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번 물난리는 집 뒷산 너머 동네에도 피해를 남겼다. 배수관이 수용 못한 물더미가 한밤중에 지하셋방으로 흘러들었단다. 밤새 물을 퍼내다 새벽녘에 병원으로 실려가 아기를 낳은 새댁이야기며, 출장간 방주인이 잠가둔 방문을 여차저차 열고 짐을 들어낸 이야기들이 골목으로 번져갔다. 어쩌다 들여다본 연립주택 지하에는 네 가구의 살림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바닥이 배수관보다 너무 낮아서, 화장실을 천장 가까이에 높다랗게 배치해놓은 집. 습기를 말리는 데는 햇빛만한 게 없다고 동네사람들이 반가워하던, 해가 쨍쨍 맑은 날이었지만 사람도, 살림도 모두 몸을 피한 지하셋방에는 그 빛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날, ‘영화구경’이 주업인 사람에게 어떤 회의가 찾아들지는 뻔한 일. <사무라이 픽션>에서 조금 얼띤 남자주인공은 계곡 맑은 물에, 행복에 취해 있다가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가보인 명검도 찾고, 죽은 친구의 복수도 해야 하는데 개인적 일락에 빠져 있으면 안 된다는 ‘반성’이 불현듯 그 둔한 머리를 친 것이다. 경우가 다르긴 해도 주업으로 돌아가기가 영 내키지 않았다. 사무라이들의 승부 자체를 허망한 웃음거리로 날리는 영화에서는 반성 역시 우스개가 되었지만 그날 내개 영화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수해라는 특수한 상황도 그렇고, 이런 방이 여전히 필요한 전반적 상황도 그렇고, 지나가던 사람이 감전사하도록 방치된 가로등도 그렇고, 이런저런 것들이 나를 주업에 몰두하지 못하도록 압도하고 있었다.
이튿날, 역시 심란한 출근길에서였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가수 양희은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주파수를 맞춰놓고 있었다. 양희은씨의 동반 진행자는 지하실 방에서 자취하는 어느 여학생이 물과 씨름하던 그날밤 경험을 써보낸 편지를 읽어줬다. 갑자기, 책들과 그동안 소중하게 모아둔 <씨네21>이 물에 젖을까봐 고심했다는 대목이 귀에 와 박혔다.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위안, 우리에게 열어주는 초월의 가능성을 다시 생각했다. 지하실 어두운 방에서도 영화이야기에 눈을 빛내는 이들을 영화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
그리고, 최보은 아줌마. 사람의 편에서(어떤 독자는 ‘약자 편에서’라고 못을 박았다) 끊임없이 영화를 뜯어보고, 그 사랑이 부족할 땐 가차없이 표창을 날리던 그가 새 일을 시작하며 ‘아줌마 vs 아줌마' 코너를 떠났다. <제망매가>의 소설가 고종석씨가 다음주부터 칼럼의 새 필자로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