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9일부터 31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국제평화영화제가 개최된다. 참여연대와 SBS가 개최하는 이 영화제에선 반전과 평화를 주제로 한 13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국제정치학도이기도 한 영화평론가 김종연이 이 행사에 관한 단상을 피력한다. 편집자
누군가의 말대로 개념이라는 것은 하나의 예외에서 시작된 얼룩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번지고 번져나가서 결국 참을 수 없을 만큼 혹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개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의 생각은 세계화나 국제화란 이름의 속도를 가지고 있는 ‘인터내셔널’이라는 별명의 ‘세계’에서는 퍽이나 익숙한 것이다.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전쟁’도 커왔다. 그것은 ‘분쟁’이나 ‘국지전’의 다양한 단계들을 거친 실로 거대한 얼룩이다. 한반도 사람들이 ‘전쟁’의 여파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면서도 그것을 개념 이상으로 사고하지 않게 되는 원인이다. 하지만 개념이라고 부르기엔 전쟁은 너무나도 생생한 상흔들을 개념이 아닌 자연인들에게 부과한다. ‘반전’이 주요한 관심과 화두로 나타나는 것은 대략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쟁’과 ‘전쟁’이 한궤에 있으나 같은 것이 아니듯, ‘반전’과 ‘평화’ 또한 그렇다.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할 수 없듯 반전이 곧 평화를 뜻하는 것일 수는 없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미국 내부의 반전운동그룹이 과격한 국내 테러 단체로 변해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웨더 언더그라운드>(The Weather Underground, 샘 그린·빌 시겔, 미국, 2003)와 같은 영화가 포함된 국제평화영화제(8월29∼31일, 서울아트시네마)가 오히려 우리를 갸우뚱하게 만들거나 아리송한 감정을 자아낸다면 실은 우리가 그 ‘평화’를 개념 이상으로는 모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제의 상위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SBS와 참여연대 공동의 캠페인 이름이 ‘평화를 이야기합시다’여야 한다는 것은 사실 개념과 현실이라는 두개의 좌표축에 어정쩡하게 놓여 있는 이 얼룩과 같은 전쟁과 평화가 좀더 현실의 좌표축으로 근접하도록 하는 싸움이 먼저 필요하다는 사실의 반영이다.
이번 영화제의 프로그램들은 따라서 너무 느슨하거나 혹은 너무 포괄적으로 느껴지기는 해도 ‘이야기하기’를 위한 다양한 시선 또는 출발점들로서 영화들을 배치해 놓고 있다. <하얀 전쟁>(정지영, 1992)이나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Redux,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미국, 2001)과 같은 지당한 선택이 포함된 것은 물론이고 최근 개봉작인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Pianist, 로만 폴란스키, 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 2002)가 들어간 것, 그리고 다소는 익살스럽게도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이 선택된 것은 일단 ‘평화’보다는 ‘영화제’라는 점을 고려한 선택이기도 하고 전쟁과 평화라는 화두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이들의 시선의 출발점으로 선택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제의 가장 주목할 부분이자 ‘평화를 이야기함’에 좀더 닿아 있는 것은 전쟁과 평화와 관련되어 있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다양한 시선들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들이다. 그것은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지원을 통해 가능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정신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침묵의 외침>(안해룡·박영임·김정민우, 2003)에서 가해자인 일본을 피해자의 시선으로 보는 사이, 패전국 군대였던 일본군의 시선으로 참혹한 전쟁의 이미지들을 바라보는 극영화 <버마의 하프>(ビルマの竪琴, 이치가와 곤, 일본, 1956)가 스스로를 피해자로 들여다본다. 또 다큐멘터리 <일본의 악마들>(Japanese Devils, 마쓰이 미노루, 일본, 2001)에서는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전범들조차 국가와 조직의 이름 아래 소외된 또 하나의 피해자들임을 사유하는가 하면, <아프간의 봄>(Afghan Spring, 쓰치모토 노리아키 외 2명, 일본, 1989)은 전쟁이 끝난 아프가니스탄의 정경을 제3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러한 이질적이고 대조적인 시선의 교차는 전쟁에서 가장 대표적인 약자인 여성의 시선을 통해 전쟁을 추적하는 두편의 수작 다큐멘터리 <투쟁하는 자매들>(Sisters in Resistance, 마이아 웨체슬러, 미국·프랑스, 2000)과 <이것은 사는 게 아니다>(This is Not Living, 알리아 아라소굴리, 팔레스타인, 2001)에서도 마찬가지다. 전자가 2차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인 위대한 여성정신의 발굴이라면 후자는 두려움과 피로에 지친 생활인으로서의 여성의 시선을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보게 해준다.
다양한 시선이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반전영화제’가 아니라 ‘평화영화제’라는 가르치지 않는 포괄성은 충분히 평화를 ‘이야기하기 위한’ 입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다양한 시선의 교차가 주로 다큐멘터리 부문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게 아쉽다. 99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의 <아름다운 사람들>(Beautiful People, 자스민 디즈다르, 영국, 1998) 정도가 그런 갈증을 조금 해소해 주기는 하지만(문의: 02-723-5300, http://www.peace2003.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