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리가, 이년아!’(Get Away, Bitch!)
우리 모두는 이 대사를 알고 있다. 시고니 위버가 <에이리언2>에서 번득이는 안광으로 에일리언에게 주문을 퍼부었을 때, 그것은 곧바로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전사의 동굴로 가는 ‘열려라 참깨!’의 마법이 되었다. 지나 데이비스나 데미 무어 같은 당대의 스타들은 기꺼이 긴 머리채를 자르고 포화 자욱한 연병장으로 달려나갔고, 이윽고 그녀들의 경력은 현재까지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성차와 그 재현에 관한 한, 2001년 할리우드는 더욱더 요지경 속이 되어간다. <다이 하드>의 브루스 윌리스가 맨발에 피에 젖은 러닝셔츠를 벗어던지고, <키드>나 <스토리 오브 어스>에서 다감한 윌리로 변모하는 사이, 천하의 멜 깁슨은 스타킹을 신고 여자들의 심리를 연구하겠다고 호들갑을 떤다. 한편 <와호장룡>의 멋진 언니들- 양자경과 장쯔이는 주윤발을 사이에 둔 한판 승부를 이미 끝냈으며, 안젤리나 졸리는 자신의 집 천장에 매달아놓은 번지점프 줄로 이소룡 버금가는 이단 옆차기를 선보인 상태이다.
여성전사의 이미지는 어쩌면 섹슈얼리티와 시선의 권력, 관객의 동일시라는 고전적인 영화이론이 아직도 유용하다는 하나의 증명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50년대 최초의 페미니스트 서부극 <쟈니 기타>에서 조앤 크로퍼드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메르세데스 매캠브리지와 희대의 여성 대 여성의 결투를 벌였지만, 당시 이 대결에 환호하는 여성관객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올 여름, 전세계 관객은 팝콘을 먹으며 남자들의 어눌하고 단순한 동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화려한 발레 액션을 펼쳐보이는 미녀들의 대결에 숨죽일 것이다. 국내에서도 개봉된 영화 <미이라2>에서 레이첼 와이즈와 패트리샤 벨라스케즈는 숨이 멎을 정도의 우아한 금빛 대결을 펼치는데, 이러한 여전사간 혈투는 첨단의 CG나 또다시 떼로 몰려드는 딱정벌레들에 비할 바 되지 않는 <미이라2>의 백미이다. 물론 2000년대 여전사들이 외우는 새 주문은 80년대 초반의 시고니 위버의 ‘저리가, 이년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세대 감각이 반짝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사 새계명
하나. 괴물 대신 남자와 싸운다
2001년 여름, <툼레이더>에는 순수한 의미에서 <배트맨>의 캣 우먼 같은 사악한 여성 타자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안젤리나 졸리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먹을 날리는 상대는 남자들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여성전사들이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하지 않고 ‘인간’ 혹은 ‘남자’들과 싸운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여성전사가 등장하는 1980년대 초반, <에이리언1>이나 <터미네이터1>에서, 시고니 위버와 린다 해밀턴은 모두 남자도 여성도 아닌 괴물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남성성기와 여성성기를 모두 지닌 에일리언은 어쩌면 에이즈시대의 타락한 우주 자궁에 대한 증후이자 변장한 모습으로 기어나온 또다른 백설공주의 마녀, 또다른 여성 타자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이러한 여성타자와의 간극은 좁혀지기 시작한다. 90년대는 여성전사들에게 순수한 혼돈과 악몽의 시기였다. 폭탄을 둘둘 감은 샌드라 불럭은 키아누 리브스 앞에서 어린애처럼 줄줄 짜고, <컷스로트 아일랜드>에서 남장을 한 지나 데이비스는 악당의 목 대신 자신의 성대를 자르는 부적절한 자의식을 보여준다. <롱키스 굿나잇>에서 그 지나 데이비스는 기억상실증과 사만다/찰리 즉 어머니/첩보원이라는 분열된 이중의 여성정체성에 시달리기도 한다. 90년대 여전사의 혼돈의 악몽은 뭐니뭐니해도 데이비드 핀처의 <에이리언3>일 것이다. 에일리언이 임신한 리플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저 유명한 에일리언/리플리의 투숏은 여성전사의 거울상으로의 에일리언을 형상화한다. 에일리언은 내부에서 나온 것이다. 세 제곱된 <에이리언> 속편에서 시고니 위버가 싸워야 했던 것은 자신의 육체였고, 몇년 동안 여자 구경 한번 못해 본 28명의 남성들이었다.
둘. 모성 이데올로기는 거부한다
또한 80년대 여전사들은 아무리 알통 굵기를 자랑해도 여전히 어머니들이었다. 어머니=강한 여성이라는 가치는 일종의 여성의 강인함을 모성 이데올로기의 그물을 통해서 저울질하는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초창기 여성전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불가리지 않는다. <에이리언>의 여전사 리플리에게는 유사 자녀인 뉴트가 있으며, <터미네이터1>에서 린다 해밀턴은 지구를 구할 자신의 아들이 있었다. 아니, 90년대 후반에도 <롱키스 굿나잇>의 지나 데이비스에겐 악당한테 납치된 딸이 있다.
또한 초창기 여성전사의 대모들은 흥미롭게도 남성동료들의 죽음으로 실질적인 보호막과 처녀막 모두가 없어져야 본격적인 여성전사의 행보를 내딛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에이리언>과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거쳐 확대되는 여성전사들의 남성성은 신성한 어머니라는 면죄부에 의해 설득력을 얻고, <터미네이터2>의 사라 코너는 망해 가는 지구를 위해서 정신병원에 갇히면서도 지구 종말을 대비해 싸우는 단 한명 남은 근육질의 성모로 격상된다. 80년대 뮤직비디오 속 마돈나의 어떤 면과 정확히 겹치는 이러한 이미지는, 그러나 90년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페이드 아웃되어갔다. 당분간, <미녀 삼총사>의 카메론 디아즈나 안젤리나 졸리가 ‘애들이 커졌어요!’라며 소리지를 일은 없지 않을까?
셋. 내 갈 길은 내가 결정한다
94년 나온 <스피드>에서 폭약에 둘둘 말린 샌드라 불럭에게 악당 역의 데니스 호퍼는 이렇게 말했다. “안심해. 니가 여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야.” 섹슈얼리티와 희생자라는 전통적인 맥락에서 할리우드 여전사들에게 일격의 한방을 가한 영화는 저 멀리 홍콩에서 날아들었다. 스스로 액션 히어로가 되기를 원한 <와호장룡>의 양자경과 장쯔이는 기술적인 면에서나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 할리우의 여전사의 이미지에 화룡점정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와호장룡>의 장쯔이는 더이상 니키타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총을 들어야 하는 가련한 여자가 아니라 스스로 무협 고수가 되고 싶어하는 자기 결정적인 액션 히어로이다. 장쯔이는 기존의 <스피드>나 <트위스터> 같은 영화에 나오는 샌드라 불럭과 헬렌 헌트의 톰 보이 이미지- 다 자라지 못한 여성, 그래서 필연적으로 남성 파트너의 조력을 얻어야 하는 위치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주막터의 싸움에서 혼자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시험해 본다. <와호장룡>의 순수 여전사들의 등장은 이전의 호러영화 장르나 이후의 액션영화에서 벌어지는 희생양(victim)의 가능성에서 여성전사들을 완전히 거두는 어떤 계기가 되었다. 2000년 들자 여성전사들에게도 이윽고 액션영웅으로의 완벽한 독자성과 영웅으로서의 판타지가 찾아든 것이다. 2000년대 여전사들은 말 그대로의 여신이다.
넷. 섹시하되 섹스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90년대 중반의 데미 무어나 지나 데이비스가 여성전사로 실패한 까닭은 바로 지나친 여성성의 거세에서 출발되었다고 진단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90년대는 시너드 오코너를 비롯해 데미 무어, 시고니 위버 등 여전사들의 삭발시대였다. 이제 와서는 얼굴에 멍이 들고 피 흘리는 카메론 디아즈나 안젤리나 졸리를 상상할 수는 없지만 당시 <커리지 언더 화이어>의 멕 라이언이나 <지 아이 제인>의 데미 무어는 뽀얀 운동장의 먼지와 땀 속에서 온갖 고생 끝에 자신의 기존 스타 이미지를 혹은 섹슈얼리티를 거세시켜나갔다. 이들은 장 클로드 반담이나 스티븐 시걸류의 ‘걸어다니는 거대한 알통’을 따라하려다 자멸해간 것이다.
관객 특히 여성관객의 반응은 지나칠 정도로 냉담했다. 지나 데이비스가 피를 철철 흘리며 총을 들었을 때, 데미 무어가 해병대의 혹독한 훈련을 거쳐 지 아이 제인이 돼갈 때, 그녀들은 남성들과 피 흘리게 경쟁하고 상처입었다. 이들에게 자신의 여성성은 ‘약한 것, 지는 것, 열등한 것’을 의미했는데, 끝끝내 혹독한 해병대 훈련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데미 무어에게 같이 훈련을 받는 흑인 병사는 이렇게 대꾸한다. “넌 뒤늦게 도착한 또다른 흑인과 같아. 너무 늦게 이사를 왔지.” 그런데 여성성을 도려내면서, 그들의 스타 이미지도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2000년이 되자, 여성전사들은 진흙탕에서 뒤엉켜 싸우는 대신 이제 ‘여신’이라는 여성 판타지의 위치에서 액션 영웅을 거두어들인다. 2000년 겨울 개봉한 <미녀 삼총사>의 흥행전략은 세명의 여전사 카메론 디아즈, 드루 배리모어, 루시 리우의 늘씬한 몸매에 여성 007의 이미지를 이식시키는 것이었다. 본드걸들이 본드맨들의 그림자 주변을 맴도는 사이, 이들은 <매트릭스>의 최첨단 CG방식으로 남자들을 일격에 쓰러뜨린다. 2000대의 여성전사들은 그만큼 화려하다. 최첨단 무기, 쭉쭉 빵빵한 몸매에, 배트맨이 지녔던 남성 집사까지 부리고 막대한 부와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기도 한다. 막강 여전사 라라 크로프트는 이전의 어떤 여성 영웅도 도달할 수 없는 흠집없는 여성전사 그 자체인 것이다.
정치적으로 교정된 폭력
변화하는 여성전사들에 대해 여성관객은 늘어가는 박스오피스상의 지각 변동으로 화답하고 있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쭉쭉 빵빵한 2000년대의 여전사들은 지금까지 남성관객 전유물로만 여기던 액션영화에 여성이라는 새로운 관객을 줄서게 만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2000년대 여성전사들이 여성관객에게 어떤 심리적 만족감이나 보상심리뿐 아니라 실질적인 여성 정체성에 변화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과거 SF와 액션영화를 적당히 비빔밥하여 남성들의 눈요기를 충족시켰던 <바바렐라>의 제인 폰다나 라켈 웰치류의 백치미인형 여성전사도, 물신화된 근육이 그대로 남성성을 보장하는 여자 장 클로드 반담도 아니다. 새로워진 여성전사들의 대공포화 속에서 90년대를 풍미했던 화장도 거의 안 한 비쩍 마르고 유약한 기네스 팰트로 타입의 여성들이 할리우드를 점령하던 시절은 끝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학적인 면에서 보면 적어도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가 세상을 구할 수는 없어도, 공격성이라는 행동이 남성하고만 연합되어 있다는 성적인 편견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조지타운대 사회학 교수 수잔 월터즈는 <보스턴 헤럴드>에 확신에 찬 여전사의 당당한 행동을 ‘정치적으로 교정된 폭력’이라고 명명했다. 90년대 텔레비전 시트콤에서 로잔 바가 오천평 같은 몸매로 착한 여성 혹은 예쁜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행동을 파괴하면서 정형화한 이상적 여성성에 파격을 가하던 것과도 달리, 이들은 로잔의 자해적인 방식을 피하면서도 여성관객에게 빈약하고 비쩍 곯은 보이시한 양성성 대신 건강하고 싱싱한 육체를 소유한 양성성도 꽤 세상을 헤쳐나갈 만하다는 확신과 환상을 동시에 심어주고 있다.
과연 여전사들은 페미니스트의 원군인가
그러나 이러한 여전사의 뇌쇄적인 매력에 대해 모든 여성 평론가들이 두손 들어 환영하고 있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새로워진 여성전사들의 화려한 액션과 몸매가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진정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데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여성전사의 변화에 더 커다란 심리적인 혜택을 얻는 것은 바로 남성들임을 지적하면서 여성전사의 이미지가 여성의 몸과 마음을 이중구속할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일례로 남성관객은 라라 크로프트에게서 강한 여성에게 보호받고 싶은 본능과 싱싱한 여성 육체에 대한 관음증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 오히려 2000년의 또다른 안젤리나 졸리들은 과거 신데렐라가 착한 여성 콤플렉스를 만들어냈듯, 여성들로 하여금 슈퍼우먼 콤플렉스를 양산시키고, 액션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과 사회적 성취를 혼동시킬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이 여성전사들은 ‘섹시하되 섹스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략은 성적 관심을 끌되 성 행동은 억압한다는 1900년대 초반 히스테리 환자들의 전략과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여성 영화평론가 바버라 크리드는 90년대 여성전사들의 무성적 전략과 관련, 그들의 양성성이 레즈비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바버라 크리드는 여성전사의 몸을 lesbian body라 명명했다) 동성애 공포에 사로잡힌 주류사회에서 이러한 여성전사의 몸은 공포와 매혹의 근원이라고 분석한다.(<에이리언3>에서 리플리의 몸은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남성 판타지 안에서 재구성된 또다른 괴물일지도 모른다.) 2000년대 여성전사의 강화된 섹슈얼리티는 궁극적으로 여성전사의 계보상에서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퇴행의 기미라고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 할리우드 여전사 나가신다!
▶ 여전사 캐릭터 열전
심영섭/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