 세 사람은 리허설 동안 친해져야 했다. 촬영중에 일어날 감정의 동요를 감독 혼자서 막기란 힘든 것이다. 문승욱 감독은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악한 조종자가 될 것이며, 배우들은 육체도 정신도 피폐해질 것임을. 1월의 부산 송도에 이뤄진 마지막의 바닷가 출산장면에서 세 배우는 자신들이 모든 걸 스스로 만들어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런 연기는 감성뿐만 아니라 지성의 힘이다. “이 배우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문 감독은 말했다.

작가주의, 관객을 기다린다

<나비>는 정체성과 기억을 문제를 다룬 영화치곤 구성이 단순하다. 망각의 바이러스를 찾아떠나는 여행이 의미하는 바도 너무 명료해서 상징의 묘가 돋보이는 편도 아니다. 하지만 <나비>는 시간이 흘러도 인물들의 이미지를 지우기 힘든 영화다. 안나가 말없이 비행기 좌석에 앉아 깊은 눈으로 서울 거리를 내려다보는 첫 장면에서부터, 물장난을 치며 처음으로 얼굴의 그늘을 지우고 환하게 웃거나 파르르 떨며 샤워장 구석에 구겨지듯 웅크리고 있을 때 서사에 의존하지 않고도 찰나의 관찰로 인물의 내면을 보는 이의 마음에 단숨에 실어나르는 영화라는 매체의 타고난 능력을 새삼 수긍케 된다.

<나비>는 픽션의 형식적 자질이 아니라 인물 다큐멘터리의 육체성으로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영화다. 성긴 이야기 속에서도, 거친 톤의 연결 와중에서도, <나비>의 주인공들은 좋은 인물화가 그렇듯 우리가 잊고 있는 우리의 가장 초라한 자아에 손을 내민다. 문승욱 감독은 많은 걸 버리고 나서 인물의 체온을 자기 방식으로 스크린에 옮기는 길을 찾아냈다. <이방인>의 실패 지점으로 돌아온 건 적어도 그에겐 가장 바른 선택이 됐다.

문승욱 감독이 버린 건 리얼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비>는 따지고보면 SF지만 어떤 세트도 없이 로케이션만으로 근미래의 무대를 담았다. 비결은 단순하다. 고다르가 <알파빌>을 찍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냥 오늘의 서울을 찍고 이것이 미래라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어설프게 조작하면 비웃음거리가 되겠지만, 아예 포기하면 보는 사람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의도된 억지는 얼마간 제작진의 경제적 빈곤을 감추지 못하지만 미장센의 빈곤으로 보이진 않는다. <나비>에 담긴 서울과 부산의 거리, 일본의 고베와 간사이공항은 국적도 시대성도 증발한 현대 도시공간의 탐색이기도 하다. <나비>는 작가주의 SF의 방식, 저예산영화의 지혜를 보여준다.

“서울을 보여주고 싶었다. 서울은 지금 모습 그대로 디스토피아다. 난 그렇게 느낀다. 빨리 잊혀지고 무너지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 부산도 그렇다. 한국 도시들은 그렇게 지어졌다. 고베는 지진 뒤로 거의 새로 건설됐다. 우리는 이 공간 모두에 속해 있고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 특별한 세트가 필요하지 않았다.”

문승욱 감독은 대만감독들처럼 미학적으로 매우 뛰어나지만 자국의 관객과 소통하지 않는 길을 원하진 않는다. 일본의 자주영화 감독들처럼 소수나마 자국 관객과 호흡하면서 활동범위를 넓혀나가고 싶어한다. <나비> 프로젝트가 거부당할 땐 틈새없는 성처럼 보였던 충무로도 아직은 많은 여지와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과도기의 세계다. <이방인>은 어느 지점에선지도 모르게 무너져버렸지만, <나비>는 배우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포착하겠다는 데뷔작 때의 소망을 이뤘다. “이젠 힘있는 내러티브를 만들고 싶다”고 문 감독은 말했다. 문승욱이 새로 만든 데뷔작이라 해도 좋을 <나비>는 10월에 국내 개봉한다.

글 허문영 기자 [email protected]·사진 오계옥 기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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