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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영화제 | 신이 축복한 재능, 1백년의 영화를 살다
2001-07-04

포르투갈 영화제 7월5일부터 10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올리비이라 걸작선 등 9편 상영

빔 벤더스의 영화 <리스본 스토리>(1994)의 한 장면에서 우리는 현자처럼 보이는 노인을 만나게 된다. 신을 닮을 수 있기에 예술가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말하는 그는 바로 포르투갈의 거장 영화감독 마뇰 드 올리베이라(Manoel de Oliveira)이다. 비록 잠깐

동안이나마 그가 등장하는 이 장면을 통해 아마도 벤더스는 영화 속에서 올리베이라라는 이가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를 슬쩍 언급하고 그럼으로써

그에 대해 경외의 눈길을 보내고자 한 것 같다. <리스본 스토리>는 우선 리스본이라는 도시를 답사하고 탐구하는 영화다. 그런 영화가

올리베이라 같은 이를 외면하고 지나간다는 것은 불완전함을 자초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올리베이라야말로 현재 포르투갈이 아주 떳떳하게

내놓을 수 있는 위대한 예술가일 테니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리스본 스토리>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 그것의 지난함과 무용성에

대해 회의하고 고민하며 성찰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럴 때 올리베이라는 유용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지혜로운 촌로 역할을 떠맡게 된다. 60여년이란

긴 세월 동안 영화 작업을 해왔고 또 지금도 여전히 눈부신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는 기꺼이 찾아가 뵙고 말씀을 들어도 좋을 만큼 존귀한

존재인 것이다.

성공적인 데뷔, 그리고 더딘 작품활동

이 명철한 ‘포르투갈 영화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놀랍게도 거의 한 세기 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마뇰 칸디도

핀토 드 올리비에라가 태어난 것은 1908년,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인 오포르토에서였다. 부유한 부르주아 가문에서 나고 자란 그를 먼저 매혹시켰던

것은 스포츠말고도 비행기, 자동차 경주같이 꽤 사치스런 것이었다. 그러고 난 뒤에야 영화의 매혹이 젊은 올리베이라를 덮치게 된다. 스크린 속의

세계에 빨려들어간 대부분의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영화라는 것을 새로운 시대의 기호로 보았고 직접 그 새로운 세계 속으로 뛰어들었다.

1931년, 올리베이라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카메라를 가지고 찍은 자신의 첫 영화를 완성하게 된다. <두오로 강>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영화는 고향 오포르토를 지나가는 강에 대한 무성 단편 다큐멘터리, 혹은 ‘도시 교향악’이었다(이 영화를 만드는 데 올리베이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 바로 발터 루트만의 <베를린: 도시 교향악>(1927)이었다). 올리베이라의 이 첫 영화는 거의 아방가르드적이라는

수사를 붙일 수 있을 만큼 창의적인 몽타주 기법으로 유럽의 비평가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두오로 강>을 만들었을 때 올리베이라의

나이가 스물셋이었으니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경력은 결코 늦게 시작된 게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초기 경력은 이상하게도 유능한 젊은이들이

대개 그러던 것과는 달리 탄탄대로를 타고 쭉쭉 뻗어나가질 못했다. <두오로 강> 이후 60대에 들기까지 근 40여년 동안 올리베이라는

얼마 되지 않는 소수의 작품들만 정말이지 긴 시차를 두면서 만들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영화감독 올리베이라에게 청년기와

중년기는 거의 존재하질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이 예순셋, ‘생산의 시기’를 맞다

올리베이라는 <두오로 강>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뛰어 1942년이 되어서야 첫 장편극영화 <아니키

보보>를 세상에 내놓는다. 이것은 “아니키 베베, 아니키 보보…” 하고 자신들만의 주문을 외우는 어린 아이들에 대한, 애정 가득한 보고서와

같은 영화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카를리토스는 같은 또래의 예쁜 여자아이 테레지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한다. 문제는 테레지나와 특히 가까운 친구인

에두아르도인데, 카를리토스와 에두아르도는 툭하면 주먹질을 해댈 만큼 서로 껄끄럽기만 한 사이인 것. 어느날 카를리토스는 테레지나에게 선물하기

위해 상점 진열장에 놓인 인형을 주인 몰래 훔친다. 카를리토스는 이제 테레지나와 가까워지지만 그 대가로 내밀한 ‘뒤쫓김’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설득력 있는 극적 전개도 돋보이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니키 보보>를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것은 아이들의 세계에 카메라를

갖다댔다는 점, 그리고 그 아이들을 스튜디오가 아닌 거리로 데리고 나갔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니까 올리베이라의 이 영화는 네오리얼리즘의 주요한

양식을 앞질러 보여줬던 것이다. 비록 그의 영화가 얼마 뒤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질 영화들보다는 훨씬 경쾌한 분위기에서 진행되긴 하지만.

올리베이라는 또다시 오랜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아니키 보보>로부터 무려 21년을 더 소요한 뒤 두 번째 장편 <봄의 제전>(1963)을

완성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직 풍요로운 ‘생산의 시기’가 도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올리베이라의 경력이 본격적으로 만개하게 되는 것은 1971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예순셋에 <과거와 현재>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이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올리베이라는 모더니즘적인 형식을 통해

사랑에 대해 고찰하는 작품들을 연속적으로 만들었는데, <과거와 현재>에서 <베닐데 혹은 성모 마리아>(1975), <운명적인

사랑>(1977), <프란치스카>(1981)로 이어지는 이 일련의 영화들을 가리켜 올리베이라는 ‘좌절된 사랑의 4부작’이라는

별칭을 달아주기도 했다. 생애 처음으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치기 시작하던 이 당시 올리베이라의 최고 관심사는 아무래도 형식실험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그는 영화와 다른 예술형식 사이의 융합 혹은 연계,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성된 하나의 ‘세계’를 제시해줄 수 있는 영화의 능력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여기서 다른 예술형식이란 주로 연극을 가리킨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주장하기까지 했었다. “영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연극이다. 영화는 연극을 포착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비단 구두>(1985)라는 영화는 이 같은 혁신적 형식주의자로서

올리베이라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러닝타임이 무려 7시간에 달하는 이 영화는 폴 클로델의 희곡을 각색한 것으로 무대에 올린 연극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렇게 해서 영화는 그 층위가 두번이나 이동한, 그래서 원래의 것과는 달라진 그런 ‘리얼리티’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후의 살아있는 전설

70년대 이후 올리베이라 영화에 대한 리뷰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올리베이라가 00살에 만든 영화”가 될

것이다. 그건 단지 그가 물리적으로 장수하는 감독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장수하는 드문 감독이기 때문에 경탄스러워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상투어구 같은 것으로 보인다. 올리베이라의 연령과 관련해 또 하나 놀라운 것은 ‘후기’(사실 이런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결례가 되는 일처럼

느껴지지만)에 들어 작업에 오히려 놀랍게도 가속도가 붙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청장년기의 ‘무산(無産)의 시기’를 깨끗이 만회라도 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면에서 <세계의 시초로의 여행>(1997)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하자면 영화감독 올리베이라에게 “장수란 신이 내린

축복”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90년대에 올리베이라는 평균 잡아 매년 한편꼴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이 노감독이 80대, 90대의 나이에 만든 이 영화들은 어느 한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아주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굳이 공통된 카테고리를 하나 만든다면 그것엔 ‘만족스러운 영화’, 또는 ‘수준높은 영화’

정도의 레이블이 붙을 것이다). <수도원>(1995)에서 대담하고 또 그래서 유쾌한 루이스 브뉘엘적인 세계를 통과했던 올리베이라는

<세계의 시초로의 여행>에선 자기 연민이 느껴지는 조용한 회상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편지>(1999)에서는

언뜻 에릭 로메르를 연상케 하는 감정교육의 세계로 들어서기도 했다. 17세기 프랑스 작가 라 파예트 부인이 쓴 <클레브 공작부인>을

현대 세계로 무대로 옮겨놓은 <편지>는 올리베이라가 오래 전부터 갖고 있던 귀족주의적이고 고전주의적인 감수성을 의고주의적이지만은

않은 방식으로 풀어놓았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주인공 샤르트르는 자신을 보고 첫눈에 반한 은행가 드 클레브와 결혼을 한다. 그렇게 열정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샤르트르 앞에 멋진 가수 페드로가 나타나자 샤르트르는 감정상의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영화에는 수많은 이동과 몇번의 죽음과

같은 동적인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올리베이라는 그것들을 전부 중간자막으로 생략처리한다. 그리고는 샤르트르가 경험하는 감정의 갈등에만

온전히 초점을 맞춘다. 요컨대 <편지>는 아주 ‘중세적인 세계’를 현대적인 방식을 통해 되살려놓고 있는 것이다.

벌써 93살이 된 올리베이라는 올해에도 신작 <나는 집으로 간다>를 들고서 칸을 찾은 바 있다. 어느 연극배우의 일상을 그린 이

영화 역시 “고귀하고 잘 연마한 다이아몬드 같은” 작품이라는 호평을 들으며 이 노대가가 여전히 건재함을 재확인시켜주었다고 한다. 오즈 야스지로나

로베르 브레송과 비슷한 연배이면서 아직도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있는 올리베이라는 확실히 위대한 영화감독 세대의 마지막 살아 있는 전설이다. 미국의

영화 평론가인 스튜어트 클로원스가 그를 두고서 “영화의 올림포스”(a Cinematic Olympos)라고 부른 것은 정말이지 적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 영광스러운 명칭 뒤에 붙은 수식어구이다. 클로원스는 “영화의 올림포스”라는 멋들어진 말 뒤에

“그곳의 신들이 미국 스크린에 출입이 금지된”이라는 부정적인 수사를 연결시켰다. 올리베이라가 위대한 시네아스트가 맞긴 한데 아쉽게도 그 명성에

어울리는 광범위한 보급력은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긴 공개가 허용되지 않은 곳이 어디 미국의 스크린뿐이겠는가.

홍성남/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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