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인민주의 코미디 <디즈씨 도시에
가다>
Mr. Deeds Goes to Town 1936년, 흑백, 115분 감독 프랭크 카프라 출연 게리 쿠퍼, 진 아서
링컨과 예수를 섞어놓은 듯한 순박한 주인공들은 악덕 자본가나 정치 모리배 같은 협잡꾼들에게 교묘하게 이용당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사랑, 정직, 성실, 선의, 용기 등의 전통적인 덕목을 무기 삼아 주위 사람들과 관객 모두를 감동시키면서 진실의 승리를 거둔다. 대충 이런 식의 틀을 갖춘 프랭크 카프라의 전형적인 영화들은 종종 ‘인민주의 코미디영화’(populist film comedy)로 불렸다. <디즈씨 도시에 가다>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1939), <존 도우를 찾아서>(1941)로 이어지는 인민주의 3부작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영화다.
작은 마을의 사업가이자 시인이며 자원봉사 소방수에 튜바 연주자인 디즈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친척으로부터 2천만달러나 되는 거액의 유산을 받고 뉴욕에 진출한다. 도시에서 타락상만을 본 디즈는 상속받은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디즈의 재산을 가로채려는 주위 사람들은 디즈를 정신병자로 취급해 그의 자선사업을 막으려 한다. 디즈의 정신상태가 정상인지를 판정하는 마지막 법정 시퀀스는 단연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주제 요약의 장이다. 선행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주인공은 리틀 가이(little guy)의 건전한 상식으로 사악한 전문가들이 가진 추상적인 개념들을 보란 듯 격파해버린다. 무려 30분이나 지속되는 이 시퀀스에서 카프라는 반응숏을 교묘하게 배치하고 숏의 길이를 점점 줄여가면서 정서적 효과와 내러티브의 속도감을 증대시키는 빼어난 테크닉을 과시한다. <디즈씨…>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 <당신은 그걸 가져갈 수 없어>(1938)와 함께 카프라에게 또 하나의 오스카 감독상을 쥐어준 영화로도 유명하다.
제2장 전후 필름 느와르의 정점 <빅
슬립>
The Big Sleep 1946년, 흑백, 114분 감독 하워드 혹스 출연 험프리 보가트, 로렌 바콜
“나는 <빅 슬립>의 플롯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오슨 웰스는 <빅 슬립>을 본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웰스의 이런 언급이 아니더라도 <빅 슬립>의 너무나 모호하고 복잡한 플롯은 아주 악명 높은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또 하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 주연배우인 험프리 보가트가 하워드 혹스 감독에게 살인자가 대체 누구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러고보니 혹스 자신도 그게 누구인지 알지 못했음을 실감했고 시나리오를 쓴 윌리엄 포크너에게 물어보았다. 포크너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혹스는 이번에는 원작을 쓴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답변을 구했다. 그러나 챈들러 역시 확실한 답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가 부유한 장성인 스턴우드로부터 자신의 딸이 한 남자에게 협박받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의뢰를 받으며 시작되는 영화 <빅 슬립>의 지워지지 않는 매력은 사실 스토리 전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복잡한 스토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 영화만의 독특한 매력을 누릴 수 없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빅 슬립>에서 좀더 중요한 것은 입체적인 캐릭터, 위트와 예리한 언어감각이 돋보이는 대사, 시각적으로 정밀하게 묘사된 혼돈의 분위기, 그리고 험프리 보가트와 로렌 바콜의 (스크린 안팎에서의) ‘관계’ 등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것들을 세심하게 따라가다보면 <빅 슬립>은 ‘후던잇’(whodunit)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 하는 결과보다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과정이 중시되는 영화임을 알게 된다. 이제 부패와 혼돈의 냄새가 만연한 도덕적 미스터리의 세계가 눈앞에 다가오게 된다.
제3장 갱스터의 묘비명 <화이트 히트>
White Heat 1949년, 흑백, 114분 감독 라울 월시 출연 제임스 캐그니, 버지니아 메이요
난폭할 정도로 남성적인 터프가이 캐릭터로서 미국영화사에서 최고의 광휘를 보여준 배우라면 제임스 캐그니가 일순위를 차지할 것이다. 캐그니 캐릭터의 매혹적인 일관성은 그를 종종 ‘작가’(author)로서의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할 정도이다. 영화사상 가장 터프한, 그래서 숨막히리만치 유혹적인 범죄영화라 할 <화이트 히트>는 캐그니의 남성적인 카리스마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캐그니가 연기한 코디 자렛은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가끔은 불구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 또 아주 폭력적인 갱의 두목이다. 코디는 중죄를 면하기 위해 더 가벼운 죄로 경찰에 자수하면서 감옥에 들어간다. 여기서 그는 자기 부하와 부인이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듣는다. 복수를 결심한 코디는 탈옥을 결행한다.
<화이트 히트>는 범죄영화의 대가인 라울 월시 감독의 남성미 넘치는 연출력이 돋보이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에서 일차적으로 관객의 눈길을 잡아끄는 건 코디라는 다소 병적인 캐릭터와 그에 대한 캐그니의 훌륭한 해석이다. 발작적인 두통에 시달리는 그는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손길로 고통을 완화해야 하는, 다시 말해 어머니에 대해 거의 광적인 애착을 갖는 인물이다. 캐그니는 이 배드 가이를 관객으로부터 연민과 혐오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인물로 인간적인 숨결을 불어넣으면서 명장면들을 연출해낸다. 어머니의 피살 소식을 들은 코디가 감옥에서 울부짖는 장면도 잊을 수 없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이다. 경찰에게 쫓기던 그가 기름 탱크 위에서 “해냈어요, 엄마! 세상의 정상이라고요!”라고 외치면 자신을 날려버리는 이 전설적인 장면은 영화사상 가장 전율적인 라스트로 꼽을 만한 것이다.
제4장 필름 누아르의 괴이한 변주 <사냥꾼의
밤>
The Night of the Hunter 1955년, 흑백, 93분 감독 찰스 로튼 출연 로버트 미첨, 셸리 윈터스, 릴리언 기시
알렉산더 코다의 <헨리 8세의 사생활>(1933)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자기 말로 하면 혐오감을 주게 생긴 한 영국 출신 배우가 55년 직접 연출한 영화 한편을 내놓았을 때, 그 영화를 본 사람도 많지 않았거니와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56년, 그 영화에 대한 리뷰에서 프랑수아 트뤼포는 이렇게 썼다. “그것은 아마도 감독으로서는 로튼의 유일한 경험이 될 것이다.” 트뤼포의 그 예언은 적중했다. 그런데 그 글에서 트뤼포는 <사냥꾼의 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실험적인 영화, 발견의 영화와 사랑에 빠지게 해주리라고도 말했다. 그 말도 정확한 것이었다. 시네필들 사이에서는 아주 단순하게 말해 <사냥꾼의 밤>을 보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시네필인가 여부가 결정된다고 말해질 정도이니까 말이다.
영화를 보고나면, <사냥꾼의 밤>이 개봉 당시 왜 그렇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는가를 짐작한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화는 끔찍한 일이 저질러질 음습한 범죄영화로 시작해서 어린이들의 모험영화로 이월하더니 결국엔 놀랍게도 일종의 동화로 끝나는 게 아닌가. 이런 식의 조화롭지 못한 구성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황스러운 것이겠지만 기실 이 영화의 ‘기묘한 매력’은 주로 이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불안정한 내러티브 속에 찰스 로튼은 선과 악의 문제들을 조심스레 새겨넣는다.
<사냥꾼의 밤>이 ‘전설’이 된 데는 여기에 참여한 몇몇 ‘전설적인’ 이름들 덕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로버트 미첨 최고의 연기말고도 무성영화시대 최고의 스타 릴리언 기시의 복귀를 꼭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또 시나리오를 쓴, 미국에서 가장 추앙받는 평론가 제임스 애지의 이름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촬영감독 스탠리 코르테즈는 오슨 웰스의 <위대한 앰버슨가>(1942)를 멋지게 찍은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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