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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명연기 3인 3색 [3] - 주현

공인된 현장제일주의자의 힘, 배우 주현

허한 어깨 위에 희비극이 내려앉다

주현씨는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시청각을 총동원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자면, 우린 금새 참새떼처럼 모여 침이 흐르는지도 모른채 이야기에 빠져드는 벌거숭이 아이가 되어 버린다. “최신식 월남장비는 우리한테만 지급되었거덩…” 하는 장교 시절 ‘JSA’이야기부터 “사실은 찰턴 헤스턴이 말이야…”로 이어지는 <벤허>의 캐스팅 비화까지, 짐짓 비장한 듯 적당히 씰룩거리는 입선에, 묘한 서울사투리에, “뚜뚜뚜뚜…” “쏴∼아” “캬∼아” ”하∼아” 같은 추임새를 적절히 섞어쓰면서 그는 쉴새없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상한 것은 얼핏 방대하고 정신없는 듯 한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하나의 ‘극’을 본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정확한 ‘야마’(포인트)를 결코 놓치지 않는 화술은 살며시 줌인으로 들어갔다가 어느새 줌아웃이 되어 빠지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 속도감과 조바심을 내게 만드는 교묘한 긴장과 반전 속에 마지막 한방, 물기어린 감동적인 한 마디를 향한 호흡을 남겨둔다. 이런 주현의 이야기 방식은 그의 연기방식과 참 많이도 닮아 있다.

탁구 코미디론과 원초적 팔자 연기론

한바탕 질펀한 섹스신으로 시작되는 <해피엔드>의 오프닝 시퀀스가 끝날 무렵, 침넘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잔뜩 긴장했던 관객에겐 무심하게 등장하는 헌책방 주인 주현의 존재는 고마울 정도다. 구석에 앉아 연애소설만 탐닉하는 최민식을 향해 “여그가 구멍가게여 뭐여, 만화가게여? 양복은 멀쩡하니 입고 다니면서…”라고 질책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헌책방 주인 주현은 그렇게 겨우 3신이지만 매번 아슬아슬한 불륜과 치정 사이에 숨가쁜 영화의 호흡을 달래준다. “딸애가 안 해주면 안 된다고 해서 그러마 했는데, 워낙 작은 역할이라 헐 게 있어야지. 하지만 작은 역이라도 연기란 게 그 사람의 지금만 생각하고 하는 거랑 그 사람의 전 시간, 그 사람의 어제를 생각하는 거랑 큰 차이가 있거든.” <친구>의 준석 아버지 역시 신의 수가 그 존재감과 비례할 수 없음을 증명시켜준 경우였다. 지방 조직 보스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서서히 기세가 꺾여가는 ‘아버지’. 살가운 말 한 마디 건네지 않던 무뚝뚝한 그 아버지는 자신과 같은 길을 가기 위해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한참을 응시한다. 보스라 해도 변변한 양복 한번 입을 일 없이 줄곧 러닝셔츠와 ‘추리닝’ 차림으로 주현은 채 두줄이 넘지 않은 각 대사 속에 영화 내내 친절하게 설명되지 못했던 그 아버지의 역사를 가늠케 만든다.

“그림이 오래 그렸다고 잘 그리는 건 아니잖아. 배우도 그래. 똑같이 가르치고 똑같이 배워도 달라. 타고나는 거야. 거울을 보면 어떻게 이 얼굴 가지고 배우를 해먹었나, 하는 생각을 해. 만날 술처먹어서 얼굴 퉁퉁 붓고 머리통도 크지. 배때기는 나왔지. 그런데 뭐 연극 출신도 아니고 연기를 학교서 배운 것도 아니고. 그런데 삼십몇년간 연기하면서 밥먹고 살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연기는 팔자야, 원초적인.”

정말 배우가 되라는 ‘팔자’였는지 그의 배우 데뷔도 우연찮게 다가왔다. GP장교 출신인 그는 제대 뒤 임학송 감독의 ‘월남드라마’의 자문관으로 베트남길에 올랐다. “배우들에게 시범 보여주는 모습에서 끼가 보였었나봐.” 자문비에서 200달러 더 준다기에 덜컥 맡아버린 중대장 역할. 특유의 걸출한 입담으로 교신을 하고 “총 쏘고 뛰고 하는 게 예사롭지 않았던” 그의 연기는 시사회장에 온 KBS국장의 눈에 띄었고 주현은 당시 연수중이던 공채 9기 탤런트들과 함께 ‘특채’ 탤런트로 방송사 문을 열었다. “텔레비전이란 게 집집마다 있지도 않던 시절이었으니까, 우리 마누라는 못 산다고 집나가기도 했다니까.” 2개월간 큰 몸짓 덕에 엑스트라 장군은 도맡아하던 시절을 거쳐 70년 <사랑의 훈장>이란 드라마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군인역할을 하라면 잘하겠는데, 씨팔, 연기고 뭐고 기본이 있냐 뭐가 있냐. 고은아가 상대역이었는데 ‘사랑합니다’ 이런 게 될 리 있나. 내깐에는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는데 감독은 ‘누구 잡아먹을 거냐’고 호통을 치고… 결국 즈이들끼리 작당을 해가지고 날 10회에 죽였어. 도봉산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고은아 애를 살리고 내가 죽었지.” 드라마에서는 죽었지만 본인은 ‘살았다’ 싶었다. 주인공 한번 해봤으니 더이상 배우에 미련도 없었고 정치외교학 전공을 살리기 위해 외교관시험이니 여기저기 원서를 내고 있었다. “근데 이상한 게 나를 죽이고 나니까 방송사에 전화가 많이 오는 거야. ‘그 사람 연기는 못해도 순박한 데는 있었다’ 뭐 이러구, 그래서 결국 회상신을 만들더라구. 뭐 그런 거 있잖아, 뿌연 연기 속에서 아무 말 안 하고 서 있는….”

“짜안… 2탄, 또 전화가 왔어. 출연하래. 제목은 <먹구름 흰구름>, 배역은 벙어리. 근데 해보니 벙어리역할이 더 힘들어, 방송사도 시켜보니 또 안 돼, 안 되겠다 또 죽여. 이번엔 장마에 어깨로 둑을 막고 죽는 거야.” 극의 1/3을 채 못 채우고 ‘죽어버린’ 배역이었지만 그의 말없는 연기는 당시 최고 인기리에 방영되던 드라마 <실화극장> 작가 김동현씨의 눈에 띄었다. 신구 등과 출연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야간비행>편에서는 김동현은 주현을 모델로 대본을 쓰기도 했고 그 역시 잇단 출연과 함께 서서히 배우로 단련되어가고 있었다. “곽경택 감독이 초등학교 다닐 때 <야간비행> 보고 그게 잊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를 <친구>에 캐스팅했다고….” 이후 <등신불> <열녀문> <갯마을> 등의 TV문학관을 통해 배우 주현의 존재는 서서히 어떤 대체물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확고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코미디, 재미있지. 근데 코미디란 것은 서로가 경지에 오른 사람끼리 해야 해. 코미디는 탁구 같거든. 내가 스매싱 매길 때도 있고, 받을 때도 있고, 컷트 짜를 때도 있고, 열번 받고 한번 튀길 때도 있는 거야. 근데 배우들이 연기를 가지고 싸움을 해. 이기려구 한다구. 누구랑 연기하면서 누굴 잡아먹었다, 이겼다, 이런 게 어딨어. 그 사람 캐릭터, 생긴 거, 분위기, 다 다른 거지. 자연스러운 순발력과 내밀한 연기로 승부해야 해. 누가 먼저 나오느냐에 신경쓰고 대사를 높이고 이럴 필요가 어디 있냐고.”

이광수 원작의 TV문학관 <무명>은 그 속에 잠재된 코믹연기를 외부로 내오는 역할을 한 작품이었다. 감방의 사기꾼으로 등장해 질퍽한 사투리와 다양한 장기를 선보인 이후 ‘주현표’ 코믹은 <서울뚝배기>의 “아자씨∼ 껄랑요” 하는 능청스런 서울사투리나 <옥이이모>에서 “야, 니 몇개 묵었냐”며 이빠진 아랫잇몸을 드러내는 풀빵장수, 전과 12범의 ‘간큰’ 도둑 <도둑의 딸>로 이어졌다. “너무 정신차리고 사는 인간을 보면 저게 배운가 싶어? 너무 약고, 너무 완벽하게, 너무 계산하고 가는 건 모사지 배우가 아니야. 풀어질 때는 정신없이 풀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 계획하고 짠 것 같은 연기는 순발력있는 연기를 대면 못 당하지.” 그러나 그의 코미디는 결코 가볍고 얕은 유행어나 ‘개인기’의 늪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것은 예의 코믹한 표정이 숨쉬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배반하는 뒷모습 때문이다. 100kg이 넘는 큰 몸짓에 드리우는 응당 크고 먼 그림자. 그 어깨가 드리우는 ‘허’한 중년의 풍경은 주현에겐 묘한 상실의 이미지를 만든다. 엉뚱하고 코믹한 역할 속에서도 상처한 남자, 자식 잃은 아버지, 버림받은 외사랑의 아픔이 종종 묻어나는 연유도 다 그 뒷모습 때문이다.

배우혼이 실린 뒷모습

“구라와 허풍 빼면 시체”라며 혼을 쏙 빼놓는 이야기솜씨와 유머를 늘어놓다가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와 나누던 대사를 풀어놓으며 금세 두눈 가득 눈물이 고이는 배우. 세 아들의 아버지이자 양어장 주인인 ‘강태걸’로 분할 새 주말드라마 <아버지와 아들>과 젊은 형사 김민종, 임원희를 조율하는 묵묵한 형사반장으로 나오는 영화 <이것이 법이다> 등을 통해 올해 예순의 배우 주현은 아직도 할말이 너무나도 많은 듯했다. 그리고 우리에겐 조감도와 세밀도, 희극과 비극을 앞뒤로 품고 있는 이 배우의 이야기를 거부할 힘이, 전혀 없다.

내가 본 선배 주현

“절대 대본을 들고 다니시지 않는다”

<해피앤드>에서 헌책방은, 허구와 현실이 부딪히는, 즉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기획단계부터 꼭 주현 선생님이 하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엔 부담스러워 하셨는데 따님이 나와 대학동기라는 ‘학연’(?)을 이용하여 어렵게 승낙을 받아냈다. “정 감독, 이사람, 그냥 폐지수집하다 늙은 사람이 아니야. 인텔리야, 몰락한 인텔리….” 대사 중에 책방 주인이 소설가가 내놓은 헌책 꾸러미를 들고 오면서 “글쓰는 놈이 책이나 팔아먹고…”하며 욕하는 부분이 있는데, 캐릭터가 응축된 대사라고 생각하고 쓴 부분이었다. 사실 그냥 장사꾼이라면 좋은 책이 나온다는 건 좋은 일 아닌가. 그 얼마 되지도 않는 대사 속에서 주현 선생님은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계셨다. TV 연기에 익숙해져 있는 경우엔 좋은 연기자들에게조차 종종 이상한 습관 같은 걸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주현 선생님은 매체와 상관없이 안정된 연기를 할 수 있는 천상배우이다. 아, 그리고 그를 만나면 누구나 알게 되는 사실일 테지만 선생님은 정말 ‘내추럴 본 이빨’이다. <해피엔드>/ 정지우 감독

주현 선생님은 절대 대본을 들고 다니시지 않는다. 녹화 전날 대사를 달달 외워오시지도 않는다. 일단 처음 시놉시스 단계에서 캐릭터를 파악하시고 나면, 현장에서 그날의 분위기를 잡아나가시는 ‘현장제일주의자’시다. “혼자 공부하듯이 대본을 보는 습관도, 훈련도 안 돼 있어. 이 신에서 ‘운다’라고 되어 있어도 현장에서 눈물이 안 나오면 안 울거야. 하지만 정 울어야 된다면 미리 이야기를 해줘.” 어떤 이에게는 충분한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이런 습관이 신기하게도 선생님에겐 장점으로 작용한다. ‘주현표’ 자연스러움은 그렇게 탄생되는 것이다. <거짓말> <푸른 안개>/ 표민수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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