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른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니면 그 어느 쪽도 아닌, 말하자면 어느 쪽으로도 분류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인지 어떤지에 대해서도
나는 아는 바가 없다. 하루의 빵을 위해 당신이 아침 몇시에 일어나고 몇호선 전철에서 흔들리며 아침 신문을 읽는지, 일터를 향해 걸어갈 때
당신의 가슴에 당신만 아는 잔잔한 가락이 흐르는지 어떤지, 나는 모른다. 어제 아침 지하철 역사 계단을 오르면서 당신은 잠깐 발을 헛디디지
않았던가? 알 수 없다. 당신은 걸음걸이가 아직 서투르지 않은가, 아기처럼? 아니, 어쩌면 당신은 아기였던 때를 기억하기 위해 가끔 허공을
밟곤 하지 않는가? 알 수 없다. 나는 당신에 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내가 당신을 잘 모르는 것은 당신의 홈페이지에 당신 자신에 관한 신상 정보가 너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홈페이지를 만드는 이유와 당신이
홈페이지를 지키는 이유는 너무 달라 보인다. 사람들이 부산떨고 자기네 홈페이지에 오만 가지 쓰레기를 쑤셔넣고 있는 동안 당신의 홈페이지는 비어
있다. 내가 처음 방문했을 때, 당신의 홈페이지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아무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다음 줄,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가 당신의 홈페이지 1장 2절이다. 이것이 당신에 관한 정보의 전부이다.
아니, 한줄 더 있다. “실패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이것은 당신의 좌우명인가? 물려받은 가훈인가? 어림없는 소리, 이런
가훈을 내리는 집이 지금 대한민국 천지에 어디 있을라고? 그러고보니 그건 어디 딴 데서 듣던 소리 같기도 하다. 어디서 들었더라? 어떤 친구가
어떤 친구의 어떤 소설을 두고 “위대한 실패”라 말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다. 혹시 어떤 이의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 아니던가? 당신은
시를 읽는 사람인가? 시인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당신이 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시 한편을 나는 당신의 홈페이지 제2장에서 발견한다.
“작은 상자는 처음으로 작은 이빨을 내고/ 그녀의 작은 길이는 조금 더 길어지고/ 작은 폭과 작은 공허/ 그리고
그녀가 가진 모든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자랐습니다/ 한때 그녀를 담고 있었던 찬장이/ 지금은 그녀 안으로 들어왔어요/ 작은 상자는 점점 더
커지고 커지고 커져서/ 방이 그녀 안에 들어가고/ 집이 들어가고 도시와 땅덩이와/ 한때 그녀를 담았던 세계가 모두 그녀 안으로 들어왔지요/
그런데 작은 상자는 어린 시절을 기억했어요/ 그 시절이 그립고 그리워/ 그녀는 다시 작은 상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그 작은 상자에는/ 온 세계가
작아진 몸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 상자를 쉽게 주머니에 넣을 수 있고/ 쉽게 훔치고 쉽게 잃어버릴 수 있어요/ 잘 간수하세요, 작은
상자를.”
하지만 당신은 마냥 시만 읽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그렇고 그런 시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제 내가 들어갔을 때 당신의 홈페이지 제3장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작은 상자의 비어 있음을 간수하기 위해 나는 기억하고 판단한다.” 내가 깜짝 놀란 것은 그 다음 구절이다.
“두 종류의 마피아 집단이 지금 한국에서 썩은 시궁창 냄새를 온 우주에까지 풍기고 있다. 언론을 욕되게 한 자, 그러므로 언론의 자유를 말할
자격이 전혀 없으면서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신문 마피아 집단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마피아를 두둔하기 위해 머리 굴리는 우둔하고 잔인한
정치 마피아 집단이다.” 그리고는 언제 그런 소리했느냐는 듯, 악취를 쫓기라도 하려는 듯 다시 이런 시 구절이 이어 나온다.
“작은 상자에/ 돌을 넣어보세요/ 거기서 새가 나올 거예요/ 당신 아빠의 뿌리를 넣어보세요/ 우주의 굴대가 나올걸요/
작은 상자에/ 새앙쥐를 넣어보세요/ 진동하는 언덕이 나올 거예요/ 당신의 머리를 던져 넣으세요/ 두 개의 머리를 얻을 거예요.”
그러고보니 잊었네, 깜빡. 당신이 써놓은, 당신의 것인지 다른 이의 것인지 모를 그 시에 ‘작은 상자’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네, 당신의 홈페이지가 바로 그 작은 상자라는 것을. 마법의 상자, 작은 상자의 간수자여, 기억해다오, 나도 당신의 홈페이지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