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무사> 제작일지
2001-08-24

<무사> 제작일지 (1)

프롤로그

영화 <무사>의 시작은 1997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비트> 후반작업을 할 때 김성수 감독이 “한 무리의 무사들이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이야기를 하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처음 했다. <용문객잔> <유성호접검> 같은 무협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좋다”고 말했지만 그런 영화를 언제 찍게 될지는 몰랐다. <태양은 없다>를 개봉하고 감독이 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 “지난번에 내가 했던 얘기 기억하냐? 그 영화, 성을 짓고 찍었으면 좋겠어”라고. “응,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뭐.” 건성으로 듣고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두려움이 밀려왔다. 성을 짓는다고? 이 양반이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 감독이 입버릇처럼 칭찬하는 영화 를 봤다.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엔 장풍도 없었고 칼바람도 없었다. 내가 생각한 무협영화와는 전혀 다른 액션이 아닌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에 끼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9년 2월 <쉬리>가 흥행신기록을 향해 질주하면서 제작비 30억원 규모의 대작도 가능한 여건이 조성되는 걸 느꼈다. 그 무렵 감독이 고려사에서 중요한 단서를 하나 찾았다고 말했다. 원말 명초의 혼란기에 중국에 갔던 고려 사신 일행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무사>라는 제목도 그때 나왔다. 한 가지 희망이 생긴 건 감독이 자기가 생각한 성이라며 그려온 그림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성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해안토성이다. 혹시 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하 TV드라마의 세트작업을 많이 했던 청솔아트센터에 가서 성을 지을 수 있겠냐고 문의했더니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곳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1999년 9월, 감독이 태흥영화사에서 먼저 찍기로 했던 영화가 안 될 거 같다며 본격적인 준비를 요청했다. 그해 10월 처음 중국에 갔다. 정말 <무사>를 시작하게 될 줄이야.

1999년 10월

베이징에서 첸카이거의 <현위의 인생> <패왕별희> 등을 만든 중국 프로듀서 장시아를 만났다. 이렇게 작고 호리호리한 아줌마가 <패왕별희> 같은 대작을 만들었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동사서독>을 찍었다는 위린에 가는데 흉흉한 소문을 들었다. <동사서독> 찍을 때 산적들이 나타났고 조명기를 도둑맞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 외국인 출입금지구역인 이곳에는 3개의 관문이 있다. 자칫 잘못 걸리면 벌금을 물어야 하지만 담배 한갑으로 무사 통과할 수 있단다. 안내를 한 친구가 한국인이 이곳에 방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막상 도착한 위린은 훌륭했다. <무사>를 찍는 데 필요한 사막과 계곡이 모두 있었다. <무사>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2000년 1월

조동호 조감독과 은천에 갔다. 편의시설이 거의 없는 위린에 비해 비교적 큰 도시여서 괜찮겠다는 판단을 했다. 근처에 사막이 있냐고 물어보니 가까운 곳에 있다고 했다. 막상 차를 타고 가보니 3시간30분이 걸렸다. 중국인들은 그 정도를 가깝다고 말한다. 우리랑 거리 개념이 다른 게 실감났다. 싼관, 중웨이 등 드라마의 전반부가 펼쳐질 공간을 찾았다.

2000년 2∼7월

베이징에 아파트를 얻고 베이징제편창에 사무실을 임대했다. 17평 아파트에서 연출부 4명, 제작부 3명, 중국유학생 3명, 감독과 나 모두 12명이 수용소 같은 생활을 시작했다. 베이징영화학교 출신 김필정으로부터 부용 공주 역으로 장쯔이가 괜찮을 거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집으로 가는 길>을 보고 매력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장예모가 제2의 공리로 키우고 있는데다 리안과 <와호장룡>을 찍고 있다는 것이다. 5월에 칸영화제에서 <와호장룡>을 본 노종윤 이사가 전화를 했다. 장쯔이를 캐스팅하면 좋을 거 같다는 얘기였다. 서극의 <촉산전>을 찍고 있는 장쯔이를 처음 만났다. 그 전에 오천련, 양영기, 이가흔 등 홍콩 여배우를 여럿 만났지만 장쯔이가 느낌이 좋았다. 감독도 부용 공주 이미지로 어울린다고 말했다. 2번째 만남을 가질 때 장쯔이가 자기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보자고 하자 중국쪽 프로듀서를 맡기로 한 장시아가 장쯔이 캐스팅에 반대했다. 감독과 제작자에게 ‘이리로 오라’고 요구한 것부터 맘에 안 드는데다 <와호장룡> 촬영장에서 리안 감독이나 스탭과 사이가 안 좋았다는 소문이 있다고 했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감독과 한번만 더 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역시 소문은 실제보다 부풀려지는 법인가보다. 감독과 난 둘 다 만족했다. 며칠 뒤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장쯔이의 출연계약서에 ‘하루 12시간 수면을 보장할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다. 언제 24시간 촬영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크랭크인이 2달 앞으로 다가온 상황이라 지금 와서 배우를 바꾸기도 힘든 상황이지만 이런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순 없었다. 일부러 “배우를 바꿀 거 같다”는 소문을 냈다. 사흘 뒤 장쯔이가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 정말 <무사>를 꼭 찍고 싶었나보다. 그녀는 매니저가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내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장쯔이의 시원스런 태도가 맘에 들었다. 6월 말 미술감독 후팅샤오가 씽청에서 토성을 지을 공간을 찾아냈다. 직접 가서 보니 구릉과 바다가 예전에 감독이 구상했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토성이 들어설 곳에 있던 어장을 철수시키기로 하고 씽청현과 협의에 들어갔다. 토성을 지어 현에 기증할 테니 길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제 영화를 찍을 공간과 배우가 확보됐다.

2000년 7월31일

심하게 나흘을 앓았다. 힘겹게, 힘겹게 준비해오면서 많은 불안감이 한꺼번에 덮쳐오면서 감기가 왔나보다. 오랜(?) 준비를 했다지만 부족한 것 투성이다. 시나리오, 콘티, 의상, 기타 셀 수 없이 많은 복병들이 영화 <무사>의 행군을 가로막겠지. 아이들이 그리운 저녁, 작은 미열들이 이마에서 재잘거린다. 몸이 고단할수록 그리움이 자란다.

2000년 8월3일

당초 8월1일로 잡았던 고사를 연기해서 오늘 지냈다. 중국 스탭들이 8월1일은 재수없는 날이라며 고사일을 미루자고 제안한 탓이다. 그런 게 어딨어, 하고 밀어붙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현장에선 공연한 일로 스탭들을 자극하거나 불안하게 만들면 안 된다. 괜히 8월1일로 고집했다가 행여 사고라도 나면 ‘재수없는 날, 고사를 지내서 그랬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영화 <무사> 되게끔 하시고 항상 행운이 떠나지 않게 하시고 거듭거듭 안전하게 하옵소서.” 내가 쓴 제문의 구절대로 ‘안전’을 다시 기원해본다.

2000년 8월6일

베이푸투어에서 첫 촬영에 들어갔다. 남경성에 들어가려는 고려 사신 일행을 명나라 관리들이 저지하는 장면. 엑스트라, 스탭을 합쳐 400여명이 동원됐고 말만 60마리다. 감독이나 나나 이렇게 규모가 큰 장면을 찍어본 적이 없다보니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카메라 3대를 세팅하고 엑스트라를 통제하는 데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새벽부터 준비했지만 11시30분이 돼서 처음 카메라가 돌아갔다. 과연 이렇게 찍어서 일정대로 마칠 수 있을까?

2000년 8월9일

“워쓰 가오리.” 현장에는 늘 유행어가 생긴다. <무사> 현장의 첫 번째 유행어는 “워쓰 가오리”다. “나는 고려인”이라는 뜻이다. 영화에서 최정 장군(주진모)이 명나라 군사와 마주칠 때 하는 대사인데 주진모가 이 대사를 할 때마다 스탭들이 계속 웃는다. 주진모가 연기를 할 때 누군가 옆에서 “앗싸 가오리”라고 말하자 감독도 스탭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정우성과 감독이 주진모에게 장난을 친다. “워쓰 가오리, 앗싸 가오리.”

2000년 8월14일

사막장면을 찍기 위해 베이징에서 중웨이로 이동했다. 기차로 꼬박 23시간, 차로 4일이 걸리는 대장정. 달리 수송할 방법이 없는 말 50필은 4일간 서서 중웨이까지 왔다. 베이징과 달리 이곳에 오자 카메라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A, B조로 나눈 카메라는 A조가 주연배우들이 연기하는 장면을 찍고 B조가 인서트 장면이나 특수효과 장면을 찍는다. 한낮엔 50도까지 올라가는 폭염이지만 일단 가속이 붙은 카메라는 종횡무진이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사막을 횡단하는 지친 고려인들을 찍자니 스탭들이 바빠질 수밖에 없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은 무더위지만 뛰지 않으면 안 된다. 화면에 보이는 위치에 발자국이라도 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사막은 정오부터 2시까지 워낙 반사가 심해 화면에 허옇게 나와버린다. 하지만 오후 4시부터 해질 때까지 사막은? 오, 정말 아름답다. 하루중 광선이 제일 좋은 시간, 이걸 놓칠 순 없다. 스탭들이 자기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자 답답해하며 감독이 소리친다. “야! 지금 우리 발버둥 시간이야. 발버둥쳐도 찍을까 말까 한데 이렇게 느리게 움직일래?” 누군가는 이걸 ‘지랄샷’이라고 했다. 한 컷을 건지려는 몸부림이 처절하다.

2000년 8월16일

드디어 중국 스탭들이 허옇게 질렸다. 분명 우리를 ‘미친놈’이라고 여길 것이다. 우리 모두가 모래폭풍 속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모래폭풍을 처음 발견한 건 감독이다. “저게 뭐지?” 하는 말을 듣고 감독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까 뭔가 회오리 같은 게 멀리 보였다. 바람이 만든 모래기둥이 분명했다. 중국 스탭들은 그걸 보고 철수를 준비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극중 이지헌 부사로 나오는 송재호씨가 한마디했다. “하늘이 주신 기회야. 강풍기 100대를 동원해도 저런 효과는 못 낼 거야.” 모래폭풍장면은 원래 시나리오에 있었고 강풍기를 동원해 찍기로 예정했던 대목이었다. 그러나 감독의 눈을 보니 벌써 결심이 선 게 분명했다. 난 제작부를 불러 스탭들에게 고글과 마스크를 나눠주라고 했다. 달리 지시할 게 없었다. 감독이 뛰기 시작하자 스탭, 배우 모두 일제히 뛰었다. 모래폭풍 속으로. 카메라를 멀리 세워놓고 찍는 장면이라 대역배우를 쓰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송재호씨가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연기자 중 최연장자가 그렇게 나오는데 누가 대역을 쓰겠는가? 모래폭풍은 대단했다. 말하려고 입을 벌리면 입 속으로 한 움큼 모래가 들어갔고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배우들은 연기를 했고 김형구 촬영감독은 다양한 앵글로 모래폭풍장면을 찍었다. 특수효과로 결코 만들 수 없는 장면이 정말 실감나게 찍혔다. 그걸 목격한 중국스탭들 표정은 가관이었다. 다른 영화처럼 여유부리며 찍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걸 비로소 실감했다는 듯 절망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쟤들 실력은 어떤지 몰라도 악과 깡은 남부럽지 않은 애들’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진정 한국 영화인의 기개를 중원에 떨치고 있다!

2000년 8월25일

사막장면을 찍은 중웨이에서 이동해 은천의 스웨이똥코에 왔다. 몽고보다 조금 아래 있는 중국의 내륙지방인 이곳은 황사현상의 근원지라고 한다. <무사> 촬영팀에 대한 환영인사인지 정말 채 몇 컷도 찍기 전에 심상찮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에 실려오는 모래가 옷 속으로, 코로, 입으로, 귀로 하염없이 밀려들어온다. 가지고 있던 수건으로 눈, 코, 귀를 꽁꽁 싸매고 일부 스탭은 랩으로 얼굴을 포장했지만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마침내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오늘은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2000년 8월26일

헌팅할 때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라고 해서 택한 지역인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려고 보니 여기저기 푸릇푸릇 풀이 돋고 있다. 제작부와 창공(중국의 현장잡역부)들의 오늘 임무는 카메라 방향에 있는 풀을 뽑는 일. 발자국을 내지 않기 위해 신발까지 벗고 다들 풀뽑기에 정신이 없다. 어제 황사현상 때문에 찍지 못한 밤장면을 찍으려 장소를 옮겼는데 이번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기 시작한다. 벼락은 무서운 속도로 현장을 향해 다가왔다. 수십번 벼락이 치더니 마침내 돌멩이만한 빗방울이 떨어진다. 결국 다시 철수.

2000년 8월27일

일주일새 세 번째 24시간 촬영이 이어진다. 계속되는 밤촬영과 악천후 때문에 일찍 철수한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새벽 6시 기상해서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촬영이 진행된다. 일주일 동안 하루 빼놓고 매일 밤새우고 3번씩 24시간 촬영을 하려니 탈진한다. 게다가 사막의 밤추위는 뼛속으로 파고든다. 일출장면까지 찍고 촬영이 끝난 시간은 오전 7시. 숙소에 들어가면 8시인데 오후 2시에는 다시 기상해야 된다.

2000년 8월28일

오늘도 역시 밤촬영. 어디선가 낯익은 노랫소리가 들린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은 모니터 앞 작은 오디오다. 김추자의 노래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감독, 배우, 스탭 할 것 없이 다들 잠시 감상에 젖는다. 안성기 선배가 정서 함양을 위해 사서 현장에 기증한 작은 오디오가 삭막한 현장의 짧은 휴식을 달콤하게 휘감는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꽹과리 소리가 들린다. 웅성거리는 사람소리도 그치지 않는다. 제작부장을 급파해 진상을 파악해보니 근처 농민들이 옥수수밭을 훼손하는 멧돼지를 쫓는다고 내는 소리란다. 그들 중 가장 어른격인 사람에게 200원(한화로 약 3만5천원)을 주고 조용히 해달라고 했다. 다시 평화가 찾아들었다. 다음날 이 사람들은 다시 꽹과리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라, 돈을 좀더 뜯어내겠다는 거구나. 하지만 이젠 필요없다. 우리는 사운드 없는 장면을 찍고 이곳을 철수했다. 그곳 농민들의 태도가 조금은 귀엽다.

2000년 8월30일

타올러로 이동해 한달 만의 첫 휴식을 맞는다. 스탭들이 쉬는 동안 나와 감독, 촬영감독, 조명감독, 미술감독은 객잔장면을 찍을 세트에 갔다. 미술감독 후팅샤오에게 외부만 찍을 테니 겉만 멀쩡한 객잔세트를 만들면 된다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내부까지 완벽한 세트를 만들어놓았다. 의자며 탁자도 오랜 세월 그곳에 있던 것처럼 손때가 묻어 있고 진흙벽에 그을음까지 만들어놓았다. “왜 이랬냐”고 물어보니 한다는 대답. “감독들은 겉만 찍는다고 해놓고 갑자기 안을 찍기도 하지 않는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지독한 완벽주의자인데다 놀라운 솜씨를 갖고 있다. 객잔을 보니까 호금전의 <용문객잔> 한 장면이 생각난다. 화살이 날아오면 술병에 담아 되받아치던 젊은 무사의 모습에 나는 얼마나 감동했던가? 어쩌면 <무사>를 선뜻 하겠다고 나선 것도 <용문객잔> 때문이었으리라. <무사>에는 <용문객잔> 같은 액션이 없지만 번듯하게 지어놓은 객잔을 보니 나를 매혹시킨 기억이 새록새록 다가온다.

▶ <무사> 제작, 그 천일간의 기록

▶ <무사> 제작일지 (1)

▶ <무사> 제작일지 (2)

▶ <무사> 제작일지 (3)

▶ 숫자로 본 <무사>

▶ <무사> 등장인물

▶ <무사> 스탭

▶ <무사>가 달려온 길

▶ <무사> 김성수 감독 인터뷰 (1)

▶ <무사> 김성수 감독 인터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