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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AF에서 만난 애니메이션 작가들
2001-08-24

아름다운 디스토피아 극한의 애니토피아

일본 애니메이션 3세대의 합작, 린 타로의 <메트로폴리스>

아톰과 아키라가 마주 보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가 <아키라>의 세계관을 만난 <메트로폴리스>는 태생부터 범상치 않았다. 50∼60년대 일본만화와 TV애니메이션을 이끈 데즈카 오사무 원작에, <아키라>의 오토모 가쓰히로가 각본을 쓰고 린 타로가 연출을 맡은 애니메이션이라니. 일본 애니메이션 3세대의 내로라 하는 감독들이 셋이나 연루된 사실만으로도 <메트로폴리스>는 기획단계부터 화제에 오르내렸다. 더구나 온화하고 동글동글한 인상의 ‘아톰’들과 차갑고 염세적인 <아키라>의 디스토피아라는 이질적인 조합으로, 요즘 세대에게는 그리 익숙지 않은 데즈카의 스타일을 어떻게 재창조해낼 것인가하는 귀추를 주목할 만한 실험이었다. 그리고 5년. 오랜 숙성기간을 거친 <메트로폴리스>는 지난 5월 일본에서 개봉됐고, 이번 SICAF 2001의 초청작으로 국내에서도 자태를 드러냈다. <메트로폴리스>와 함께 감독 린 타로도 지난 8월10일, 2박3일의 짧은 일정으로 서울을 다녀갔다.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지 40여년이 흘렀는데, 오랫동안 애니메이션을 해오면서 역시 나의 시작은 데즈카 오사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을 새롭게 만들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메트로폴리스>는 후배 애니메이터들이 데즈카 오사무에게 바치는 새로운 세기의 헌사 같은 작품이다.

데즈카 오사무와 오토모 가쓰히로 사이, 20여년의 간극을 둔 이 만남의 중재자로 린 타로는 꽤 적임자다. 열일곱이던 58년 도에이에 입사하면서 남들보다 일찍 첫발을 디딘 그는 애니메이션의 세대로 봐도 데즈카와 오토모의 중간격. 뿐만 아니라 1961년 무시 프로덕션 창립 때부터 합류해 <철완 아톰> TV시리즈, <정글대제> <불새> 등 여러편을 데즈카와 함께 작업했다. 그래서 열악한 제작여건과 빠듯한 스케줄에 맞춰 셀을 적게 쓰면서 다양한 영상을 연출하기 위한 기법을 고민해야 했던 데즈카 시대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초심을 경험한 몇 안 되는 현역 감독으로 남은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장편 <환마대전>(1983)에서 캐릭터 디자인을 맡았던 오토모와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 이들이 <메트로폴리스>에 처음 의기투합한 것은, 몇해 전 작가로서의 데즈카 오사무를 탐구하는 방송프로그램에서 마주 앉았을 때였다. 당시 오토모 가쓰히로는 해설자로, 린 타로는 대담 게스트로 초대됐는데, 대담 도중 지금껏 본 것과 다른 데즈카 애니메이션을 보고 싶다는 얘기가 나왔다. 데즈카 애니메이션을 함께 ‘만들어온’ 린 타로와 그것을 ‘봐온’ 오토모 가쓰히로는 입장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철완 아톰> 이전의 작품을 새롭게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싶다는 데는 동감이었다. “그때는 데즈카가 20대였기 때문에 데생이 미흡하고 그림이 정돈되진 않았지만 캐릭터 자체가 더 신선하고 감정적이고, 선에 에로스가 있었다." 그런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마침 <메트로폴리스>를 기획중이던 린 타로는 오토모에게 투자자를 구하고 실제작에 들어가게 된다면 각본을 써주겠냐고 물었고, 즉석에서 승낙을 받아냈다.

매드하우스와 반다이 비주얼에서 <메트로폴리스>를 제작하기로 결정한 뒤, 두 감독은 3일간 합숙하며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로스트 월드> <다가올 세계>와 더불어 데즈카 오사무의 ‘SF 3부작’으로 불리는 만화 <메트로폴리스>는 1949년작. 50년도 더 된 원작을 재해석하는 과정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데즈카 오사무의 정수를 유지하면서도 지금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로 만들 것인가”였다. <메트로폴리스>의 무대는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미래의 거대도시국가 메트로폴리스. 고도의 과학문명과 함께 발달한 로봇들은 인간을 대신해 위험을 무릅쓰는가 하면 생계를 위협하기도 한다. 지상에 사는 특권층은 그 혜택을 누리지만, 일자리를 빼앗긴 인간들은 지하세계로 밀려난다. 로봇과 인간의 갈등이 점점 증폭되는 가운데 도시의 실권자 레드 경은 전세계 통신망에 침투할 수 있는 로봇 티마를 만들어 세계를 지배할 꿈에 부푼다. 원작에서는 중성체인 미치와 달리 티마는 순진무구해보이는 금발의 소녀. 아버지 레드경의 관심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티마를 공격하는 양아들 로크의 드라마는 새로 추가된 부분이다. 우연히 티마를 구한 켄이치 일행은 그녀를 잘 돌봐주고, 인간 소년과 로봇 소녀 사이에는 미묘한 우정이 싹튼다.

전체적인 틀은 원작에 가깝지만, 요즘 관객을 의식한 <메트로폴리스>는 한층 정교하고 웅장한 세트를 만들어냈다. “도회적인 스타일이 좋아서” SF 3부작 중에서도 <메트로폴리스>를 골랐다는 린 타로는, 오토모에게 다른 캐릭터들과 별도로 도시 자체가 또하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과연 도심에 바벨탑처럼 솟은 레드 경의 빌딩 지그랏트를 비롯해 하늘을 받치는 기둥인 양 높고 거대한 초현대식 건물로 숲을 이룬 도시는 대단한 볼거리다. 기계적인 지상의 금속성 제국과 달리 40년대 미국 뒷골목 분위기와 남국의 거리처럼 화사한 색채가 뒤섞인 지하 1층의 세계는 좀더 부드럽고 유화적인 질감. 어둡고 습한 하수도 같은 지하 2층 등 층마다 다른 모습을 띤 도시의 이미지는 계단 하나, 간판 하나까지 구석구석 섬세하기 짝이 없다. 국적불명의 화려함 사이사이 어딘지 암울한 분위기를 품은 미래 도시는, 두 감독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데즈카 원작과 다른 감독의 직인이 확실히 찍히는 순간은, 있는 대로 공을 들인 세트가 산산이 부서져내릴 때다. 켄이치에게 인간 소녀로서의 삶을 익혔던 티마가 로봇이라는 자신의 신원에 절망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할 때, 로크가 지그랏트를 폭파하는 장면은 <메트로폴리스> 최고의 장관. 레이 찰스의 서정적인 재즈곡 가 흐르는 가운데 눈송이와 함께 거대한 빌딩들이 무너지며 파편으로 흩날리는 이미지는, 파괴의 미학에 일가견이 있는 린 타로의 전력을 새삼 일깨운다. 이미 인간과 요괴가 싸우는 <환마대전>에서는 도쿄를 부수다 말았지만, 지구 멸망을 둘러싼 대결을 벌이는 극장판 에서 아예 도쿄시청부터 국회의사당까지 남김없이 파괴해버렸던 그는, 산산조각나는 욕망의 바벨탑을 서정적인 음악으로 감싸는 극적 대비로 한층 탐미적인 영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적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면모는, 린 타로의 세계를 관통하는 매력이기도 하다. 무시 프로덕션 이후 여러 제작사를 전전하며 TV시리즈 <우주해적 캡틴 하록>(1978), <은하철도 999> 극장판(1979), <환마대전>과 시대극 <카무이의 검> 같은 장편 흥행작 등 상업애니메이션 시스템 내에서 꾸준히 제몫을 해온 그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적어도 한번은 시선을 훔치는 순수한 시각적인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 80년대 후반의 비디오애니메이션을 거쳐 96년작 , 그리고 <메트로폴리스>에 이르기까지 수십년간 시대와의 교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현역 장인의 손길에는, 관객의 순간을 사로잡을 만한 마술쯤은 숨어 있게 마련이다.

황혜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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