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필성/ 단편 <소년기> <베이비> 연출·장편데뷔 준비중“정말 독한 사람들이었지”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지우 형의 <사로>를 보고 들어갔다. 94년이었는데 처음에는 준회원이었다. 한달 동안 무슨 소림사처럼 청소만 시키던 선배들은 회의만 하면 상대방이 울기 전까지 씹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다들 독한 사람들이었다. 영화이야기만 나오면 말이다. 삼겹살 한번 못 먹고 촬영장에서 소보루 빵으로 연명하면서도, 다들 최고급 기자재만을 구입한 것 보면 알 수 있다. 내게 청년은 과정이었던 것 같다. 후배 입장에선 그러면서 정서적으로 상처를 입기도 했다. 물론 그게 내가 아마추어 수준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희선/ <고추말리기> 연출“결과물? 작품+@”
“청년에서 비디오로 첫 번째 영화를 찍고 나서 본 사람들이 그러더라. 너랑 너무 다르네. 그동안 몰랐던 내가 거기 있다는 얘기였는데, 하긴 그런 ‘나’는 나 스스로도 그제야 발견한 거였다. 나를 찾기, 그러니까 영화를 계속 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영화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직접 부딪쳐가며 피부로 느꼈으니까. 청년은 공동작업을 해왔지만, 지금까지의 작품들이 그 결과물이라는 견해에는 개인적으로 반대한다. 영화를 만들면서 서로를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자극해왔다는 표현이 더 옳은 것 같다.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힘이 되는 그런 것. 만약 집단이 강조됐다면, 이미 감독들이 보여준 영화 속 개성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정지우/ <해피엔드> 연출
“저예산, 변명거리도 자랑도 아니다”
“돈이 없어서 못 만든다? 그건 아닌 것 같다. 청년은 내게 깨달음을 줬다. 그게 변명이라고 말이다. 반대로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무슨 자랑도 아니었다. 용균이가 연출한 <그랜드 파더>를 서울단편영화제에 내놓고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팸플릿에 예산내역서를 올려놓긴 했는데, 그러고보니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좋은 영화를 적은 돈으로 만든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렇다고 저예산영화라는 딱지만으로 뭔가 성과를 올렸다고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용균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김용균/ <와니와 준하> 연출중
“기타 대신 카메라”
“‘청년’은 내게 영화학교였고, 지우나 상인이 형은 선생이었다. 지우랑은 말싸움도 많이 했다. 내가 이긴 적이 더 많았지만, 나중에 지우 말이 맞은 적이 많았으니까 결과적으론 내가 진 셈이지. 어쨌든 청년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영화하게 됐을까 싶다. 영화과를 가긴 했지만, 그때 내 관심은 어떻게 하면 서울에서도 고향친구 김진상, 김홍국 등과 밴드를 결성해서 활동할 수 있을까에 쏠려 있었다. 결국 두 친구도 내 꾐에 넘어와 이제는 기타 대신 청년에서 카메라를 들게 됐지만 말이다. 충무로 데뷔하면서 다행인 건 가난했던 청년 시절을 겪어서인지 보충촬영 등으로 필름을 허비하는 일이 없다는 거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생전 못해본 경험이었다”
“내가 청년을 찾았던 1993년엔 사무실만 덩그러니 있었다. 지금 미라신코리아에서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는 이경희씨를 통해 남아 있던 이상인 감독을 알게 됐고, 그게 인연이 됐다. 개인적으로 운동하곤 담쌓고 지냈던 나를 보고 이상인 감독은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눈치였다. 그곳에서 <스무살 젊은이에게> 등을 만들면서 생전 못해본 경험도 했지만, 내가 영화제작쪽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멀티미디어, 애니메이션 등의 작업과 무관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사람과 일해야 영상물 제작에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가를 알게 됐으니까.”
이상인/ <질주> 연출
“할 일은 아직 많다”
“남아 있는 청년 멤버들 모두 예전 활동에 대한 부담감이 있을 거다. 말은 안 하지만. 물론 할 일은 아직 남아 있다. 독립영화쪽의 최근 화두는 독립장편영화 제작이 아닌가 한다. 실력들이 좋아졌고, 개성있는 감독들이 늘었지만, 여전히 대중적인 영향력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장편을 만든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난관인 상영관 확보 등의 배급문제도 장편영화가 나오면서 같이 풀 수 있을 것 같다. 현 멤버들 역시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들이 뭔가를 찾아낼 것이다.”
김광수/ 청년필름 대표, <와니와 준하> 제작
“영상교육물 배급으로 시작”
“난 들락거리기는 여러 번이었지만, 정작 청년에 머물렀던 기간은 다 더해도 다른 이들보다 짧다. 93년에 만든 <스무살 젊은이에게>의 배급일이 첫 번째 수익사업이었는데 애초 전대협의 배급망을 보고 시작했었다. 신입생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영상교육물이었는데, 전공자라는 이유로 전대협 문화국에서 일하면서 영화제를 기획한 것을 빼고는 영화와 인연이 없던 내가 배급책으로 뽑혔다. 이건 여담인데 홍보를 위해 <씨네21> 전 편집장 조선희씨가 <한겨레> 기자하던 시절, 들고 갔다가 작품성이 떨어진다며 ‘물’먹고 돌아온 적이 있다. 다행히 박재동 화백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끼어 있어 1단 기사로 실리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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