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뻘서 굴러보실라요?
“아아….” 버스에서 내린 취재진의 입에서 일제히 아우성이 터져나온다. 작렬하는 ‘땡볕’에 살이 바로 익을 것 같다. 하지만 촬영장 안으로 한발씩 들여놓는 순간, 엄살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두껍고 무겁고 숨막히는 갑옷으로 몸을 둘러싼 200여명의 연기자가 그늘도 거의 없는 벌판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 8월의 태양이 모처럼 본색을 드러낸 8월4일 충남 부여의 <황산벌> 촬영장 공개는 그렇게 숙연하게 시작됐다.
이날 촬영은 차라리 처절했다. 날씨도 날씨려니와, 열흘 넘게 커다란 스케일의 액션장면을 찍어온 배우나 스탭들의 피로가 누적된 터라 실제 전장이라도 된 양 모두 헐떡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날 촬영분이 신라군의 공세에 대해 백제 병사들이 결사항전을 굳게 다짐하는 장면이었던 탓인지 처절함은 더해 보였다.
촬영장소인 백제의 목성 안쪽은 공사장을 방불케 했다. 폭우가 막 그친 뒤의 진흙탕을 묘사하기 위해 불도저와 소방차가 동원됐으며, 스탭들은 삽을 들고 땅을 뒤집어 엎고 있었다. 전날 신라군과 백제군이 서로 진흙을 던지며 싸우는 장면을 찍었기 때문에, 장면을 연결하기 위해 보조연기자들은 서로의 얼굴과 갑옷에 진흙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이들을 진흙탕 위에 이리저리 뒹굴게 하는 이준익 감독의 모습은 해병대 신병 훈련장의 조교를 연상케 했다. 이쯤 되면 ‘황산벌’이 아니라 ‘황산뻘’이라 할 만하다. 가뜩이나 더운 상황인데도 한켠에서는 애써 만들어놓은 막사에 불을 놓았고, 폐타이어를 태워 전장에 가득 찬 연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 이날 촬영이 이뤄진 시간은 극히 적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흙을 새로 붓고, 땅을 고르고, 물을 부어 진흙탕을 만드는 데 할애됐다. 이준익 감독과 연출부는 공사장의 ‘십장’처럼 현장을 지휘했다.(왼쪽 사진)♣ 진흙탕 위에 레일을 깔고 사기충전한 백제 병사들의 모습을 찍는 장면. 이준익(오른쪽 사진 왼쪽) 감독은 남루한(?) 차림새로 촬영장을 누벼 취재진을 경악(?)케 했다.(오른쪽 사진)
카메라 2대가 돌아가는 가운데 촬영이 시작되자, 계백 장군 역의 박중훈이 “갑옷을 벗지 마라!”고 우렁찬 목소리로 병사를 독려했다. 부장(副將)들도 “아그들아 갑옷을 벗지 마아~” 하며 동요하는 사병들을 통제한다. 모니터를 보던 이준익 감독은 단호하게 “컷!”을 외쳤고, 잠시 확인을 한 뒤 시원시원하게 “오케이!”라고 선언했다. 장수들의 독려에 고무된 백제 병사들이 “죽어불자, 죽어불자!”라며 결의를 다지는 장면이 이어지면서 더위와 피로에 축축 늘어졌던 촬영장이 서서히 달아오르며 긴장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코미디 연기에 임하는 박중훈은 “예전에는 의도적으로 관객을 웃기기 위해 오버 연기도 하고 그랬다면, 이번에는 내가 코미디 연기를 하는 대신에 상황으로 웃기는 식이라 굉장히 즐겁다”고 <황산벌>에 임하는 남다른 소회를 표출했다. 그는 할리우드 방식인 12시간 노동제가 모범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면서 “나운규 감독이 영화를 만든 이래 이런 프로덕션은 처음일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신라와 백제가 사투리를 쓰며 전쟁을 벌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에서 출발한 ‘퓨전역사코미디’ <황산벌>은 11월17일 개봉을 앞두고 90%가량 촬영을 끝낸 상태다. 사진 이혜정·글 문석
♣ 김유신 장군 역의 정진영은 이날 촬영분이 없었는데도 시종 촬영장을 지키고 있었다. 영화촬영과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을 위해 서울과 부여를 오가는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한 장면 한 장면을 꼼꼼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연기를 준비하는 듯 보였다.(왼쪽 사진)♣ 전사자를 연기한 보조연기자들은 상대적으로 편해 보였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납작 엎드릴 수 있고 등에 진흙까지 발라 열기를 차단할 수 있었으니까. 더위와 피로가 심하다보니 하루 동원되는 150∼200명의 보조연기자 중 한번 촬영을 한 뒤 다음날도 출근하는 비율은 10%도 안 된다고 한다.(오른쪽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