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라는 영화가 있었다. 운동권 출신의 우울한 일상을 그렸고, 러시아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서울대 운동권 출신이 러시아 현지에서 찍은 영화라고 해서 화제가 됐다. 제작진도 배우도 모두 신인인데다 세련된 작품이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인물들의 쓸쓸한 내면이 실린 러시아 설원의 스산한 이미지는 오래 남았다. 남다른 데뷔작을 남긴 김응수(37) 감독이 5년 만에 명필름에서 두 번째 작품 <욕망>을 디지털로 찍는다. 뜻밖에도 이번엔 포르노그라피다. 젊은 부부가 있고, 그 두 사람과 각각 동성애와 이성애를 나누는 한 청년이 있으며, 그 청년을 따르는 또 한 여인이 있다. <욕망>은 제목 그대로 이들의 욕망을 파고드는 영화다. 연기자는 모두 오디션을 통해 선발하며 올 10월부터 두달간 촬영할 예정이다. 소재로 한몫 볼 작정인가라고 의심스런 눈길을 보낼 사람도 없진 않을 텐데, 김응수 감독은 관능의 아름다움을 정직하게 추구함으로써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진지한 연출의도를 말하고 있다.
뜻밖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쁘게는 시류에 편승한다는 시선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질문 많이 받는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같은 영화 찍은 사람이 어떻게 포르노 찍겠다는 생각했냐고. 3년 전부터 준비했으니, 나로선 오래 품어온 프로젝트다. 첫 작품과 연관성이 없는 영화가 아니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에선 80년대의 기억이 어떻게 90년대의 일상에 침투해 강박증의 그물을 만드는지를 그리려고 했다. 이번에는 그물 속에 있던 새들이 그 그물을 뚫고 나와서 자기를 응시하는 영화다. 남과 달라지지 못하게 하는 그물을 벗어나 좀더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어떤 길일까를 고민하려고 한다.
좀 추상적으로 들린다. 이를테면 보통의 포르노와 어떻게 다른가.
먼저 말하고 싶은 건 포르노라는 장르를 의식적으로 택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그게 포르노적인 것으로 비치는 것뿐이다. 다른 점을 말하라면, 훔쳐보는 즐거움을 주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관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말하고 싶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걸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것 자체로 아름다운 관능과 욕망을 그리고 싶은 거다.
훔쳐보기와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운 관능이란 얼핏 감이 잘 안 잡힌다.
훔쳐보려는 관객의 의도 자체를 봉쇄할 수는 없다. 그리고 영화는 어떤 의미에선 훔쳐보기의 일종이기도 하고. 다만 나는 즉각적인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거나 그걸 위해 어떤 배려를 하지 않겠다는 거다. 예를 들면, <욕망>에는 옷을 벗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우리가 집에서 샤워하기 위해 혹은 속옷을 갈아입기 위해 옷을 벗을 때, 어떤 특별한 느낌을 갖지 않는다. 그런 자연스런 느낌으로 찍을 작정이다. 이야기의 흐름과 관계없이 신체의 특정 부위를 강조하는 카메라 기교 같은 건 없을 거다.
어쨌든 의외다. 첫 작품을 떠올리면서, 정치적 좌절을 밑그림으로 삼은 포르노그라피가 될 거라고 짐작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나 <감각의 제국>처럼 어둡고 스산한 영화일 거라고.
물론 그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생각을 가다듬기는 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영화가 가능하려면 그 사회 나름의 문화적 축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남자주인공은 관념적이고 정치적인 독백을 하는데, 만일 한국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나온다면 뜬금없을 것이다. 표현수위도 마찬가지다. 솔직하게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무조건 과격하고 자극적으로 흐른다면 그건 무책임한 용감함일 것이다. 관객이 보고 나서, 손뼉치면서, 맞아 저게 나야, 라고 말할 만한 보편적인 우리의 욕망을 정직하게 그리고 싶은 거다.
정치나 사회적인 배경을 깔거나 포장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물론이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관능을 보여주고 싶다. 욕망을 정면으로 응시하겠다는 거다. 그걸 통해 나를 자유롭게 하고 싶기도 하고. 주인공들은 욕망을 추구하지만, 실패도 있고 좌절도 있겠지만 그것도 기꺼이 받아들여 삶의 긍정적 에너지로 삼게 된다. 궁극적으로 어떤 정치적 해석이 사후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특정한 정치적 함의를 담진 않을 작정이다. 그러니 정치적 포르노그라피는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에 이르게 됐는지가 궁금하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를 찍은 지가 5년이 넘었다. 그 시간은 나를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됐다. 80년대의 정치적 이상주의는 우리에겐 일종의 환상이었다. 우리에겐 어떤 욕망이 있었고, 정치적 이상주의는 그 욕망이 억압당함으로써 만들어진 환상이었다. 정치적 이상주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그게 환상이 아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었을까. 그렇게 정치적 이상을 높이 외치던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벤처에 뛰어들 수가 있을까. 나는 상대적으로 얽매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시대를 살면서 나 역시 내 욕망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 욕망을 나 스스로 투명하게 관찰하는 게 무엇보다 나에게 필요했고, 사람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정치적 이상주의를 단순히 한순간의 환상으로 치부하는 게 아니라 아직도 강박적인 시대적 채무감을 무의식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지 않는가. 어쩌면 8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낸 사람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물론 이상주의 자체는 소중하다. 나는 사회주의자 감독 켄 로치를 존경한다. 그 사람이 보여주는 정치적 단순성은 다른 걸 못해서 택한 초라한 단순성이 아니라 복잡하고 많은 걸 한마디로 명료하게 요약하고 추구하는 힘있고 적극적인 단순성이다. 다만 나는 한 개인의 내면을 자유롭게 하는 것도 정치적 이상주의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할 수 있다고 믿는 거다. 그걸 가로막거나 억압하면서 만드는 이야기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아니 동의하기 힘들다기보다 그것 외의 다른 이야기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예컨대 <공동경비구역 JSA>는 무척 감동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울었고 나도 많이 울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걸 보고, 아 저런 걸 우리가 그리고 내가 열망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아파하고 있던 시대의 상처를 어루만진 것이다. 그러나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각각의 개인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그들의 개인적 삶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저들에게도 아주 개인적으로 내면적인 욕망이 있을 텐데, 그것도 소중하지 않을까. 그런저런 생각들이 <욕망>이란 영화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보면 언뜻 불륜을 통한 자아각성기인 것 같기도 하다.
그건 아니다. 불륜은 하나의 모티브일 뿐이고,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 그런데 그 욕망이란 끝없는 대상화의 과정인데, 어떤 순간에 주인공들은 그 대상이 정말 나의 욕망이었나, 하고 회의한다. 그래서 좀더 자신을 깊이 알게 된다.
어쨌든 제작자들 눈에 띌 만한 프로젝트인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사실은 제작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난해하다는 거다. 복잡하거나 심오해서가 아니라 뭔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멜로드라마류의 심리적 동기가 있다면 좀더 쉽게 다가오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말로 설명하면 결국 반복적이 될 수밖에 없는데, <욕망>은 말 그대로 욕망의 정체에 관한 영화다. 그동안 나는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동일시하기가 힘들었다. 멜로에서 말하는 사랑을 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혹시 멜로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환상일 뿐이고 다른 욕망의 대체제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게 분명한 건 욕망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온갖 잡지와 책들을 봤다. <사건과 실화> 같은 잡지도 보고 정신분석학 책도 봤다. 그러면서 생각을 조금씩 정리했다. 그 결과가 <욕망>의 시나리오다. 제작사 두세곳과 이야기가 잘 안 돼서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지원공모에 응했는데, 뽑히진 않았지만 내 시나리오를 본 영진위 위원인 명필름의 이은 감독이 한번 해보자고 제안해 고맙게 받아들인 거다.
소재가 소재니만큼 표현수위에 대한 고민도 했겠다.
자연스럽게 보여줄 거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치장하지도 않고 의식적으로 가리지도 않을 거다.
표현수위를 놓고 싸울 생각은.
전혀 없다. 내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스캔들이 있진 않을 거다.
HD카메라로 찍는 디지털영화다. 어떤 이점이 있나.
제작비 절감을 위한 건 아니다. 디지털은 다가오는 매체이고 그게 주는 색다른 느낌 때문이다. 필름은 칠해진다는 느낌이 있는데, HD는 박힌다는 느낌이다. <필로우 북> <어둠 속의 댄서>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같은 HD영화를 봤는데, 느낌이 참 좋았다. 워크숍까지 해보면서 그게 필름보다 자유롭고 원하는 색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제작비 10억원이면 상대적으로 낮은데, 제약은 없나.
제작시스템이 잘돼 있고 합당한 컨셉이 있으니까 그 정도면 된다고 생각한다.
제작준비는 얼마나 이뤄졌나.
시나리오는 일찌감치 돼 있고, 스탭진도 꾸렸고, 요즘은 헌팅중이다. 전부 서울에서 찍어야 하는데 서울은 정말 영화 찍기 나쁜 공간이다. 컨셉이 없다. 한 50군데 돌아봤는데,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 구석구석 보기 힘들고 걸어다니기는 너무 힘들고 해서, 요즘 킥보드를 타고 돌아다닌다. 하루종일 다니면 한 군데 정도 얻는다.
촬영감독은.
<버스정류장> 찍는 박기웅씨다. 전주에서 3인3색 찍었고 김소영 교수의 <거류>도 찍었다. 개인적으로는 학교 선배이고 러시아에서 함께 영화를 함께 공부한 오랜 동료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에서 촬영부도 하고 연기자로도 일했다. 내 시나리오에 처음부터 박수쳐준 사람이기도 하다.
주인공을 전부 오디션으로 선발한다. 어떤 기준을 갖고 있나.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이면 된다. 밝고 단순한 느낌을 원한다. 연기연습 많이 한 사람보다 자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게 몸에 밴 사람. 그런 느낌을 중시할 거다. 광고처럼 보여서 미안하지만 6월11일부터 닷새 동안 접수받아서 6월30일날 공개오디션을 한다.
글 허문영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 정진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