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오늘이 인생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 주머니에 쑤셔넣은 해직통고서만 생각하면 선로보수 노동자 원씨는 눈앞이 캄캄해진다. 해결되지 않은 아들의 병원비는 어떡하며, 당장 내일부터 먹고살 일은 어떡하나. 노동자들에게 매일 간식으로 지급되는 빵과 우유로 허기를 달래면서 목숨을 부지할 필요조차 그는 느낄 수 없다. 열차사고를 위장해 보험금이라도 타낼 수 있다면 아예 깨끗이 죽고 말리라.
강원도 정선군 구절리, 수해 때문에 폐선으로 남은 열찻길 구간에서 조용히 영화가 촬영 중이다.
♣ 자살을 사고로 위장해 보험금을 탈 요량인 노동자 원씨. 눕긴 누웠으나, 열차는 오지 않고 마음은 무겁다. 노동자 원씨를 연기하는 배우 원풍연은 이 영화의 유일한 배우. 현장에 동료배우가 없다는 것이 생각보다 당사자를 많이 외롭게 하는 모양이다. 그는 촬영을 쉬는 순간마다 구석에 조용히 있거나 아예 없어지곤 했다.
올해 코닥이스트만 단편제작지원 시나리오 공모전의 당선작인 <빵과 우유>는, 자살을 결심했던 철길노동자가 기찻길 위에 떨어진 낙석을 처리하느라 ‘죽기를 포기하고’ 만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신연 감독은, 혼자 철길을 걸어가는 노동자의 뒷모습에서 인상을 받아 시나리오를 썼고, 배우를 물색하러 대학로를 돌아다니던 중 건물 벽에 그려진 광부의 얼굴에서 친동생이 떠올라 그를 섭외했다. 감독의 동생 원풍연은 연극배우다.
한여름의 쨍한 태양을 받으며 촬영이 진행돼야 하는데 그물거리는 날씨는 비협조적이기만 했다. 좀처럼 환해지지 않는 하늘을 수시로 올려다보며 스탭들은 바람따라 움직이는 구름의 모양으로 언제쯤 해가 드러날지 가늠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촬영 일정도 조금씩 늦어졌지만 <빵과 우유>는 9월 중순까지 후반작업을 포함해 모든 작업을 완료한 뒤, 코닥이스트만 지원작들에 자동으로 본선 진출 기회가 주어지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다. 사진 정진환·글 박혜명
♣ “우린 준비가 다 됐다니까. 날씨만 받쳐주면 돼, 날씨만.” 잠깐이었지만 해가 나는가 싶어 후닥닥 촬영 준비에 들어갔던 스탭들. 다시 하늘이 어두워지는데도 무덤덤하다. 이런 식으로 김샌 적이 벌써 골백번이니, 해탈에 이를 때도 됐다.(왼쪽 사진) ♣ 촬영 리허설 장면을 소형캠코더로 테스트 촬영해 확인하고 있는 촬영부.(오른쪽 사진)
♣ 배우, 아니 동생의 모자를 고쳐 씌워주고 있는 감독이자 형. 둘은 감독의 전작 <자장가>에서 작업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너무 많이 싸워서 다시는 같이 안 하려고” 했지만, 이 역할을 할 사람은 동생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형은 또다시 캐스팅을 제의했고, 동생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왼쪽사진) ♣ 해가 날 참인가보다. 감독 이하 스탭들은 후닥닥 촬영 모드로 돌입, 철길 위에 발을 올려놓고 머릿속으로 보험금을 계산하는 원씨의 테스트촬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렇게 리허설과 테스트를 마치고 슛 들어가려는 찰나 도로 하늘이 어두워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오른쪽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