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누군가에게서 이름을 빼앗는다는 건 단순히 호칭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를 완전히 지배하기 위한 방법이다.” 일본의 극장을 흔들고 있는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품의 의미를 밝히는 글에서 그렇게 말했다. 10살난 여자아이 치히로를 종업원으로 부리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온천여관의 여주인 마녀가 먼저 한 일도 이름 바꾸기였다( 마녀가 지어준 새 이름이 바로 센). 이름, 그것은 존재의 증명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의 미적 전통을 감각이 온통 서구화한 어린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어했다. 그 또한 이름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터전이다. 그는 “국경없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에게 딛고 설 땅과 역사와 과거가 중요해진다고 말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그런 땅과 역사와 과거를 짓기 위한 시도였던 것이다.
둘. 말과 이름을 빼앗겼던 시대가 우리에게 있었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시인은 “오히려 기쁜 몸짓하며”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몸으로 깨뜨리고 죽은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에게 격렬한 송가를 바쳤다. 천황 송가를 따로 바치고, 젊은이들의 출병을 권유하던 언론도 포함해서,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셋.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일본이라는 섬나라의 현실을 환타지로 재창조해낸 것이지만, 이름과 문화에 관한 감독의 발언은 세계 어디서나 수긍할 만 하다. 각자의 이름을 지킬 것, 각자의 전통적 미의식을 오늘의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현대적 틀거리 속에 되살려낼 것.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 40% 시대를 목전에 두고, “스크린쿼터는 단순히 영화산업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의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문성근씨의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연대의 가능성은 아름답다.
넷. 다만 일본적인 것을 되찾자는 제언이 가미가제를 찬양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겠다는 고이즈미식 민족주의와 뒤섞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젊은이들을 죽음의 항로에 내몬 행위를 정당화하는 권력은, 치히로에게도 얼마나 위험한가. 개성 살던 인씨의 둘째아들의 죽음을 찬양하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아직도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듯 하다. 8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