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청소년의 해방구는 겨울이 되어서야 그것도 매서운 추위의 빙판 위에서 열리곤 했다. 황량한 벌판 같은 스케이트장에서 소년과 소녀들은 비로소 경계를 허물고 몸으로 부대끼곤 했다. 그건 무척 제한된 것이었다. 스피드 스케이트는 앞으로 질주하기에만 적합해서 서로 스쳐지나갈 수밖에 없다. 멋을 부려봐야 무섭게 가속도를 내거나 과격한 동작으로 멈춰서는 것뿐이다. 스피드 스케이트를 잡아먹은 건 롤러스케이트다. 무엇보다 계절의 제약이 사라졌고, 팝송이 꽝꽝 울리는 실내에서 소년 소녀들은 바퀴 달린 피겨스케이트로 달리고 멈추기를 자유롭게 하며 좀더 가까워졌다. 그 다음 세대의 인라인 스케이트, 그중에서도 어그레시브 인라인은 말하자면 스피드 스케이트와 롤러스케이트의 행복한 결혼이다. 스피드와 화려한 몸동작을 동시에 가능케 하고 공간의 제약을 허물어뜨렸다. 도로, 공원은 물론이고 계단과 난간, 빌딩도 그들을 막지 못한다.
스케이트의 공간은 그렇게 확장돼왔고 그만큼 스케이트를 착용한 몸의 관계도 확장돼왔다. 그러나 스케이트의 각기 다른 시대를 관통하는 건 여전히 하나다. 스케이트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의 세계에 머물던 시절을 상징한다. 잘하지 않을 용기도, 결정하지 않을 용기도 가능한 시기. 그렇게 빛나는 한 시절을 미끄러지듯 달리며 스피드로 바꿔주는 것이 스케이트다.
정재은 감독의 <태풍태양>은 그 끝무렵에서 출발한다. 자, 빛나는 한 시절이 저물고 있다, 이제 그 스케이트를 타고 어디로 갈래, 아니 그 스케이트로 무엇을 할래, 라고. 이건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막 스물살이 된 소녀들에게 던졌던 물음이기도 하다. 다만 그때는 속도를 낼 수 없는 휴대폰과 길 잃은 고양이로 묻고 답했다. 남자소년 버전의 <고양이를 부탁해>는 그들에게 스케이트를 신겼으므로 스피드와 몸의 향연을 매혹적으로 보여주는 파티가 필요하다. 영화 자체가 스타일리시해질 수밖에 없고, 속도감으로 격렬히 흔들릴 수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스피드 안에 대화를 숨겨야 하므로 <고양이를 부탁해>처럼 세심하고 사실적인 묘사의 여지는 줄어들고 만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매개로 하는 성장영화의 노선을 택한 순간, 스포츠와 소년을 이어주는 장르의 관습에 자신의 일부분을 내줘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태풍태양>은 <고양이를 부탁해>에 비해 감히 섹스를 이야기하고 더 적극적인 코뮌을 시도한다.
교실 안에 갇혀 졸고 있는 소요(천정명)의 몸이 꿈틀댄다.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트에 막 매혹된 초보다. 소요의 앞에 나타나 성숙한 기량을 보여주는 모기(김강우)와 갑바(이천희)는 그의 우상이 될 수밖에 없다. 소요의 소요(逍遙)가 모기와 갑바로 상징되는 두 갈래 길의 충돌과 갈등에서 시작되고 끝맺으며 나아가 희망을 얻어내는 건 이 영화의 장르적 성격에 비추어 당연한 수순이다. 일단, 스케이트 코뮌을 형성한다. 소요의 부모는 일찌감치 외국으로 쫓겨나고 그의 아파트에 모기와 갑바의 청춘 군단이 군거를 이룬다. 아무렇게나 먹고 자며 스케이트에 관한 진실을 주고받는다. 늘 그렇듯 코뮌은 오래 가지 못한다. 갈등은 헬멧에서 시작된다. 안전하게 꾸며진 익스트림 파크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갑바는 헬멧을 쓰지 않는 자기 멤버들의 본을 아이들이 따라하는 것에 화를 낸다. 모기가 한마디 한다. “난, 내가 알아서 다쳐.” 사실 갑바는 타협을 시작한 거다. 어렸을 때부터 해야 (넘어지고 다치면서) 자기 몸에 대한 감각을 잘 키울 수 있다고 어른을 설득하던 그가 아닌가. 모기와의 대립각은 좀더 분명해진다. 갑바는 후배들에게 미래를 약속해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대회를 거쳐 세계대회 진출을 계획한다. 여비를 마련하려고 어그레시브를 활용한 광고 아르바이트에 뛰어드는데 그건 화가 화를, 욕망이 욕망을 부르는 재앙의 순환고리에 걸려드는 일이었다.
모기는 감각의 무정부주의자다.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걸로 끝내고자 한다. 그는 그들 중에서 최고의 솜씨를 지녔지만 ‘프로페셔널’로 꾸며진 게임의 규칙, 즉 돈과 명예의 시스템 안에 포섭되기를 한사코 거부한다. 한주(조이진)는 그런 그를 야망이 없어서 좋다고 하지만 팀을 ‘구원’하기 위한 이벤트조차 거부하는 그에게서 서서히 멀어져간다. 모기는 작은 돈을 위한 이벤트조차 족쇄로 돌아올 거라는 걸 확신하는 근본주의자다. 그렇다면 모기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가 가장 슬픈 대목인데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다. 모기가 스케이트를 유실물 센터에 맡기고 도시 속 자신만의 파라다이스로 사라져버리는 건 유일무이한 선택처럼 보인다(여기서 혹시 당신이 자살충동을 느낀다면 ‘빛나던 한 시절’을 영화로도 지속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제 장르적 결말이 남았다. 끊긴 고가 위에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난감해하던 소요는 용케도 모기와 갑바의 두 가지 길을 절충하는 법을 깨달았다. 영화는 그런 소요의 모습을 보여주나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니 소요의 길이 진정한 희망의 발견인지 아니면 변절인지 판단할 수 없다. <태풍태양>이 남기는 또 하나의 슬픔이다.
정재은 감독 인터뷰
“사실 모든 영화는 성장영화가 아닐까?”
-모기와 갑바의 대립은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혜주(이요원)과 지영(옥지영)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소년 버전이라고 이해해도 좋을까.
=아무래도 시나리오를 직접 썼기 때문에 현실 안에서 어떻게 현실에 대해 판단하고 접근할 것인지 하는 청년기 초반의 고민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그랬는데, 청년기에 들어서면서 가장 처음으로 하게 되는 질문이었던 것 같고. 그런 고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소요의 마지막 선택은 감독이 <고양이를 부탁해> 이후 영화를 어떤 태도로 대하겠다는 결심처럼 보인다.
=스케이트 영화를 만드면서 정재은이라는 사람이 왜 스케이트 영화를 만드려고 했는지 내가 어떤 것들을 자신에게 질문하려고 했는지 많이 생각했다. 얻은 결론은 이 사람들도 여기서 어떤 쾌감을 느끼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나도 영화에서 어떤 방식의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모기와 갑바의) 두 세계는 전혀 다르지만 소요가 얻어낸 것이 나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원하는 결말이 아닐까 싶었다.
-유일한 여자 캐릭터인 한주는 스케이트를 신고 있으나 소년들의 스케이팅을 촬영하고 교정해주는 역할에 제한된다. 아쉽지 않았나.
=영화 안에서 모기, 갑바, 소요 세명의 이야기가 메인이어서 한주를 딱 드러내는 플롯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한주 이야기가 너무 많이 들어오면 삼각의 구도 자체가 모기, 한주, 소요로 변화되는데 그건 별로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느낌의 역할로 한정해야 했다. 또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한주 같은 친구가 어느 정도의 스케이트 실력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도 생각했다. 한주를 통해 화려한 스케이팅을 보여주기에는 대역이나 스턴트를 해줄 현실적 여건이 실제적으로 별로 없기도 했다.
-전작에선 문자메시지 주고받는 걸 스타일 있게 표현했는데, 이번에는 스케이트 장면뿐 아니라 촬영, 편집, 음악 등 전반적으로 스타일을 더욱 강조했다. 이건 작품의 소재 때문인가 아니면 감독의 지향점과 관련된 것인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스타일이나 문체 등 형식적인 고민은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모티브인 것 같다. 스케이트 영화를 하겠다는 것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른 방식의 콘티, 다른 방식의 호흡이나 흐름을 시도해보고 싶었던 욕구가 크지 않았나 싶다.
-성장영화에 대한 관심이 계속 지속되는 건가.
=성장영화라는 넓은 폭 안에서는 그렇겠지만, 사람들이 성장영화에 대해 질문해올 때 성장영화에 대한 정의를 되묻곤 한다. 이 영화의 어떤 점이 그렇게 규정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두편 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나왔고 그때 겪을 수 있는 문제들, 자기 방향을 정해나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성장영화로 규정하는데 모든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아나가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모든 영화는 성장영화가 아닐까. 앞으로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모티브는 계속 갖고 갈 것이고, 젊은이를 중심축에 놓고 해나갈 것이냐에 대해서는 꼭 그렇지는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