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파멸의 광시곡인가? 미국문명의 묵시록인가?
<벤허>로 스타덤에 오른 찰턴 헤스턴은 원래 <혹성탈출> 속편에 출연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2시간 내내 원숭이들이 설쳐대는 영화에 다시 천쪼가리 하나만을 걸친 채 유인원에게 포획되는 우주비행사 연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 이윽고 <혹성탈출>의 속편이 제작되자 그는 “자신의 촬영분이 일주일 안에 끝난다면, 그리고 자신의 캐릭터를 죽여서 다시는 속편의 제의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찰턴 헤스턴은 속편에서 핵폭탄을 터뜨리며 그 유명한 대사를 읊는다. “망할 놈의 것들, 다 지옥에나 가라.”
30년이 지난 뒤 팀 버튼 감독은 찰턴 헤스턴에게 <혹성탈출>의 리메이크를 찍으며, 그에 대한 오마주로 카메오 출연을 부탁했다. 이제 팔십 노인이 다 된 헤스턴은 그 옛날 핸섬한 우주비행사 역에서 과연 무엇으로 <혹성탈출>과 자신과의 질긴 인연을 마감했을까? 이번에도 그는 그 옛날 자신의 소원과 비슷한 역을 맡았다. 며칠 만에 촬영이 끝나는 다 죽어가는 원숭이 대장 역할을 맡았던 것. 그는 임종을 맞이하기 직전 아들 테드 장군에게 자신의 신전에 모셔진 단지를 깨볼 것을 명한다. 그 속에서는 바로 인간의 힘과 잔인함을 상징하는 총이 나온다. 신기한 장난감을 다루듯 총의 냄새를 맡는 아들에게 죽어가는 원숭이 대장은 경고한다. “인간의 힘의 원천은 바로 그것이야. 조심해!” 무기 소지를 제한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딴지를 거는 말 많은 모임의 대표답게, 헤스턴은 <혹성탈출>에서 자신의 모습에 가장 근접조우한 역할을 맡은 채 사라져갔다.
미국감독협회 감독 절반이 물망에 올라
<한니발>에 앤서니 홉킨스가 몸이 달은 것과 정반대로 사실 <혹성탈출>에 미련이 많은 쪽은 항상 제작사 폭스쪽이었다. 세번의 속편과 한번의 TV드라마로 이미 떼돈을 번 폭스사가 <혹성탈출>의 리메이크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 마침내 폭스는 1993년에 제작자 돈 머피, 제인 햄셔가 올리버 스톤과 함께 기획을 추진해 <혹성탈출>의 각본을 <데드 캄>의 각본가 테리 헤이즈에게 의뢰했다. 얼마 뒤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방식대로 올리버 스톤에서 마이클 베이, 필립 노이스, 크리스 콜럼버스가 감독의 물망에 올랐고, 심지어 제임스 카메론마저 감독으로 거론되기에 이른다. 그에 따라 <혹성탈출>의 내용도 표류했다. 시간여행을 하는 원숭이, 역병에 시달리는 원숭이, 아놀드 슈워제네거 대 원숭이의 대결, 틴 에이지 원숭이까지. 미국감독협회의 감독 리스트 절반 이상이 물망에 올랐다는 루머 끝에 결국 이 기괴한 1억달러짜리 프로젝트는 <화성침공>으로 역사상 가장 우스꽝스럽고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한, 팀 버튼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스타급 감독들의 손을 유랑하다시피하여 자신의 품안에 안긴 <혹성탈출> 리메이크 프로젝트를 팀 버튼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것보다는 빌딩에서 투신하는 쪽이 생존확률이 높다. 좋은 영화가 있다면 그냥 보면 된다. 그것은 영화니까.” 버튼이 갖고 있던 부담감은 자명했다. 1968년에 제작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SF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이후 4편의 속편이 이어져 할리우드에서 SF영화의 위상을 바꿔놓았던 원작. 자신도 어렸을 때 열광하며 보았던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데서 오는 중압감. 그리고 독특한 비주얼과 비틀린 이야기로 일찍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갖고 있는 팀 버튼이라는 이름자 위에 새겨진 기대감. 원작의 후광과 자신의 후광에 이중으로 둘러싸인 팀 버튼은 평론가의 별 세례를 받으려면 그에 버금가게 많은 바나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차이1 드라마냐 블록버스터냐
프랭클린 샤프너의 68년 원작은 최소한 1편의 경우, 스펙터클한 액션보다는 인물들의 성격화에 의지한 한편의 드라마에 가까웠다. TV감독 출신인 샤프너는 스탠리 큐브릭이 아니었고, 퀵줌이나 팬 같은 지극히 고전적인 드라마기법에 의지해서 원숭이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혹성에 불시착한 인간 우주비행사의 오디세이를 그려나간다. 사실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야 비로소 인간사냥이 시작되는 오리지널은 요즘 감각으로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캐릭터와 상황설정의 기초가 튼실하다. 반면 팀 버튼의 <혹성탈출>은 단연 스펙터클의 비중이 높은 편. 도입부의 우주선 추락 시퀀스나 곧 이어서 벌어지는 인간 노예사냥장면, 석기시대의 느낌마저 도는 인간 대 원숭이 군대와의 최후의 결전에 이르기까지, 오리지널이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한편의 SF드라마라면 2001년의 <혹성탈출>은 팀 버튼이 자신의 색깔을 지우고서라도 만들고 싶어했던 여름 블록버스터였던 것이다.
결론은 2001년의 <혹성탈출>의 책임은, 절반은 팀 버튼이 절반은 폭스사가 솔로몬의 아이처럼 반으로 나누어 갖는 형국이다. 평단의 반응도 저조했다. <타임>의 테네스 튜란은 “너무 심각한 몽키 비즈니스”라고 일축했고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의 제프리 앤더슨은 “버튼의 것 중 최악”이라며 “히치콕도 <나는 고백한다>를 만들고 채플린도 <홍콩의 백작부인>을 만들었다”며 너스레를 떤다. 사람들은 여전히 팀 버튼의 영화에서 몽환적인 악몽의 동화와 마음을 사로잡는 금발소녀, 주류사회에 몸을 섞지 못하고 유폐된 자신의 세계에 갇힌 불운한 아웃사이더를 기대했다. 물론 팀 버튼은 이에 대해 원숭이의 고함소리로 응답했지만.
차이2 인간은 동물이냐, 노예냐
팀 버튼은 누가 뭐라든 새로운 <혹성탈출>에서 철저히 중세적인 어둠의 이미지로 승부수를 건다. 사막과 대낮의 이미지로 현기증나는 지구 파멸의 광시곡을 들려주었던 오리지널과 달리, 새로운 <혹성탈출>은 역전된 유인원의 싸움에 철저하게 밤과 어둠의 왕국으로 끌려간 인간 노예들의 묵시록적인 비전을 섞어 넣는다.
실제로 프랭크 샤프너의 <혹성탈출>에서 다룬 것은 종의 차이 즉 인간과 짐승에 대한 차이에 관한 명상이었다. 닥터 지라나 자이우스에게 찰턴 헤스턴은 철저하게 동물 취급을 받는다. 우리에 갇혀 동물처럼 사육당하는가 하면, 그가 말을 하자 원숭이 과학자는 다윈의 진화론을 뒤집은 것처럼, ‘원숭이가 열등한 영장류인 인간에게서 진화했다는 증거’라는 결론까지 내린다. 원숭이들이 테일러가 갇혀 있는 우리에 여주인공 노바를 집어넣어주는 것도 일종의 암수 한쌍을 동물원에 넣는 인간의 관행에 대한 패러디일 뿐이다. 테일러가 우리를 탈출했을 때의 원숭이들의 위기감 역시 우리를 탈출한 위험한 호랑이에 대한 인간의 반응과 거의 똑같이 묘사된다.
이러한 면에서 오리지널 <혹성탈출>은 심오한 인간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연속적으로 질문하는 듯하다. 원숭이도 지능을 가지면 인간처럼 행동할 바에야 과연 인간이 인간적임을 구성하는 성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오리지널의 인간들은 말을 하지 못하고 당시 인간 역을 맡은 배우들은 실제로 한마디의 대사도 하지 않았다. 당시 관객으로서는 인간들이 이토록 지능이 낮은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더 섬뜩하게도 테일러 중위와 같이 불시착한 나머지 두명의 승무원은 인간이 더 고등한 생물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드는 원숭이들에게 차례로 박제당하고 머리수술을 당한다. 원숭이들은 자신들이 한때는 인간이라는 짐승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우월성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테일러와 “하등동물”의 능력과 가능성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원숭이 지라 박사의 태도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반면 팀 버튼의 새로운 <혹성탈출>에서 인간은 동물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원숭이의 ‘노예’로 형상화된다. “감히 나를 쳐다봐. 냄새나는 손 치워, 이 더러운 인간아”라며 눈을 부라리는 고릴라 사냥꾼은 인간에 대한 경멸과 멸시를 감추지 않는다(아이러니하게도 이 대사는 오리지널에서는 찰턴 헤스턴이 원숭이들에게 던진 대사이기도 하다). 여자와 남자, 부모와 자식을 편의대로 가르는 원숭이들의 무자비함은 그 옛날 흑인에게 자행했던 노예사냥의 재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인간=흑인노예의 등식은 노예상인 림보의 다음 대사에서 더욱 노골화된다. “이렇게 더럽고 구역질 나는 인간들은 처음이군. 누구 ‘장사’ 말아먹을 일 있나?” 오리지널의 주인공 테일러는 인간이라는 동물로서 실험을 당하지만, 조종사 레오는 쓸 만한 노예감으로 원숭이 혹성에 도착한다. 팀 버튼의 인간들은 말을 할 줄 안다. 은유적인 관점에서 팀 버튼의 <혹성탈출>에는 동물에 해당되는 존재가 없는 것이다. 두터운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화살을 쏘아대는 원숭이들의 중세의 마스크를 한풀 벗기면 탐욕스럽고 광기어린 인간의 그림자, 바로 흑인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꼴사나운 백인의 자화상이 엿보인다.
▶ 팀 버튼의 <혹성탈출>, 68년 원작과 이렇게 다르다 (1)
▶ 팀 버튼의 <혹성탈출>, 68년 원작과 이렇게 다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