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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감독 김형구
2001-08-17

당신은 감정을 찍었군요 (1)

<비트>에서 <봄날은 간다>까지, 정(靜)과 동(動)의 극을 경공하는 카메라맨 김형구를 만나다

1997년 <비트>라는 영화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새로운 청춘스타 정우성의 시대가 도래했음과 동시에 김성수라는 감각적 스타일리스트의 탄생을 두팔 벌려 환영했다. 그러나 촬영계는 한 유학파 촬영감독이 스크린에 그려대는 반역적 영상에 잠시 아찔한 기운을 느껴야 했다. 광각렌즈의 극단적 클로즈업을 통한 대상의 왜곡, 끊임없이 흔들리고 갈겨대는 스탭프린팅의 저속촬영, 머리 위에서 직각으로 내리쳐 눈 아래의 음영이 강조되는 과감한 조명까지 그동안 충무로에서 정석으로 통용되었던 모든 규칙을 깨트리면서 만들어낸 <비트>의 영상은 무심코 흘려보내던 엔딩크레디트 중 촬영감독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촬영감독 김형구.’ 충무로 도제시스템의 그늘이라고는 AFI 유학 전 촬영부 생활이 고작이었던 이 젊지도 늙지도 않은 촬영감독은, 그러나 ‘앙팡테리블’이란 수식어에 그리 오래 자신을 묶어두지 않았다. 이듬해 촬영에 들어간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은 네온사인 불빛 아래 하루에 50컷 넘게 찍던 <비트>의 촬영과 달리 한 마을의 원경을 담기 위해 자연광이 가장 좋은 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는 여유를 요구했다. 그러나 김형구의 카메라는 보채지 않은 채 긴 호흡의 롱숏을 유지하며, 인물들의 사사로운 감정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뜻을 유연히 전달했다. 비교적 프로덕션 기간이 길었던 <아름다운 시절> 이후 찍은 <태양은 없다>는 <비트>가 김성수와 김형구의 ‘아름다운 습작’임을 증명해 보였다. 사이즈를 점프하는 리드미컬한 촬영과 비장미를 극대화하는 고속촬영, 허망한 꿈을 좇는 젊은이들이 활보하는 회색도시의 냉기를 포착한 <태양은 없다>는 가히 영상의 실험실이라고 불릴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이후 커트 변화보다는 40m가 넘는 레일과 카메라의 운동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찍어낸 <이재수의 난>은 까마귀가 구름을 뚫고 관객을 인도하는 유장한 도입부부터 제주의 풍광을 뒤로 한 채 끊임없이 달리는 이재수의 박동소리, 민란의 현장을 덮치는 헨드헬드 카메라의 거칠지만 유연한 움직임까지 박광수의 미학적 욕심을 관객의 눈앞에 펼쳐보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김형구는 거꾸로 시간여행을 떠났던 <박하사탕>의 열차를 탔다. 문학적 온기가 배어 있는 <박하사탕>의 사고하고 감응하는 카메라는 어떤 과장이나 왜곡을 허락하지 않은 채, 자로 잰 듯 정확히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 다가섬과 멀어짐을 반복했다.

이렇듯 신예 촬영감독 김형구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는 몇년이 흐른 뒤 장르와 스타일을 넘나드는 왕성한 소화력과 함께 깊은 신뢰로 발전돼갔다. 그리고 그의 성장은, 본인이 의지와 상관없이, 굳어져 있던 한국촬영계의 경도를 완화시키며 도제시스템에서 성장한 촬영감독들과 함께 유학파 감독들이 별다른 제제없이 활동할 수 있게 된 초석이 되었다. 지난 겨울 반년 동안의 중국 촬영을 끝내고 귀환한 <무사>부터 얼마 전 촬영을 마친 <봄날은 간다>까지, 이제 갓 뽑아져나온 충무로 시나리오가 처음으로 머무는 곳이 되어버린 그의 책상.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교수실 226호엔 김형구의 카메라가 훑어주길 기다리는 시나리오들이 그렇게 차곡이 쌓여가고 있었다.

파인더를 들여다보는 은밀한 즐거움

“한편의 영화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변화시키길.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한 영화로서.” - 김형구

언제가 <씨네21>의 ‘내 인생의 영화’에 김형구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 대한 기억과 함께 그 시절 영화문법책 앞에 자신이 써놓았던 문장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았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 그 자체다. 영화를 고를 때 시나리오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함께 만드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좋은 스탭, 좋은 감독이 모여 좋은 현장분위기에서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게 기쁜 거다”라고 말하는 그는 사람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직선보다는 곡선이 주를 이루는 그의 외모에서 으레 촬영감독이라는 타이틀이 부여하는 날선 예민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저렇게 둔하게 생긴 사람이 그렇게 민첩한 손놀림과 놀라운 문학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사이더스의 조민환 프로듀서의 험담(?)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이나 ‘영화공장서울’ 시절 “저 순진한 사람이 영화로 밥먹고 사는 게 가능할까” 했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만은 않는다. 게다가 스탭들이 붙여준 ‘잠자는 스머프’라는 별명에, 밤샘 촬영 때는 “급기야 뷰 파인더에 고개 파묻고 잔 적도 있다”는 주변사람들의 증언을 참조해보건대 그의 어디에서도 투사나 야심가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대신 그를 무장시키는 것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록하고 찍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84년, 한장이 손톱크기만큼밖에 안 되는 8mm필름을 카메라에 넣고 학교옥상에 올라가 유세하는 장면 같은 걸 찍었던 기억이 난다. ‘차르르륵’ 필름이 감기고 셔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좋았다. 내 삶에서 파인더 들여다보는 은밀한 즐거움과 촬영소리를 듣는 것을 결코 포기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감독은 못할 것 같고.”

어릴 때부터 그 안이 궁금해서 시계란 시계는 몽땅 망가뜨렸을 정도로 기계를 좋아했던 김형구에게 아버지는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캐논카메라 한대를 선물했다. 36장짜리 필름을 넣으면 72장이 나오는 하프사이즈 카메라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영화와 같은 그 카메라를 가지고 그는 주변을 프레임 속에 가두기 시작했다. “찍은 필름을 들고 현상점에 가면 아저씨가 72장 모두 노출이 일정한 걸 보고 ‘참 잘 찍었다’는 칭찬을 하셨다”며 그때 일을 흐뭇하게 기억하는 그는 결국 대학에서도 사진을 전공하게 되었다. 중앙대 시절 ‘영화마당 우리’라는 교외서클에서 영화를 찍었는데 늘 혼자 해야 하는 사진작업과 달리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작업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김형구는 점점 영화에 빠져들게 되었고 졸업 뒤 본격적으로 영화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면서 영화아카데미에 4기로 들어갔다. 그 뒤 충무로로 들어와 유영길 감독 밑에서 촬영조수로 일했지만 88올림픽과 함께 충무로의 모든 제작인력이 올림픽에 집중되었고 그 일을 좀 돕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아카데미 동기였던 김태균 등과 ‘액션, 멜로, 섹스 같은 대중적 영화를 만들자’는 목표로 ‘영화공장서울’을 차렸다. 그러나 결국 돈만 날린 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현실은 막막했고 그런 막막함을 안고 김형구는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AFI를 졸업하고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빛이 그린 그림을 감독하는 사람’으로서의 DP(Director of photography)시스템에 대한 확신이었다. 실질적으로 카메라를 잡는 카메라 오퍼레이터와 조명을 잡는 개퍼를 두고 촬영과 조명을 전체적으로 통괄하며 눈으로 보이는 화면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DP. 김형구는 DP시스템을 실천해보리라는 꿈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도제시스템을 거치지 않은 촬영감독에게 고국은 그다지 반가운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는 30대 중반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으니 더 나빠진 꼴이었다.

그런 중에 기획시대에서 어린이영화 10편을 만든다는 계획아래 촬영기사를 뽑는다는 소식을 접했고, 놀면 뭐하나 하는 심정으로 취직을 했다. 결국 그의 데뷔작이 <우연한 여행>이라는 어린이영화가 된 사연은 이러했다. 그러나 두 번째 작품인 <닥터봉>을 찍을 때 촬영감독협회에서 제작사인 황기성사단으로 편지가 한통 날아왔다. ‘협회에 가입되지 않은 촬영기사를 쓰면 앞으로 황기성사단에서 찍는 영화에는 우리 협회에서는 아무도 나갈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황기성은 미안해하는 김형구를 향해 “형구야. 이제 우리 영화 네가 다 찍어야겠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한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후 협회의 집행부가 젊어지면서 딱딱했던 규정들이 조금씩 유연해지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고 유영길 감독이 그의 협회가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협회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가끔 사무실에 꿔다논 보릿자루마냥 앉아 있다보면 사람들이 ‘어이, 낙하산’ 뭐, 이러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게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영상원 같은 학교도 생겼고 유학 다녀와서 바로 카메라 잡는 친구들도 욕 안 먹고 훨씬 더 왕성한 활동하고 있는 것 같다”며 그는 그동안 변화된 상황을 다행스러워했다.

▶ 당신은 감정을 찍었군요 (1)

▶ 당신은 감정을 찍었군요 (2)

▶ 김형구가 말하는 “잊기 힘든 이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