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 가는 얼굴에 긴 손가락, <가발제작자>의 정밀한 인형 세상을 빚어낸 감독답게 슈테픈 셰플러(33)는 섬세한 인상의 독일 청년이다. <가발제작자>는 영국아카데미와 안시, 올해 오스카 단편애니메이션상 후보까지 각종 영화제 수상권을 오르내리며 화제를 모았던 인형애니메이션. 흑사병이 돌아 시체가 쌓여가는 중세의 마을, 전염될까 두려워 병든 이웃이 죽어나가도록 외면하지만 결국 자신도 죽음을 맞는 가발제작자의 이야기다. 지난해 부천영화제에도 <페스트>란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는 이 작품은, 표정이 섬세한 인형들의 연기와 정교한 세트에 고딕풍의 양식미와 ‘진짜 같은’ 숨결을 품은 수려함으로 셰플러를 영화제 단골손님 목록에 올려놨다. 이번 SICAF에도 작품과 함께 단편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초대됐다.
실사영화 이상으로 사실적인 <가발제작자>의 연출은 셰플러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세상의 이목을 끈 것은 애니메이션이지만, 셰플러는 독일 바덴-뷔르텐베르크 영화학교에서 연출을 전공했다. “8살 때부터 영화감독 외에 다른 꿈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그는, 히치콕을 좋아한 영화청년이었다. 일반 학교를 마치고 영화를 하고 싶어서 영화사에 들어가 “조수의 조수로 커피 심부름”도 했지만, 실제 작업이 하고 싶은 그에게 애니메이션은 “더 빠른 길”이었다. “한번에 3초 분량을 맡더라도 스크린에서 내가 뭘 했는지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사진도 배우며 영화감독을 준비하다가 실전에 임한 것은 93년. 영화학교에 들어가, 동화의 세계에 떨어진 소녀를 그린 16mm 단편 <사랑에 관한 웃기는 노래>를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94년부터는 뮌헨 영화학교 출신으로 그의 프로듀서가 된 누나 아네트와 함께 만든 홈프로덕션 ‘이데알 슈탠다드 필름’에서 작업하고 있다. 창가에서 창가로 옮겨다니며 다양한 인간군상의 삶을 엿보는 새들을 그린 <Zap> 등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3편의 실사 단편영화를 찍고, 독일 인디감독 5명에 대한 59분짜리 다큐멘터리 <독일 영화 #1>도 만들었다. 가장 최근작인 <가발제작자>는 “18살 땐가 다니엘 디포의 <전염병 연대기>를 읽고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던” 작품. “실사로 찍고 싶었지만 시대극은 돈이 많이 들어서” 인형애니메이션을 생각했다. “나한테 인형애니메이션은 가장 멋진 애니메이션 기법 중 하나다. 평면적으로 그린 것이나 컴퓨터애니메이션은 마음속에서 실제처럼 변환시켜서 봐야 하기 때문에, 보기도 어렵고 빨리 지친다. 하지만 3차원적인 세트와 조명이 있고, 영화처럼 여러 앵글에서 찍는 인형애니메이션은 리얼리티에 가까워 보기에 편하다.”
전체 길이 10m 이상, 가장 큰 건물은 2m에 이르는 마을과 36cm짜리 가발제작자 인형에 온전한 숨을 불어넣기까지 들인 시간은 무려 5년. 제작비 조달과 준비에 1년 반, 세트 짓는 데 7개월, 촬영에 1년 반쯤 걸렸다. 가족들, 친구들은 물론 인형을 만들어준 인형제작회사 매키넌 앤 손더스의 프로들도 거의 공짜로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그들에게 짬을 날 때를 기다리느라 제작기간이 길어졌지만. “애니메이션은 영화의 한 장르”라는 셰플러는, “인형이 그저 인형이 아니라 내 영화의 캐릭터라 생각했고, 오버액션이 아니라 실사배우처럼 미묘한 연기를 하길 바랐다”고. 그에게 <가발제작자>는 ‘애니메이션’이란 테크닉을 이용한 ‘영화’고, 그래서 큰 움직임이나 화려한 애니메이팅보다는 작은 몸짓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담아낸 것이다. “앞으로도 가능하면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 둘 다 계속하고 싶다”는 그는, “<벌거숭이 임금님>을 좀더 지적으로 비튼 스크루볼코미디풍의 드로잉 애니메이션”과 “<가발제작자>처럼 역사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슬프고 진지한 분위기의 인형애니메이션”이라는 2편의 장편 계획을 벌써 세워놨다. 광고로 돈을 버는 생활은 겨우 세금을 낼 정도라지만, 만들고 싶은 영화를 꿈꿀 여유가 아직 그에게는 있었다.
글 황혜림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 오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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