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멀로이 단편선
영국 웨일스 출신의 애니메이션 작가 필 멀로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결코 호감이 가는 인물들은 아니다. 더구나 이런 인물들이 벌이는 행동은 하나같이 보는 이를 경악시킬 정도로 엽기적이다. 치고 때리고 찌르고 자르고 부수고…. 온갖 잔인한 폭력에 갖은 노출증과 가학적고 변태적인 성행위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등장한다.
필 멀로이는 인류가 자랑하는 문화와 화려한 현대 물질문명의 이면에 숨어 있는 야만성과 모순, 편견을 가장 냉소적으로 그리는 작가이다. 성서부터 대중문화의 각종 상징들, SF까지 다루는 소재는 다양하지만 주제는 늘 일관적인 특징이 있다. 그는 동물과 다르다고 자부하는 인간의 이성과 도덕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그리고 그 내면을 들추면 짐승보다 더 추악한 욕망과 아집이 숨어 있다는 걸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심각하지 않게, 다양한 패러디와 기발한 블랙 유머를 통해 유쾌하게 풀어가고 있다.
성서의 ‘십계명’을 통해 인간사회의 허위를 해부한 일련의 단편 연작들은 멀로이의 대표작품들. 뮤지컬에서 제목을 따온 <사운드 오브 뮤직>도 부드럽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과는 달리 현대사회의 각종 병폐를 담은 문제작. 올해 안시페스티벌에서 큰 인기를 모은 <편견>은 성기가 얼굴이고, 얼굴이 성기인 외계인 조그를 통해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지켜온 윤리와 관습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성인 잔혹 우화’이다.
모리모토 고지 단편선
장편 애니메이션 <메모리즈> 중 첫 에피소드 ‘그녀의 기억’을 연출하고, 일본 디지털 애니메이션 업계의 선두주자인 스튜디오 4도C를 이끄는 모리모토 고지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모음. 98년작인 <음향생명체 노이즈맨>은 광기어린 과학자가 만들어낸 기이한 생명체 노이즈맨의 이야기. 세상에서 노이즈가 아닌 음악을 제거하려는 노이즈맨의 음모에 속고 있던 토비오와 레이나 등은 우연히 ‘음악의 나무’를 만나 음악의 아름다움을 깨달으면서 그에 맞선다. 노이즈맨이란 캐릭터 자체도 그렇지만 조그맣고 투명한 유령 같은 소리의 결정들, 낡은 고철과 초현대적인 메커닉 디자인의 분위기가 뒤섞인 도시의 풍경 등 SF적인 이미지와 상상력이 기발한 작품. <카우보이 비밥> 음악으로 유명한 간노 요코의 테크노 사운드도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 밖에 짧은 치마에 루즈 삭스를 신은 일본 여고생의 방황을 담은 일본의 스타 팝그룹 글레이의 <서바이벌>, 기계인형의 파괴와 골목 안의 기묘한 세계를 그린 테크노 DJ 겐 이시이의 <엑스트라> 등 뮤직비디오와 <할> <메리 제인> 같은 CF애니메이션 등 디지털 실험과 미래지향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모리모토의 작품들을 모았다.
후루카와 다쿠 단편선
후루카와 다쿠는 일본의 독립 애니메이터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미소년, 소녀와 화려한 액션, 세련된 메커닉 등으로 치장한 상업 애니메이션과 달리 단순하면서도 선의 움직임을 재치있게 활용한 만화적인 판타지와 이미지의 실험이 흥미롭다. 원통 안에 그림을 넣고 돌려 연속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던 초기 영화의 기술처럼 18개의 다른 그림이 회전하는 원형을 그린 <페나키스티스코프>, 검은 바탕 위에 이합집산하는 빛으로만 움직임을 표현한 <모션 루미네> 등은 실험성이 두드러지는 단편들. 방에서 책을 뒤적이며 커피를 마시던 남자의 주변이 갖가지 색과 물체로 채워지는 <커피 브레이크>,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를 만화 버전으로 비틀어 현대 일본을 묘사한 <토요 스토리>, 번잡하면서도 각자가 소외된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아프리카 초원으로 간 남자의 유쾌한 여행을 화사한 색감과 아프리카풍 음악으로 펼치는 <타잔>, 마티스의 그림 <재즈>에서 영감을 얻어 ‘놀아본’ <플레이 재즈>의 흘러가듯 색과 형태를 바꾸는 이미지 등 선이 움직여 갖가지 형상으로 살아나는 애니메이션의 순수한 즐거움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소개된다.
이고르 코바요프 단편선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다소 생소한 이름인 이고르 코바요프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출신의 애니메이션 작가이다. ‘클라스키 추포’(Klasky Csupo)에서 <러그렛츠> <덕맨> 등의 TV시리즈를 통해 각광받은 그는 상업적인 작품과는 별도로 자기만의 독특한 영상감각을 담은 단편들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코바요프 애니메이션에는 러시아 이민자로서 미국에서 느끼는 ‘이방인’의 소외와 고독이 짙게 배어 있다. <창문 안의 새>는 그런 정서가 잘 나타난 단편이다. 자신의 가족사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이 작품은 마치 여러 편의 시들을 영상화한 듯 영상이 주는 이미지와 정서를 중시하고 있다. 스스로 이전의 우울한 분위기의 작품과 달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는 <플라잉 낸슨>(1999)에서도 주류사회에 동화하지 못하는 그의 이방인적 정서는 낸슨이란 에스키모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두 작품 외에 <수탉! 그의 아내> <안드레이 스비롭스키>도 함께 소개될 예정이다.
길 알카베츠와 마크 베이커 단편선
애니메이션계에서는 드물게 이스라엘 출신인 길 알카베츠는 고정적인 스타일보다는 매 작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이다. 우화적인 이야기를 즐겨 소재로 다루는 그는 얼핏 천진스럽고 단순한 이야기 속에 강박관념이나 욕망, 현대사회의 모순을 접목하는데 능숙하다. 이번에는 <비츠버츠> <스웜프> <양크에일> <루비콘> 등의 작품이 소개된다.
80년대 영국이 배출한 작가 중 가장 주목받는 인물 중 한명인 마크 베이커는 국립영화텔레비전학교에 재학하면서 <세명의 기사>(1982)와 <검은 자전거>(1984)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이어 89년에는 <언덕 위의 농장>으로 그해 안시페스티벌 그랑프리, 아카데미상, 히로시마페스티벌 ‘히로시마 프라이즈’를 석권하며 명성을 떨쳤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언덕 위의 농장>은 세 집단(농부, 야영객, 사냥꾼)이 3일에 걸쳐 같은 농장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있다.
장 루프 펠리시올리 작품선
예술적인 단편 애니메이션의 명가로 이름난 프랑스 폴리마주 스튜디오의 작가들 중 하나인 장 루프 펠리시올리의 단편 모음. 포크통에 나이프를 꽂아두는 아내에게 분노를 느끼는 남자를 그린 ‘포크 안의 나이프’를 비롯해 <일상의 작은 고통들> 시리즈 10편, 교통사고로 얼굴의 절반을 잃은 남자가 아내의 얼굴도 자신처럼 만들어버린다는 <이기주의자> 등 양식화된 스타일과 유화 질감의 이미지로 편집증적인 욕망, 강박 같은 현대인의 내면을 담은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나무를 두고 다투다 벽을 쌓게 되는 두 남자를 그린 <벽>의 클레이를 비롯해 셀, 종이의 다양한 기법을 넘나든다.
유럽 대표 단편선
유럽 대표 단편선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올해 아카데미상에 나란히 후보에 올라 경합을 벌였던 마이클 두독 드 비트의 <아빠와 딸>과 스티븐 셰플러의 <가발제작자>. 올해 아카데미와 안시페스티벌에서 수상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힌 <아빠와 딸>은 이별과 갈망이라는 주제를 넉넉한 여백과 섬세한 손맛이 느껴지는 영상과 친숙한 멜로디로 그려냈다. 대니얼 디포의 원작 단편을 인형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가발제작자>는 처연한 인형의 ‘표정연기’가 돋보이는 작품. 페스트가 창궐한 중세의 분위기를 절묘하게 살린 이 작품에서 내레이터는 셰익스피어 배우로 유명한 케네스 브래너가 맡았다. 이 밖에 서구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잠의 요정 ‘샌드맨’을 그로테스크한 상상력과 세트로 재해석한 폴 베리의 <샌드맨>, 2001 안시페스티벌 경쟁부문 본선에 오른 헝가리 페렌크 사코의 모래애니메이션 <스톤스> 등이 상영된다.
한국 단편선
소나기가 내리는데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아 혼자 황량한 거리를 달려가는 소년의 심리를 점토와 인형으로 빚어낸 <소나기>, 라이트 형제가 세계 최초로 비행을 성공시킬 때 옆에 있었다는 페르딕스의 지난한 비행 실험을 담은 점토애니메이션 <페르딕스>, 낯설고 폐쇄적인 사후세계에 이른 남자의 불안과 생전 추억을 담은 2D 작품 <크로스> 등 국내 젊은 작가들의 단편애니메이션 8편이 소개된다.
영국 단편선
연필 스케치풍의 그림이 따스한 느낌을 주는 <우리 할아버지>는 <스노우맨>의 스탭들이 모여 제작한 단편. <스노우맨>에 이어 다이앤 잭슨이 감독을 맡았다. <산타 할아버지의 휴가>는 <스노우맨>과 함께 겨울철에 인기높은 레이먼드 브릭스의 동화가 원작. 산타클로스의 여가에 대한 천진스런 상상력이 익살스럽다. 를 통해 방영됐던 <장난꾸러기 스파이더>는 따스한 색감과 편안한 캐릭터가 돋보이는 가작이다. 애써 딱딱한 교훈적 메시지나 어른의 시각에서 본 세상을 전해주기보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하려는 정성이 돋보인다.
글 김재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황혜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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