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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대교
2001-08-03

걸어서 마포대교를 건넌 적이 있다. 처음엔 가볍게 장난처럼 한강을 내 다리로 건너볼까, 시작한 일이었다. 북단에서 남단으로. 그러나 그건 결코 즐거운 장난이 될 수 없었다. 강위에 걸린 다리위에는 분명 인도가 양켠에 있는데, 그 다리로 올라갈 길이 없다. 가장자리에 심어둔 철제 난간에 바짝 붙어서야 인도를 밟을 수 있었다. 이 다리는 자동차용이다. 그럼 저 인도는 누굴 위한 거지, 운전자가 따로 있는 자동차 이용자. 그런 사람들만, 자, 나는 잠시 강바람을 쐬고 싶으니 당신은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시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산책을 즐기라는 얘기다.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편하냐 불편하냐를 따지기 전에 이런 건 싫다. 차를 타고 달려 그 거리와 시간을 압축하는 `현대인`들도, 느릿느릿 걸어가며 그걸 늘여보고 싶은 때가 있는 법이다. 가끔은.

영화도 그렇다. 안그러면 왜 에이젠슈테인은 오뎃사 계단의 시간과 공간을 그렇게 분할하고 다시 붙여서 확장했겠는가. 스쳐지나갔으면 놓치고 말았을 많은 것들이 거기서 보인다.

정말 영화도 그렇다. 사람의 다리품을 사양하는 큰 다리들만 있다면 우리는 사람과 사람을, 시간에 따라 변하는 강의 표면을, 세상을 지켜볼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블록버스터 틈새에서 오랫만에 개봉하는 <소름>이 반갑다. `호러영화`라는 분류표를 달고 있지만, 이건 초특급 공포열차가 아니다. 자신의 사랑을 배신하게 만드는 상황에 패배해 스스로를 나락으로 몰고가는 사람들의 비열함과 나약함, 그 폭력성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조용한 악몽이다. 현실에서 추출한 악몽의 백신이다. 베니스가 초청한 <수취인불명> 역시 그렇다.

악몽만 약기 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뒤늦게 개봉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가 선사하는 자연과의 우정은 얼마나 풋풋한 위안인가. 시사만화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 박재동 화백을 애니메이션으로 실어나른 토토로의 고양이버스가 우리들의 좋은 꿈을 되살려주기를.

아직은 나무들이 성장을 멈추지 않는 계절이다. 나무 아래를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나무 끝에서 연녹색 새잎들이 환하게 빛나는 걸 볼 수 있다. 그런 기적을 볼 수 없다면, 그곳은 지력이 감퇴한 곳임이 분명하다. 하반기 한국영화 기대작을 미리 살피며, 기적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