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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이냐, 새출발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2001-05-16

15년 전 무식한 루키 시절을 떠올리게 한 <엑시트 운즈>

오은하| 대중문화평론가 [email protected]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액션배우는 아놀드 슈워제네거다. 물론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아주 멋졌지만 그뒤로도 유치원도 가고 아들 선물을

사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하고 심지어는 임신까지 하는 모습에서 친근감을 느꼈다. 가장 싫어하는 액션배우는 장 클로드 반담이다. 내가 이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은 제목들이 더러 ‘장클로드 반담의 **’ 하는 식으로 이름을 명시해주어 즉각 피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설명하기 창피할 정도로 구질구질하고 기구한 사정으로 인해 <엑시트 운즈>를 보게 됐다. 제목으로 미루어 액션영화인 것 같다는 것만

짐작할 뿐 주인공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제발 반담만은 아니기를 초조하게 빌었다. 다행히 그 바람은 이루어졌으나. 아아, 스티븐

시걸. 반담에 비해 나은 점이 있다면 섣부른 연기를 아예 시도조차 안 한다는 점 정도일까. 평생을 같은 표정과 같은 복장으로 일관하며 때가

되면 액션 한 게임씩 선보일 뿐인 그 거인. 내 심장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걸 영화를 개봉관에서 내 돈 내고 보게 될 줄이야.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꽤 재밌었다. 화려한 쌈박질과 음악은 액션영화에 약한 나에게조차도 즐길거리를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걸

영화로는 드물게 유머와 뜻밖의 반전까지 있었으니. 마음이 편안히 자리잡자 시걸이 귀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비록 중견이긴 하지만 초보나 마찬가지로

갖은 실수를 저지르며 좌충우돌 헤매다가 좌천까지 당하는 모습을 보니 내 옛모습까지 슬며시 떠올랐다.

취직 못해 방황하며 입사시험이란 시험은 다 응시하고 있던 무렵 한 경제신문사가 단순암기력 하나만 보고 나를 구제해주었더랬다. 지금으로부터 십오년

전쯤 얘기다.

그 신문사 국제부는 어떤 곳이었던고 하니 예를 들어 중국이 변동환율제를 채택했다고 하면 그것이 일은 물론이고 점심식사 화제와

잡담에까지 오르는 그런 풍토였다. 어떤 선배는 오로지 간밤 세계 각국 외환시장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가 너무나 궁금해 새벽같이 출근해 단말기를

두드려보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고 또 어떤 선배는 간단한 질문 한 가지를 해도 자본주의의 연원과 세계경제 최근동향까지 다 동원해 강의를 하는

바람에 나중엔 모르는 것이 있어도 궁금함을 참게 만들어버렸다. 간단한 농담 한 마디를 하려 해도 분데스방크나 CBOT를 언급하는 분위기에서

나는 너무나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대체 분데스방크가 무슨 결정을 내리던 나랑 무슨 상관이관대 여기에 온 신경을 세워야 하는지 동기부여가 전혀

안 됐으며 텍사스 중질유 값이 최고치를 경신하든 말든 왜 내가 밤잠 못 자며 그것을 챙겨야 하나 의아스러웠다. 그런 동기부여 여부는 실은 사치스런

얘기고, 진짜 힘들었던 건 나의 무식함이었다. 도쿄외환시장에서 1달러가 어제 103엔이었는데 오늘 105엔이라면 대체 엔이 오른 건지 달러가

오른 건지 그럼 원화는 어떤 영향을 받는 건지가 한번에 깨달아지지가 않고 적어도 몇 단계 거쳐 산수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무식한 상사는 회사의 재앙이지만 무식한 루키도 만만찮은 두통거리다. 무식한데 마음만 앞서는 루키는, 무식한데 의욕만 충천한 상사 못잖게 성가신

존재다. 없는 실력을 부지런함과 의욕으로 만회해보려던 나는 결정적인 실수를 여러 건 올렸고 급기야는 한 나라의 GNP에 0 하나를 더 붙이는

대단한 만행까지 저질렀다. 다행히 매번 신문이 인쇄되기 직전에 누군가가 바로잡아주었지만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다. 영화 <파이란>에서

가장 가슴에 남는 대사는 그래서 강재 것도 아니고 파이란 것도 아닌, 용식이의 말이었다. “너는 이 바닥 사람이 아냐. 안 되는 건 안 돼.

그냥 내려가.”

비록 센스는 없어도 용기넘치고 의욕 대단한 경찰 시걸은 갖은 노력과 의지 끝에 결국 모두에게 인정받는 엘리트로 변화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달라서

나는 용식이 말마따나 이 바닥이 내 바닥이 아니라고 일찌감치 결론 내리고 몇년 안 지나 그곳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모르는 걸 배우고

익히게끔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것조차 적성이고 실력임을 깨달으면서.

이젠 나이도 들고 세상살이 이치도 조금은 알아서, 모든 사람이 적성에 맞아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전문가처럼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실은 얼치기인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실력보다 더 크게 그 사람 평판을 좌우하는 것은 포장능력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때만 해도 양심과 과대망상이 살아 있던 때라서

조직에 필요없는 사람은 스스로 나가줘야 한다는, 피래미 주제에 참으로 어마어마한 직업윤리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만약 자기가 지금 일에 잘 안 맞는다고 생각된다면 자기가 시걸 같은 경우인지 오은하 같은 경우인지를 판단해봐야 할 것이다. 시걸쪽이라면 열심히

노력하면 되겠고 불행히도 오은하쪽이라면 다시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떠나 새출발하든가, 아니면 아예 신경을 꺼버리든가. 경험자로서 얘기한다면,

후자도 전자만큼이나 현명한 방법이고 전자도 후자만큼이나 비전없는 길인 것 같다. 근데 영화 재밌게 보고서 왜 이런 뚱한 결론이 나온 거지?