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만매가량의 셀을 썼다는 <메트로폴리스>가 지금껏 일본에 없었던 풀애니메이션이라고 했는데, 어떤 의미에서인가. 리미티드 방식이 나오기 전인 58년작 <백사전>도 초당 24컷을 보여주는 풀애니메이션으로 알고 있는데.
= 맞다. 도에이동화에 들어갔을 당시에는 <백사전>을 비롯해 풀애니메이션이 몇편 있긴 했다. 그땐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이란 말 자체가 없었고, 풀애니메이션이라고 안 해도 다 풀애니메이션이었으니까. 하지만 40년 정도 전 일이다. 그뒤 TV애니메이션 역사가 아주 길었고, 그동안은 풀애니메이션이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풀애니메이션은 디즈니처럼 셀 매수를 많이 쓰고 아주 실감나는 액션이 들어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에서 진정한 풀애니메이션은 없었고, <메트로폴리스>는 지금껏 없었던 풀애니메이션이다.
+ <환마대전> 에서는 도쿄 시내를 부수고,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지그라트를 산산조각내는 등 파괴의 미학에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파괴의 이미지를 좋아하나.
= 좋아한다.(웃음) 테러리스트는 아니지만. 누구나 마음속엔 창조하고 싶은 욕구와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같이 갖고 있을 것이다.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실행하면 범죄자가 되지만 영화 속에서 파괴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지 않나. 애니메이터뿐 아니라 문학이든, 음악이든, 회화든 모든 예술 방면에서 뭔가를 표현하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무너뜨리고 만들고 무너뜨리고 만들고를 반복하면서 표현을 해나간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게 그런 영상이다.
+ <메트로폴리스>는 로봇과 인간의 불화와 공존을 이야기하는데, 결론은 공존에 가깝다. 감독이 보는 미래는 어떤가.
= 남녀가 사랑하는 것처럼 남자간에도, 여자간에도 그런 감정이 있다. 인간과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 사이에도 좋아하는 감정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미래에는 인간이 로봇과도 서로 좋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미래가 멀지 않은 곳에 다가와 있는 것이 아닐까. 데즈카 오사무의 SF만화 속에서는 늘 인간과 과학이 나오고, 과학이 언젠가 인간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계시가 계속돼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복잡한 시대가 됐다. 과학이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시대니까. 사람들이 바빠서 얼굴을 맞댈 수 없어도 휴대폰이 있기 때문에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런 면에서 난 기계나 과학의 발달이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과학이 인간을 멸망시킨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과학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인간과 과학이 공존, 공영할 수 있는 세계가, 새로운 인간사회가 생길 거라고 보고, 그런 의미에서 희망을 가지고 있다.
+ <카무이의 검> 같은 시대극도 만들었지만, 주로 SF를 많이 해왔는데.
= SF를 좋아한다. 뭐든 좋아하긴 하지만 순정만화는 해본 적이 없다. 비일상과 일상이 있다면, 난 일상 자체에는 별 흥미가 없고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선에 있는 세계를 좋아한다. 그런 세계를 아마 판타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세계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주 일상적인 것, 학원물 같은 것은 한 적 없다.
+ 열일곱의 나이에 도에이에 입사하면서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이른 나이에 애니메이션 감독이 될 생각을 했나.
= 우선 학교를 싫어했다. (웃음) 중학교 때 아버지가 영화를 좋아해서 아버지의 영향으로 영화를 보러 많이 갔었다.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주로 프랑스영화였는데, 아이들이 볼 수 없는 것까지 보여주셨다. 그러는 사이에 영화가 학교보다 재미있다고 느꼈다. 13∼14살 때였는데,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아주 막연한 소년의 꿈을 품었고, 그 꿈이 점점 부풀면서 공부나 성적에 상관을 안 하게 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은 다 진학을 하는데, 난 고등학교에 가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가능하면 영화세계 가까이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정보가 많은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루트를 알지 못했다. 혼자 놀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동안 도에이동화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도에이동화 사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난 그런 세계에서 일을 하고 싶고, 그러지 못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별 소식이 없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반년이 지났을 때 엽서가 왔다. 사람을 뽑으니까 시험을 보라고. 그걸 본 순간 만세를 불렀다. 그게 내 스타트라인이었다. 도에이동화의 마크는 도에이영화사랑 똑같은데 ‘동화’가 붙어 있을 뿐이다. 만화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아했으니까 들어가보자고 생각했는데, 같은 도에이니까 영화촬영장하고도 언젠가 연결되지 않을까, 특히 식당이 촬영장 안에 있었기 때문에 배우도, 감독도 볼 수 있고 뭔가 커넥션이 생기지 않을까, 그런 불순한 동기도 있었다. 영화감독이 되진 않았지만,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연출을 하면서 그때 기분이 애니메이션쪽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걸로 됐다.
+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감독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왔다면, 당신은 상업적인 시스템 안에서 다양한 TV시리즈와 장편, 비디오애니메이션 등을 꾸준히 해왔다. 다른 욕심이 나진 않았나.
= TV를 시작하면서부터 상업주의와 자본주의 속에서 일해왔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때는 예술이나 작가성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딱 하나 내 생활을 하는 것, 먹고사는데 내가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게 다였다. 그래서 기획이 어떤 것이든 들어오면 하자고 생각했다. 그래도 내 자질과 맞는 게 전혀 없는 작품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기획 속에 단 한줄이라도 내 속에 뭔가를 울린다면 받아들였다. 글 황혜림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 오계옥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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