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애들 손좀 봐야겠습니다.”
오즈 야스지로가 <도쿄 이야기>(1953)를 찍을 때, 이마무라 쇼헤이는 조감독이었다. 이마무라가 손봐야겠다고 한 건 초등학생 무리로 출연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오즈 영화의 출연자답게 앞만 보고 너무도 질서정연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마무라의 생각은 이랬다. ‘애들이 뭐 저래. 내가 저 나이 땐 저러지 않았어. 저건 애들이 아니야. 군대지.’ 이마무라는 오즈의 마지못한 허락을 얻어 아이들을 흔들었다. “야, 니들 하고 싶은대로 해.”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난리법석을 피웠다. 대열에서 이탈해 엉뚱한 데 가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촬영중에 오줌 싸는 아이까지 있었다. 물끄러미 이를 보던 오즈가 말했다. “이마무라군. 안 되겠네. 내 방식대로 해야겠어.”
이마무라는 이것이 사부인 오즈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저항”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마무라는 오즈를 떠났다. 오즈의 평생의 영화적 거처인 쇼치쿠를 떠나 젊은 감독을 찾던 닛카쓰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오즈는 거대한 성이었고, 그 성에선 어떤 흐트러짐도 용납되지 않았다. 이마무라는 오즈의 완벽한 균형과 정제미의 세계를 생래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도쿄 출신에다 외과의사의 아들이었지만, 이마무라는 뒷골목의 냄새, 습한 욕정과 범죄와 혼돈, 원시적 생명력에 처음부터 이끌렸다. 오즈의 세계를 같이 호흡하기도 힘들었고, 조감독 선배가 50명이나 줄서 있는 쇼치쿠의 완고한 도제제도도 숨막혔다.
이 결별은, 당시엔 불만 많던 한 조감독의 이직에 불과한 사건으로 비겠지만,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로 대표되던 일본 거장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물결의 도래를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이마무라는 오즈의 정반대편에 자신의 영화세상을 건축했다. 같은 현대의 일본을 그렸지만, 오즈의 숭고하고 희생적인 여인과 고요한 정원을 야수적 욕정과 흉악한 생존게임의 난장판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데뷔작부터가 오즈의 <부초>의 패러디처럼 보이는 <도둑 맞은 욕정>(1958)이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이마무라의 영화는 오즈의 언더그라운드 변주 혹은 엽기버전이다. 세계영화계는 오즈를 찬미한 것처럼 이마무라에게도 곧 최상급의 찬사를 바쳤고, 칸영화제는 그에게 두번의 황금종려상을 헌정했다. 그리고 오즈에게 저항하던 이 새파란 젊은이는 이제 75살의 노인이 됐다.
농담이 나의 힘
“내 연기? 엄청나게 늘었지. 하하”
이마무라 쇼헤이를 이런 계기로 만나기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마무라는 이시명 감독의 데뷔작 에 일본인 사학자로 출연하기 위해 지난 7월21일, 3박4일 일정으로 방한했다. 두해 전 부산영화제를 찾았을 때보다는 좋아보이지만 여전히 걸음걸이가 불편한데, 그것도 배우가 아닌 한 나라의 국보급 감독이, 외국영화의 단역을 맡으러 먼길을 찾아온 것이다. 이 희귀한 일을 이마무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가타 신이치로라는 프로듀서가 있는데, 내 20년 친구야. 그 사람이 한번 하라고 해서 했지 뭐.” 보충설명을 하자면, 의 프로듀서이자 이마무라 영화학교 출신인 양시영씨가 아이디어를 내고 그의 선배인 나가타 신이치로가 힘을 보태 이 특별출연을 성사시켰다.
감독으로만 오래 살아서 그런지 이마무라는 연기하는 걸 재미있어하는 눈치였다. 22일 강릉에서 촬영을 끝내고 다음날 하이야트호텔에서 만났을 때, 그에게 이번에 한 연기에 대해 먼저 물었다.
연기는 처음인가요.
“TV드라마에 한번 나온 적 있어. 그땐 시골경찰 서장 역을 맡았는데, 내가 너무 거만했다고
그러더군. 연기가 형편없었다는 얘기지. 그래서 이번에 영화에 또 출연한다니까, 다들 말렸어. 특히 가족들이 말렸어. (건너편에
앉아 있는 부인을 쳐다보며) 말려도 너무 심각하게, 좀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말렸어.” (웃음)
세번의 인터뷰 경험으로만 판단하자면 이마무라 감독은 심각한 인터뷰보다 농담을 즐긴다. 지지난해 부산영화제 기자회견 때 “<간장선생> 주인공의 모토가 ‘의사의 생명은 다리’인데, 그러면 감독의 생명은 뭐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마무라는 “감독의 생명도 다리”라고 대답해 좌중을 웃겼다. “가훈은 무엇인가”라는 엉뚱한 질문에도 “가훈도 ‘감독의 생명은 다리’”라고 의뭉스럽게 답한 뒤 “가훈이 그런데도 내가 다리가 불편해서 죄송하다. 곧 나아서 뛰어다니겠다”고 멋지게 마무리했다. 대단한 순발력이다.
기자(이면서 그의 팬)의 처지로선 그의 영화인생 전체를 놓고 묻고 싶은 게 태산같지만, 좀 거창하다 싶은 질문엔 단답으로 대답하니 질문자로선 여간 멋쩍지 않다. 대신, 예컨대 이런 질문, “이번엔 연기력이 좀 향상됐다고 생각하나요” 같은 것엔 시원하게 답한다. “그럼. 물론이지. (웃음) 이번엔 익숙해져서 아주 잘했어. 거만도 안 떨고 말이야. 그런데 그 영화 내용은 뭔지 잘 모르겠어. (웃음) 시나리오를 봐도, 시간도 왔다갔다하고, 너무 복잡해서 말이야.” 이런 문답은 막힘이 없다.
기회가 되면 또 연기를 할 생각인가요.
“바빠서 그럴 것 같진 않아. 그래도 이시명 감독처럼 젊은 사람들과 일하는 건 즐거워.
좋은 경험이었지.”
젊은 영화인들과 세대차를 느끼진 않나요.
“우리 영화학교 다니는 젊은이들은 나이가 나하고 반세기 차야. 이 친구들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래도 다들 진보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어. 그래서 즐겁지. 이 친구들이 요즘 나한테 ‘감독님, 요즘 일본영화는
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그래.”
그럼 뭐라고 대답하나요.
“물론이지, 라고 대답해.” (웃음)
감독님이 왕성하게 활동하시던 60, 70년대가 역시 일본영화의 전성기였다고 보는 건가요.
“그렇지. 뭐, 내가 그때 영화를 만들어서, 그랬다는 건 아니고. (웃음) 눌려 지내던
사회가 점차 개방됐고, 감독들도 자유롭게 날갯짓을 시작했던 때야. 그래서 좋은 영화가 많이 나온 거지.”
진부한 관객을 엿먹이는 노장
노장의 신작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늘 숙연한 느낌을 갖게 한다. 영화로 평생을 산 사람, 거장의 만신전에 오른 노감독의 마지막 영화…. 그러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그렇게 숙연해지려는 마음을,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머쓱하게 만든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우나기>(1997) 때부터 스스로 마지막 작품임을 공언하고 나서 곧 차기작을 만들기 때문이다. <검은 비> 이래 8년 만에 내놓은 <우나기>는 모든 면에서 이마무라 영화세계의 마침표처럼 보였다. 밑바닥 인간들의 삶, 그들의 벌거벗은 욕망과 부대끼며 평생을 살아온 감독 자신의 이미지가 투영된 걸작 <우나기>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까지 수상하면서, 이 거장은 참으로 감동적인 은퇴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그때 이마무라는 멋진 그리고 비장한 코멘트까지 덧붙였다.
“뱀장어(우나기)는 강바닥의 진흙탕 속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멀리까지 여행한다. 이 긴 여행이 끝나면 수천마일을 달려가 전투에서 승리한 위대한 장군처럼 귀환하는
게 아니라, 진흙에 자신을 묻고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 매우고 외롭고 슬픈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마무라는 이듬해 <간장선생>이라는 아주 경쾌하면서도 기묘한 부조리극을 들고 다시 칸을 찾았다. 그때 역시 이마무라는 다시 “이게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올해 <붉은 다리 밑의 따뜻한 물>로 또 한번 칸의 초대를 받았다. 이번엔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이마무라 감독은 이제 이렇게 말한다. “늘 마지막이라고 말해놓고 또 만들어서 좀 무안하다. 그래서 이젠 그런 말 안 할 거다.”
올해 칸영화제엔 이마무라와 비슷한 감독이 또 있었으니, 바로 포르투갈의 마뇰 드 올리베이라다. 올해 93살의 이 노장은 70살이 넘어서야 본격적인 필모그래피가 시작되는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인물로, 매번 포르투갈 정부의 영화지원금 중 반을 가져가는 바람에 젊은 포르투갈감독들은 그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두 노장의 신작은 그러나 여러 면에서 다르다. 올리베이라의 <나는 집으로 간다>는 아들을 사고로 잃은데다 강도를 당해 실의에 빠져 있는 노배우가 주인공이다. 오랜만에 영화 출연을 했지만 대사를 까먹는 실수를 몇 차례 한 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이야기의 전부다. 이런 영화를 보고 노감독의 자화상이란 느낌을 갖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이 영화의 쓸쓸함과 비애감은 그런 느낌 때문에 더 무거워진다.
이마무라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따뜻한 물>은 뜻밖의 장소로 간다. 실직한 중년 가장이 부랑자 노인의 말을 듣고 보물을 찾아 바닷가의 가옥에 간다. 그곳에는 보물 대신 낯선 여자가 있고 남자는 여자를 품는다. 그러자 여자의 몸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아나 내를 이루고 그 주위로 물고기가 모여든다. 이마무라는 놀랍게도 집이 아니라 ‘따뜻한 물’의 세계, 성과 욕망의 분수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감독의 분신일 것으로 짐작되는 부랑자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걸 잊고 여자를 품게. 자기 욕망에 충실하란 말일세.” 나이에 어울리게 좌선한 채 삶을 어둠을 응시하기는커녕 오즈에게 저항하던 젊은이의 격정과 욕망, 그 원시적 생명력의 세계로 이마무라는 돌아간 것이다. 물고기들마저 이 욕망의 잔치판에 참여해 자연의 축사를 대독한다. 이 상상 불허의 회귀야말로 현자의 말을 경청하려 무릎 꿇은 제자의 자세를 갖춘 관객을, 또 노장의 처연한 자화상을 예감하던 관객을, 그 진부한 기대를 엿먹인다. 짓궂게 그리고 통렬하게 엿먹인다.
▶ “나는 돌아간다. 욕망의 분수대로” (1)
▶ “나는 돌아간다. 욕망의 분수대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